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각으로 지난 12월3일 새벽, 2018년과 2022년 월드컵 개최지 발표가 있었다. 2018년 개최지가 발표되던 순간 러시아 유치단이 환호성과 함께 ‘우라!’(만세)를 외쳤다. 그런데 화면을 보니 유치단의 면면이 정말 놀라웠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축구팀 첼시 구단주인 러시아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 아스널에서 뛰고 있는 러시아 국가대표 축구선수 아르샤빈이 있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놀랍게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의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러시아 출신으로 세계 최고의 인기 소프라노인 안나 네트렙코가 함께 유치전 승리를 기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러시아 유치단 구성에 난 한 방 먹고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저거다! 러시아는 월드컵 유치에 러시아 최고의 ‘문화 브랜드’인, 세계에서 가장 바쁜 지휘자와 세계에서 가장 인기 많은 여성 성악가를 함께 투입했던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소치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직접 영어로 연설했을 때보다 내겐 더 충격적이었다. 러시아라는 국가는 놀랍게도 전통적으로 강렬한 문화·예술의 힘을 통해 월드컵 유치에 화룡점정을 해낸 것이다.
이후 영국에서는 ‘러시아 월드컵은 결국 마피아가 한몫 챙기게 될 것’이라고 조롱하는 기사들도 나오고 있지만, 의 음악평론가 리처드 모리슨은 “영국을 위해서는 발레리 게르기예프같이, 쟁취해 오는 인물이 있어야 한다”고 썼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지휘자, 아침에 네덜란드에서 공연한 뒤 전용기를 타고 밤에는 모스크바에서 지휘하는 사람. 푸틴이 대통령이던 시절부터 전화 핫라인이 개통돼 있고 지금도 푸틴 총리와 핫라인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필요한 문제를 즉석에서 해결하는 음악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 페스티벌 기간 중에는 매일 지휘하는 것도 모자라 하루에 두 번 지휘대에 오르기도 하는 지휘자. 그는 런던의 제1오케스트라인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이자 상임지휘자로 활약하면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하는가 하면 일본으로 마린스키 극장 단원들을 이끌고 가 오페라 순회공연을 펼친다. 언제 곡들을 다 익히는 건지는 오직 그만이 안다. 모리슨은 이런 살인적인 스케줄을 가진 ‘일벌레’가 왜 영국에 필요하다고 쓴 것일까?
게르기예프는 지휘자이자 매니저 역할을 혼자 다 해낸다. 영국 예술계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모리슨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훨씬 큰 금액을 움직이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큰 나라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영국인 캐머런 매킨토시가 영국과 미국의 뮤지컬 신을 장악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연주단체를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그의 경이로운 활동에 놀라움을 표했다. “유일하게 게르기예프만이 모든 걸 갖고 있다. 세계의 많은 극장들이 경기침체로 예산을 줄이는 가운데 놀랍게도 56살의 오세티야 출신 지휘자가 100년 넘은 유서 깊은 마린스키 극장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발레와 오페라의 공장으로 만들고 있다. 빼어난 성악가와 발레 무용수를 끊임없이 공급하고 있으며, 2006년에는 1200석짜리 새로운 마린스키 콘서트홀을 짓고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다. 게다가 마린스키 오페라보다 더 큰 2천 석짜리 새로운 오페라하우스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짓고 있다.”
미국 시사주간지 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도 선정된 게르기예프의 활동 반경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러시아 클래식 문화를 대표하는 ‘차이콥스키 콩쿠르’도 이제는 그가 지배하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린스키 오페라극장 음반 레이블을 만들어서 직접 레코딩을 한다. 유통단계를 줄이고 극장이나 오케스트라가 직접 음반을 만든다는 사실은 음반 레코딩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명적인 시도다.
모리슨은 “게르기예프는 빼어난 음악가이면서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는 뛰어난 기술을 가진 매니저임을 보여주고 있다”며 영국 예술계에도 이런 인물이 있으면 좋겠다고 아쉬운 어조로 말한다. 비단 영국 예술계뿐이랴. 우리 문화예술계에는 발레리 게르기예프에 필적할 만한 국제적인 거물이 한 명도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국제적인 문화예술의 거물이 나올 수 있는 풍토를 마련해야 한다.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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