가장 많은 예술가의 이름을 불러들일 수 있는 술을 꼽으라면 단연 ‘압생트’다. 19세기 프랑스에도 ‘연관 검색어’라는 게 있었다면 압생트와 함께 줄줄이 꿰이는 이름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마네, 드가, 로트레크, 고갱, 피카소, 보들레르, 베를렌, 랭보, 에드거 앨런 포, 오스카 와일드, 헤밍웨이(와인 샤토 마고와 칵테일 모히토를 사랑한 헤밍웨이는 여기서도 등장한다!), 예술가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면 프로이트와 스탈린까지.
알코올 도수가 70도 가까이 되는 독한 증류주인 압생트는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이는 독특한 색 때문에 ‘초록 요정’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초록의 압생트를 마시는 방법은 독특하다. 증류주에 허브가 녹아 들어간 압생트는 풀 특유의 쌉쌀한 맛이 난다. 최적의 레시피를 궁리하던 애주가들은 여기에 단맛을 더하기로 했다. 구멍이 난 숟가락을 잔에 걸치고 그 위에 각설탕을 얹어 차가운 물을 조금씩 부어 설탕을 녹여가며 마신다. 하나의 행위가 곁들어진 새로운 음주 방법은 당시 예술가들을 유혹한 또 하나의 지점이었을 것이다. 압생트를 마시려면 전용 숟가락과 압생트의 양을 측정할 수 있는 전용 잔이 필요하다. 19세기 압생트에 매혹된 화가들이 그린 그림에도 압생트 옆에 나란히 전용 잔이나 물병이 놓여 있다.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역시 자신의 그림에 압생트를 종종 등장시키곤 했다. 압생트 한 모금 마셔보지 못하고 말하긴 그렇지만, 압생트와 가장 잘 어울리는 예술가를 꼽으라면 고흐의 이름을 부르겠다. 명도가 높은 초록과 노랑 등의 물감을 듬뿍 찍어 붓끝으로 힘있게 밀어낸 그림일지라도 이상하게 그의 작품은 울적해 보인다. 그래서 고흐의 그림에는 비가 아주 세게 내리는 날, 조명을 밝혀도 어두운 기운이 우리를 품고 있는 듯한 날 마셔야 할 독한 술의 기운 같은 것이 감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코올중독임을 스스로 밝혔던 고흐는 여러 술 가운데 특히 압생트에 중독됐다는 설이 많다. 정신분열 등 금단현상으로 기괴한 행위를 일삼던 고흐와 알코올중독에 시달렸던 많은 예술가들이 압생트를 사랑해 마지않자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압생트에 환각 및 중독 성분이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금지령을 내린다. 1906년 벨기에를 시작으로 네덜란드·미국 등지에서 압생트의 판매와 제조가 금지됐고, 압생트의 발상지인 스위스 역시 1910년 금지령을 내린다. 유럽에서 가장 활발하게 압생트를 제조·판매했던 프랑스에서도 1915년부터 압생트를 마실 수 없게 됐다. 그러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밀조가 계속되자 1980년대 이후 하나둘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압생트는 다시 허용된다.
많은 예술가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술이니 애주가라면 한 번쯤 그 독한 기운에 취해보고 싶을 것이다. 보들레르도 그의 산문시집 에서 그러지 않았나. “끊임없이 취해야 한다. 그런데 무엇에 취한단 말인가? 술이건 시건 덕성이건 그대 좋을 대로 취할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압생트 불가다. 지난해 4월,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압생트에 중독 가능성이 있는 약초인 ‘쓴쑥’이 함유됐다는 이유로 안전성이 확인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사지도 팔지도 마시지도 말라고 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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