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조선일보 편집국장의 손자가 말하는 만주동포 의연금 부정사건과 숨겨진 야담들
1999년 3월 필자가 거의 10년 가까운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의 일이다. 교보문고에 가서 그동안 나온 책들도 보고 강의에 필요한 자료를 구하려고 광화문 지하도에 들어섰는데 벽면에 부착한 큰 광고가 눈에 띄었다. “할말은 하는 신문!” 순간 나는 잠시 헷갈렸다. “아니, 한겨레신문이 저런 촌스러운 광고를 다 하나?” 그러나 몇발 더 다가가자 조선일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그때는 1998년 말부터 조선일보가 시작한 최장집 교수 죽이기 사상검증의 여진이 아직 끝나지 않고 있던 때였다. 할말을 하는 게 아니라 못할 말을 막 해대는 신문이 할말을 하는 신문이라고 호소하다니. 나는 할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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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상태 열악했던 30년대의 조선일보
그러나 어디 조선일보 때문에 할말을 잃은 사람이 어디 필자뿐이겠는가? 국세청의 발표로 저 엄청난 탈세액수에 우리 모두가 할말을 잃고 있다. 얼마 전 경쟁지 중앙일보의 사주가 탈세혐의로 구속되었을 때 언론사 사주도 납세의 의무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하던 조선일보는 이번의 세무조사가 비판적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언론탄압이라고 핏대를 올리고 있다. 세무조사를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하는 방씨 일가의 족벌신문 조선일보의 행태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밤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조선일보 사주 방일영의 양할아버지 방응모 선생이 조선일보를 인수하는 과정이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게 된 것은 일제가 1932년 3월3일 조선일보의 안재홍(安在鴻) 사장과 이승복(李昇馥) 영업국장을 만주동포에 대한 의연금 중 7천여원을 회사 운영비로 부정사용했다는 혐의로 구속하면서 조선일보사가 극심한 혼돈에 빠진 데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일제가 조선일보를 눈의 가시로 여기는 것이야 현 정권이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을 보는 시각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아무도 이를 언론탄압으로 보지는 않았다. 불행히도 만주동포 의연금 일부가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의 경비로 사용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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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조선일보는 막강한 자금력을 자랑하고 있지만 1930년대 초반까지의 조선일보의 재정상태는 극히 열악했다.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 당국은 이른바 문화정치를 실시하면서 1920년 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조선어 신문 2개의 발행을 허가했다. 동아일보는 민족주의 계열의 청년들이 발간의 주축을 이룬 반면, 조선일보는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라는, 이름부터 친일 냄새가 물씬 풍기는 단체가 주축이 되어 출발했다. 창립 당시 조선일보는 실업신문을 표방했으나 그 무렵 조선의 경제발전은 매우 열악했기 때문에 실업신문의 기반은 극히 취약했다. 친일적인 사람들은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발간되는 <경성일보>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문>을 주로 구독했고, 일반 지식대중은 민족주의자들이 만든 <동아일보>를 주로 구독하였기 때문에 조선일보는 창간 초기부터 경영이 튼실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일보는 다음해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는 친일파 송병준(宋秉畯)에게 넘어갔으나 역시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했다. 당시 언론계 사정을 소개한 <삼천리>나 <비판> 같은 잡지를 보면 송병준이 처음에는 남궁훈 등 대리 사장을 내세웠다가 자신이 직접 사장에 취임했다고 하는데, 조선일보쪽의 공식 기록에는 송병준이 사장을 지냈다는 이야기는 빠져 있다.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한 송병준은 1924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교통총장을 지낸 젊은 민족주의자 신석우(申錫雨)에게 8만5천원에 조선일보를 양도했다. 한말에 경무사를 지낸 거부 신태휴(申泰休)의 아들인 신석우는 월남 이상재를 사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사장에 취임했다.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조선일보는 크게 발전했다. 먼저 조선일보는 일제와 타협적인 태도를 취해가는 동아일보에 비해 진보적이고 오히려 더 민족적인 색채를 분명히 했다. 현재의 조선일보는 진보세력에 대해 극대의 적대감을 갖고 있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당시 조선일보에는 박헌영, 조봉암, 김단야, 임원근, 김준연, 양명, 신일용, 홍덕유, 홍남표, 홍증식, 배성룡 등 초기 공산주의운동의 주역들이 기자 또는 논설반원으로 포진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1925년 9월 총독부가 조선일보에 대한 무기정간 해제의 조건으로 ‘불령선인’들에 대한 해직을 요구함에 따라 한국언론사 최초의 대량 해직사태로 신문사를 떠나게 되었다. 일부 민족주의 계열의 기자를 포함하여 모두 17명이 해직된 이 사태는 당시에는 1975년의 언론인 학살처럼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선일보의 지방조직을 통해 자기 세력을 키운 화요회 계열의 공산주의자들이 조직의 재가동을 위해서는 무기정간의 해제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총독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순순히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뒤 시대일보가 문을 닫게 되면서 시대일보에 있던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조선일보의 진보적 논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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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 집에 드러누운 설렁탕집 할머니
이런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1924년부터 1932년까지는 조선일보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경영면에서 조선일보는 김성수의 탄탄한 재력을 바탕으로 한 동아일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다. 조선일보는 방만한 경영에다가 1928년 5월9일부터 장기간 정간을 당하면서 경영난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당시 조선일보의 간부진들은 1927년의 신간회 창립을 주도하였는데, 총독부는 조선일보 간부들의 신간회 간부직 사임을 무기정간 해제의 조건으로 내걸었고, 조선일보의 ‘비타협’ 민족주의자들은 경영난 때문에 총독부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일보는 9월19일 133일간의 정간에서 풀려났지만 이때의 타격은 재정적으로 조선일보의 경영을 더욱 압박했다. 더구나 신석우의 자금도 떨어져갔고, 기자와 사원들의 월급이 몇달씩 밀리는 것은 다반사가 되었다.
만주동포 의연금 유용사건은 이런 분위기에서 발생했다. 일제에 당당하게 맞서기 위해서는 일제에 트집잡힐 일을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조선일보 간부들은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필자의 할아버지가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언급하기가 몹시 껄끄럽지만, 요즈음의 언론탄압 논란과 직결되는 사안이기에 어색함을 무릅쓰고 이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사장과 영업국장이 구속된 상황에서 편집국장이 빚더미에 올라앉은 신문경영을 떠맡게 되었는데, 신문용지를 공급하던 화신의 박흥식은 꼭 맞돈을 주어야 종이를 내주어 간부들이 시계를 전당포에 잡히고 간신히 돈을 구해 신문을 찍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큰일이 터졌다. 전에 영업국장을 맡았던 이가 경영난 때문에 총독부에 가까운 고리대금업자 임경래에게 조선일보의 판권을 맡기고 거금 2만원을 빌렸는데, 임경래가 총독부를 등에 업고 판권의 명의를 이전한 것이다. 사원들은 애써 키운 조선일보가 친일고리대금업자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임경래의 견지동 사옥 출입을 봉쇄하였고, 밀려난 임경래는 명치정(지금의 명동)에 조선일보 간판을 내걸고 따로 신문을 발행하여 일시적으로 조선일보 이름의 신문이 두개가 발행되었다. 견지동의 정통 조선일보는 비록 기자와 사원들에게 월급은 못 주더라도 점심은 먹여야 일을 할 수 있는 처지였다. 단골인 이문설렁탕집에 편집국장 명의로 매일 수십 그릇씩 설렁탕을 배달시키다가 외상값을 갚지 못해 설렁탕집 주인 할머니가 집에 와 안방을 차지하고 드러눕고, 더이상 외상 설렁탕을 시켜 먹지 못하게 되자 편집국장 등 간부들의 집에서 밥하고 김치를 해다가 먹이면서 신문을 발행하고…. 이러기를 몇달간, 결국 필자의 할아버지는 신경쇠약으로 쓰러지고, 집과 조금 있던 전답은 남의 손에 넘어갔다고 한다. 이런 꼴을 당했지만, 당시 조선일보 간부나 사원들은 사장 등의 구속을 언론탄압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재만동포 원호금 유용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밤의 대통령’은 기생집에서 붙여진 이름
광산으로 떼돈을 번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역사에 가정은 허용되지 않지만, 당시 조선일보 간부들이 재만동포 원호금을 신문사 운영비로 유용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족벌신문 조선일보는 없었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 이후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에 대해 이러저런 비판이 많지만, 현재의 방일영, 방우영 형제가 양할아버지 방응모의 반의 반만큼의 금도라도 있었으면 조선일보가 지금처럼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일보의 방일영 고문을 흔히 ‘밤의 대통령’이라 부른다. 이 말은 1992년 11월 방일영 당시 조선일보 회장의 고희연에서 사원대표인 스포츠조선 신동호가 “낮의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분이 계셨지만 밤의 대통령은 오로지 회장님 한분이셨다”라고 말한 것을 조선일보 사보가 보도한 것을 <기자협회보>가 다시 보도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밤의 대통령’이란 말은 조선일보의 권력을 상징하는 표현이 되었지만, 이는 신동호의 조어가 아니다. 이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은 실은 ‘낮의 대통령’ 박정희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방일영은 박정희의 가까운 술동무였다. 군사반란으로 갑자기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요정에 가보면 방일영은 화술로나 주량으로나 늘 좌중을 휘어잡았다. 박정희가 보기에 자기에 대한 마담이나 기생들의 대접은 깎듯하기는 해도 거리감이 있었지만, 방일영에 대해서는 대접이 극진하면서도 정감이 넘쳐났다. 하긴 방일영은 술이 거나해지면 동석자들의 지갑까지 털어 기생들에게 듬뿍 돈을 쥐어주었다니 누군들 마다했을까? 나이는 박정희가 다섯살 위였지만 술집 출입의 경력으로보나 여자들 다루는 솜씨로보나 방일영은 ‘촌놈’ 박정희보다 한참 위였다. 박정희는 자신을 ‘대통령 형님’이라 부르는 방일영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팔자가 좋은 사람”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낮에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밤에는 임자가 대통령이구먼”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좋게 이야기하면 당대의 풍류객이라는 것이고, 좀 진하게 이야기하면 최고의 ‘X입대장’이라는 것이다. 조선일보사가 펴낸 방일영의 전기에 “권번(券番) 출신 기생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사람이 바로 방일영이란 이야기까지 버젓이 나오는 것을 보면 박정희가 방일영을 그렇게 부른 것도 무리가 아니다.
‘밤의 대통령,’ 암흑가의 황제를 연상케 하는 이 말은 처음에는 부러움과 장난끼가 뒤섞인 박정희의 표현이었지만, 조선일보는 특유의 말 비틀기로 이 말에 전혀 다른 뜻을 부여했다. 지난호 <한겨레21>은 “기발한 재주로 독자 홀려라”라고 조선일보의 기교를 비판했지만, 원래의 말뜻을 비틀어 자기네에게 유리하게 바꾼 최고의 기교는 역시 술집에서 분위기를 휘어잡는다는 뜻에 권력을 부여한 재주가 아닐까 한다.
편집국장 최석채의 탄식
한국의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최대의 공적으로 경영주를 지목한 첫 사례로 많은 사람들이 김중배 선생이 1991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사임하면서 한 이임사를 들지만, 실상 이보다 훨씬 전인 1969년에 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최석채 선생이 이 문제를 지적했다. 1968년 11월 하순 월간지 <신동아>가 정부의 차관도입의 내막을 파헤쳤는데, 이 기사가 문제가 되어 천관우(千寬宇) 동아일보 주필 등 편집국장급 이상 간부 3명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뒤 회사에서 퇴직당했다. 이런 언론탄압이야 곡절많은 한국언론사에서 병가지상사였으나 문제는 당사자인 동아일보를 포함한 신문들의 태도였다. 지방지들이 한결같이 이를 톱기사 또는 3단 이상의 비중있는 기사로 취급한 반면 중앙일간지 8개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일주일이 지나서야 1단 단신으로 간단히 취급하거나 아예 묵살했다.
이 사건이 국회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기자협회보> 편집인이었던 한 언론인의 표현에 따르면 “정작 이 꼴을 만들고 나서야 신문인들은 스스로의 비굴함에 놀랄 지경”이 되어 “갑자기 신문의 자가반성이 대두”하였다. 편집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던 최석채의 발언이 나온 것도 이런 상황에서였다.
최석채는 <기자협회보>에 투고한 글에서 “어째서 이런 시련이 우리에게 닥쳐왔는가”라고 자문하고는 “한마디로 말하면 신문이 편집인과 기자의 손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한국의 언론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이상으로 경영주의 손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최석채는 “나는 언론의 자유가 외부로부터 침해를 받는다는 사실은 제2차적인 문제로 다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면서 언론이 스스로 단결하여 싸우지 못하고 “성문을 열어 외적을 불러들인다면 누구에게 구원을 청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그는 언론이란 성 안에 경영주와 편집인, 기자가 공존하는 데 이대로 가다가는 성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 성주를 향해 주민들이 선전포고를 하는 사태가 오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 위기를 뚫고나갈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면서 이 위기를 돌파할 방법은 노조의 결성에 있다고 강조했다.
또 홍박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영원한 현역 홍종인은 서울의 이른바 대신문들이 자살, 자멸의 길을 스스로 택하고 있다고 질타하면서 “있는 것을 없는 것같이 만드는 사람들이, 없는 일을 있는 것같이, 또 있어서는 아니될 일을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아니 말하리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라며 ‘할말은 하는 신문’ 조선일보의 앞날을 정확히 예측했다. 홍종인은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의 격동기에 조선일보 회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최석채나 홍종인의 자세가 바로 ‘밤의 대통령’에 의해 망가지기 전 조선일보인의 모습이었다.
홍종인이 이 땅의 언론자유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고 우려하던 때는 바로 신문으로서의 조선일보는 죽어가고 있었지만, 신문기업으로서의 조선일보사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던 시점이었다. 조선일보사는 1969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최초의 민간차관으로 일본의 이토츄우 상사(伊藤忠商社: 한일간의 유착의 핵심인물인 세지마가 대표로 있던 회사)로부터 거금 400만달러를 연리 6%에 들여왔다. 사채금리가 50%에 육박하고 은행금리도 25% 내외이던 시절에 이런 조건은 거저나 마찬가지였다. 이 돈으로 조선일보는 코리아나호텔을 지었다. 외국인이 머물 수 있던 호텔이라야 낡디낡은 반도호텔과 조선호텔밖에 없던 시절에 최신식 호텔을 선점한 것은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였다. 1970년대 초반 한국에 오는 외국관광객은 누구였을까? 코리아나호텔은 박정희 정권의 실력자들이 최고의 외화벌이 일꾼으로 치켜세웠던 기생들을 찾아오는 일본인들로 늘 북적거렸다.
조선일보의 현직 주필이요 신문편집인협회 회장인 최석채는 노조에 희망을 걸었지만, 현재 조선일보 기자들의 태도를 보면 그의 기대는 좀 순진했던 것 같다. 성주에 대한 주민들의 반란 대신 현재 조선일보 기자들은 정부의 언론탄압에 맞서 견결히 싸우겠다고 주먹을 불끈 쥔다. 아니, 최석채가 예견한 것과 비슷한 사태는 1975년에 있었다. 이때는 주민들의 반란이 아니라 성주의 일방적인 주민학살이었다.
체면 때문에 언론자유선언을 하라?
1973년 10월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하자, 동아일보와 늘 경쟁관계에 있던 조선일보는 신문사의 체면 때문에 2등은 해야 한다면서 기자들을 부추겼다. 이때 나선 사람이 최석채의 뒤를 이어 조선일보 주필이 된 선우휘였다. 그는 후배 기자들을 불러 “동아와 한국에서는 기자들이 언론자유선언을 했는데 조선일보 기자들은 왜 아무 움직임이 없느냐”고 말했다. 선우휘는 방일영의 보통학교 동창으로 당시 조선일보의 실세였다. 꼭 선우휘의 얘기 때문은 아니더라도 언론자유실천은 기자들의 소망이자 생명이었다. 조선일보 기자들도 곧 이 운동에 동참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이어 1974년 11월 이번에는 말로만의 수호결의가 아닌 언론자유실천선언에 들어가고, 이에 다른 신문사들 대부분이 동조했다. 이에 당황한 박정희 정권이 동아일보의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 광고를 해약하게 만드는 악랄한 수법을 동원하자 조선일보는 선수를 쳐서 유신지지 발언을 게재한 편집국장에게 항의하는 기자 두명을 하극상이라는 군대식 표현을 써가며 해직했다.
당연히 조선일보 기자들은 해직당한 동료 두명의 복직을 요구했고, 회사가 약속된 복직시한을 어기자 농성에 들어갔다. 이 무렵 방우영 당시 사장은 두 기자의 복직을 요구하는 기자들에게 “동아일보도 김병익(당시 기자협회장으로 언론자유실천선언을 주도)이를 복직 못 시키는데 내가 어떻게 그들을 받아들여? 나는 김상만 사장보다 세지 못해”라고 말했다. 아직 방우영보다 훨씬 센 방일영이 박정희가 말한 식의 밤의 대통령이었을 뿐 오늘날의 의미의 밤의 대통령과는 거리가 멀었던 시절의 일이다. 그러나 방우영은 언론자유실천운동의 진원지가 된 동아일보에 비해 화끈하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기자 30여명을 해고한 것이다. 이어 동아일보는 뒤질세라 무려 160여명의 기자를 잘랐다. 이렇게 해직된 두 신문의 기자들은 각각 동아와 조선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언론민주화운동에 나서게 된다.
70년대 초반까지 신문기자들의 처우는 기가 막힐 정도로 열악했다. 초임기자의 월급은 갑근세 면세점 이하이고, 10년 경력의 부장급이 되어야 겨우 도시근로자 평균소득 정도의 월급을 받았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중반 대량 해직사태 이후 월급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이 되자 초임기자의 월급이 웬만한 다른 좋은 직장 월급의 두배 정도로 껑충 뛰었다. 60∼70년대 한국 기자들의 월급은 비정상적으로 낮았지만 80년대 한국 기자들의 월급은 비정상적으로 높아졌다. 비판적 지식인들을 돈으로 매수하려는 독재정권쪽의 욕구와 정권과 야합하여 재정을 튼튼히 한 신문재벌과 재벌신문의 자금력이 이를 가능케 한 것이다.
현재의 조선일보에는 김대중이 있지만 당시에는 선우휘가 있었다. 현재의 조선일보사쪽에 의해서도 그렇고, 조선일보에 비판적인 해직언론인이나 언론학자 양쪽 모두에서 오늘의 조선일보를 있게 한 장본인이라는 평을 듣는 선우휘는 조선일보 해직언론인들의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되었다. 이때 그는 왜 후배기자들에게 가만히 있느냐고 말했냐는 해직기자쪽 변호사의 질문에 자유언론수호선언이 “옳은 일이니까 해야 한다기보다는 조선일보의 체면을 위해 남이 하는 만큼은 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이어 그는 조선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실천을 위해 기자협회 분회의 회보를 발간하였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신문제작을 하는 일도 벅찬데 그런 것까지 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다”라고 말했다. 변호인이 다시 “들어가야 할 기사가 빠지든 깎이든 기자는 기사만 써내라 이 말인가”라고 질문하자 선우휘는 “그렇다”라고 명쾌하게 답변했다. 변호인이 선우휘의 글을 인용하여 “언론이 병들어 빈사상태”에 놓여도 “모든 것을 사장에게 맡기고 가만 있어야 하는가”라고 되묻자 선우휘는 “물론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변호인도 할말을 잃은 듯 증언녹취록은 여기서 끝나고 있다.
선우휘의 당당한 ‘소신’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조선노조투쟁지지·해직언론인원상회복쟁취대회’를 마친 조선일보 해직기자들이 신문사 앞으로 가서 방우영 사장의 공개사과와 복직을 요구하자 젊은 기자들은 방우영 사장의 “저항세력은 척결하겠다”는 공갈에도 신문사 앞으로 나와 선배들을 맞이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며칠 전 김대중 주필은 요즈음 자기가 아직도 조선일보에 있느냐는 소리를 듣는다는 칼럼을 썼지만, 필자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그때 그 젊은 기자들에게 묻고 싶다. 아직도 조선일보에 있긴 하냐고.
박정희가 가고 아직은 상황이 유동적이었던 1980년 봄 선우휘는 일본의 극우보수지 <산케이신문>과 인터뷰를 가졌다. 이때 그는 “언론규제는 없는 것이 낫다. 하지만 한국에서 언론의 제약이 가해져도 하는 수 없는 상황이 있다 4·19에서 5·16까지의 1년은 어떠했는가. 언론의 자유와 책임이 전혀 양립되어 있지를 않았다. 하룻밤 새 모든 신문이 정부에 대해 비판적으로 나서게 되고 1년 내내 연일 조석간을 통틀어 정부를 두들겨팼다”라고 말했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키게 한 사회적 분위기를 만든 것이 언론이었는데, “그 사태를 한국의 언론이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고 5·16에 의해 언론규제를 받게 되자 이번에는 언론의 자유를 붙잡고 ‘슬픈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너무도 감상적인 처사”라고 비난했다.
자유언론을 외치던 기자들을 내쫓고, 한번도 이를 반성하지 않은 밤의 대통령의 완벽한 지배하에 있는 조선일보. 불편부당이라는 사시와 달리 극우수구세력의 대변지로 전락한 조선일보. 그 조선일보는 지금 언론자유를 외치는 마당에 선우휘의 발언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한국의 독자들은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때 봇물터지듯 밀려온 격려광고에서 보듯이 신문이 언론탄압을 받으면 발벗고 나서서 언론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 그런 한국의 독자들 절대다수는 지금 언론자유를 외치는 사주들의 아우성을 무시하고 언론개혁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를 보고 “자업자득”이라는 내 말에 옆에 있던 친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한다. “아니야, 자승자박이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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