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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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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자마자 12만명을 잡아먹다

등록 2005-12-08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국가보안법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1)… 고양이가 호랑이로 거듭난 변천사…“비상한 시기 비상한 조치”로 만든 법에 정권마다 독소조항 추가하며 덩치 키워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2005년 7월 말, 온 나라의 관심이 재벌과 정치와 언론과 검찰의 추악한 거래를 밝힌 X파일에 쏠려 있던 무렵, 수구언론은 강정구 교수 문제를 치고 나갔다. 여느 때 같으면 그저 별 글이 다 있다는 식의 가십 기사로 한두 번 언급될 정도의 글이 갑자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것이다. 2001년의 만경대 사건(본란 2001년 9월1일자 375호 ‘누가 좌우대립이라 부추기는가’ 참조)으로 이미 세인의 주목을 받은 바 있던 강정구 교수의 사법 처리 문제는 일파만파로 번져나가더니, 급기야는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과 이에 반발한 검찰총장의 사퇴라는 초유의 사태를 낳았다. 그 과정에서 다시금 주목을 받게 된 것이 국가보안법이다.

남로당 때려잡으려 태어났지만…

분단과 대립을 법제화한 국가보안법 체제 아래서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징그럽도록 모질구나, 국가보안법의 목숨이여! 2004년 말,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1천여 명의 대규모 단식단이 여러 날 밥을 굶어가며 싸웠건만 폐지하지 못했던 국가보안법이 1년을 무사히(?) 넘기고 2005년 12월1일 또다시 생일상을 받았다.

국가보안법,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아직 대한민국의 형법이 마련되지 못한 채 일제가 쓰던 구 형법을 그대로 물려 쓰던 시절인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은 태어났다. 법률 10호이니, 국가 운영에 꼭 필요한 각종 기본법에 앞서 국가보안법이 말들어진 것이다. 그때는 전문 6조에 최고형도 무기형인 단출한 법률이었지만, 지금은 전문 25조에 사형이란 말도 여덟 번이나 나오는 무시무시한 법률로 변했다. 그나마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5차례의 개정을 거치면서 손톱, 발톱을 뽑지는 못했어도 조금 다듬어 이 모양이다.

국가보안법은 일제하의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을 계승한 것인데, 국가보안법의 뼈대가 되는 법률안이 국회에 처음 제출된 것은 1948년 9월20일로 이때의 명칭은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이었다. 그런데 1948년 10월19일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자 이 법의 제정이 가속화됐는데, 실제 내란행위에 대한 처벌은 기존 일본 형법을 의용(依用)하는 미군정 형법으로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은 내란행위보다는 내란을 일으킨 행위자들과 유사한 사상과 목적을 갖는 결사·집단의 구성원들을 처벌하는 방향으로 변질돼간 것이다. 요컨대 이 법은 아직 구체적인 위법행위가 표출되지 않은 남로당과 그 외곽조직 등 합법적 형태의 좌익 결사들의 존재를 말살시킬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이란 명칭도 기존 형법상의 내란죄와 중복된다는 문제제기에 따라 ‘국가보안법’으로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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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이란 놈, 처음부터 말이 많았다. 쥐 잡는다고 고양이 들이겠다는 논리지만 고양이 관상을 보니 씨암탉 잡아먹을 놈이었고, 또 실제로 그랬다. 어디 씨암탉뿐이랴?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게 바로 공산당이라고 설쳐대면서 국가보안법을 휘둘러댔으니, 정말 새 나라의 진로를 망쳐놓았던 것이다. “민족적 양심을 가진 애국지사가 이 법망에 걸려서 불순도배의 손에서 쓰러지리라는 것을 역력히 앞날을 보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한 노일환 의원이나 그와 함께 이 법안을 반대한 소장파 의원 13명이 6개월 뒤에 이 법에 의해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되고 만 것이다. 악질 친일경찰 출신이 지도부를 장악한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은 국회 프락치 사건 직후의 일이다. 이때 구속된 의원들은 반민특위 구성에 앞장선 이들이니, 국가보안법과 친일파의 상부상조 관계를 알 수 있다. 국가보안법을 찬성한 의원들도 농사지을 때 피를 뽑다 보면 나락을 다칠 수 있는 법이라며 “국가보안법을 발동하면 우리 애국자가 그 안에 섞이리라는” 염려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국가보안법의 운영 실태를 보면 피를 뽑다가 벼가 일부 섞인 정도가 아니라 뭉텅이로 벼를 뽑아내다 보면 그 안에 어쩌다 가끔 피도 섞이는 식이었다고나 할까? 서울 친구가 방학 때 와서 농사일 돕는다고 하다가 그랬다면 ‘쉬는 게 돕는 거다’라고 타박이나 하겠지만, 전문가를 자처하며 시퍼렇게 날선 낫을 휘두르며 눈을 부라리는 공안족이 득세하는 동안 자유민주주의의 논은 결딴나고 말았다.

발의한 의원들도 걱정했다

국가보안법을 발의한 의원들이나 제정을 적극 원한 정부도 이 법이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도 인권 상의 문제점이나 오남용 우려를 인정하면서도 대한민국이 인민공화국으로 바뀔 수 있는, 즉 나라가 망할 수 있는 비상한 시기라며, 비상한 시기의 비상한 조치로 국가보안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변명했다. 지금과 비교해본다면 1948년 12월이라면 실제 좌익세력이 여순사건 등 군사행동까지 감행하던 위기 상황이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지 겨우 100여 일, 영토 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요구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비상한 시기의 비상한 조치로 만들어진 1948년 제정 당시 국가보안법의 처벌규정의 최고형이 무기인 반면, 이미 남북 간에 체제 경쟁의 승패가 결정됐다고 국민 절대다수가 믿고 있는 지금도 국가보안법은 사형이 8번이나 나오는 무시무시한 법으로 남아 있다. 제정 당시의 국가보안법에서 가장 무거운 처벌조항은 반국가단체에 해당하는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을 가진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를 무기징역에 처한다는 것인데, 이 조항은 1년 뒤에 사형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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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국가보안법 제정 당시에 이 조항을 처음부터 사형으로 규정하지 못했을까? 국가보안법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죄는 반국가단체 구성죄인데, 이는 사실 제정 당시에 정부 쪽에서도 인정했듯이 내란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내란죄의 예비음모에 해당하는 것이다. 범죄를 실행한 것(기수)도 아니고, 범죄의 실행에 착수했으나 행위를 종료하지 못했거나 결과가 발생하지 않은 경우인 미수도 아닌 예비음모를 사형에 처한다는 것은 아무리 위기 상황이라 해도 좀 ‘거시기’했던 것인데, 1년이 지난 뒤에는 그 ‘거시기’마저 벗어던진 것이고, 지금은 반국가단체 구성에 관한 대목뿐 아니라 잠입탈출 등 다른 부문까지 사형을 확대 적용하고 있다. 더구나 반국가단체 구성에 관한 죄는 내란죄의 예비음모에 관한 조항인데, 현행 국가보안법은 반국가단체 구성을 예비음모하거나 그 가입의 권유를 예비음모한 자까지 처벌하도록 되어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예비의 예비까지 처벌하는 법 앞에서 근대 형법의 기본 원리인 죄형법정주의는 어디 가서 찾으리오?

이 법을 만들어놓고 1949년 한 해 동안 이 법으로 잡아가둔 사람이 무려 11만8621명이었다. 일제는 전국에 많은 감옥을 지어놓고 물러갔는데, 해방 이후에 감옥은 다시 차고 넘치게 되었다. 국가보안법 하나만으로 1년에 12만 명에 가까운 사람을 잡아들이니 전국의 주요 형무소는 죄다 차고 넘칠 수밖에 없었다.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었지만 웬만한 감옥은 모두 정원의 2배 이상이 수용돼 있었고, 수감자의 80% 이상이 좌익사범이었던 것이다. 절도, 강도, 사기, 폭력, 상해, 강간, 살인, 방화 등 인간 세상 온갖 범죄행위의 4배가 넘는 인원을 국가보안법 관련으로 잡아들였다는 이야기다.

자백 부인해도 증거 인정

법무장관 권승렬이 국회에서 보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 검찰은 1년에 약 10만 건을 기소했는데 그중 8할이 좌익 사건이었다. 1년에 8만 건 정도의 사건에서 절반만 상고한다 쳐도 대법원에 몇만 건이 쌓이게 되니 다른 사건을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승만 정권은 참으로 희한한 방식으로 국가보안법의 확대 적용으로 인한 사법부의 어려움을 구해주려 했다. 국가보안법의 처벌 규정을 최고 사형으로 올리고, 단심제를 적용해 바로 사형을 때려 집행해버리면 대법원에 재판이 몰려서 연로하신 대법관들이 격무에 시달릴 이유도 없고, 콩나물시루 같은 형무소의 과밀 수용도 해소되고 빨갱이들은 빨리빨리 처리해버리니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1949년 12월의 1차 개정은 이런 취지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내외의 비판이 하도 심해 시행일을 정하는 대통령령을 제정하지 않은 채 공포 2개월이 안 되어 정부는 2차 개정안을 제출했고, 우여곡절 끝에 단심제 내용이 삭제된 2차 개정이 이루어지게 됐다. 그러나 사상 전향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에 대해서는 선고유예와 동시에 ‘보도구금’(사상전향 공작을 위한 보도소에 구금)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은 1차 개정 때 삽입된 것이 그대로 존치되었다. 보도구금 제도는 뒤에 엄청난 규모의 학살을 가져온 보도연맹 설립의 근거가 되는 것이자, 1975년 제정된 박정희 치하의 대표적인 악법인 ‘사회안전법’의 원형을 이루는 것이다.

흔히 ‘24파동’이라 불리는 1958년 12월24일의 국가보안법 3차 개정은 무술경관 300명이 동원된 가운데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최악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루어졌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던 자유당 정권은 1958년 초에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조봉암을 잡아넣었지만, 조봉암의 제거만으로는 1960년 대통령 선거를 기약할 수 없었다. 이에 자유당은 야당과 언론을 통제할 수단으로 국가보안법의 개정을 추구한 것이다. 국가 기밀의 개념은 크게 확대됐고, 정보는 북이나 반국가단체에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수집하기만 해도 처벌할 수 있게 됐으며, 이 정보가 잘못된 것이었다 해도 처벌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두고두고 문제가 된 것은 형사소송법이 규정한 자백의 증거능력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사건에 대해 예외조항을 둔 것이다. 피고인이 법정에서 1차 수사기관에서 행한 자백을 부인할 경우 당시의 형사소송법은 이를 증거로 채택할 수 없게 했는데, 특별법 성격을 지닌 국가보안법에서 이에 대한 예외를 인정한 것이다. 이제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자백은 ‘증거의 왕’이 된 것이다. 공산주의자란 원래 교활해서 증거를 남기지 않는 법인데, 자꾸 증거를 대라니 답답할 뿐이라던 공안족들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국가보안법 수사에서 널리 행해지던 고문과 가혹행위가 국가에 의해 묵인돼온 것이라면, 이 조항의 개정으로 인해 이제는 법적으로 조장, 장려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전두환 집권 뒤인 1980년 12월 삽입된 (지금도 살아 있다)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인지하여 체포한 수사기관 또는 정보기관에 종사하는 자”에 대한 상금, 보로금 지급 규정은 조작간첩 사건을 일으키는 추동력으로 작용해왔다.

전두환이 이룬 국보법의 대중화

1960년 4월혁명이 일어난 뒤 국가보안법은 다시금 전면적으로 개정됐는데, 24파동 당시 들어간 독소조항의 상당수가 빠지게 됐지만 새로운 독소조항도 들어갔다. 대표적인 조항이 불고지죄인데 가족을 신고하지 않았다고 처벌받는 반인륜적 성격은 차치하더라도, 법리적으로도 부작위범이라 하여 무엇을 행한 것이 아니라 행하지 않았다고 처벌받는 것으로 대단히 문제가 많은 조항이다. 얄궂은 것은 이 조항으로 처음 곤욕을 치른 사람은 다름 아니라 박정희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공안검사인 한옥신이었다는 점이다. 부산지검 정보부(지금의 공안부) 검사로 있던 한옥신의 사촌이 대남공작원으로 남파돼 한옥신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갔는데, 한옥신이 이를 신고하지 않아서 조사를 받는 등 오랜 기간 고생했고, 인혁당 사건이나 동백림 사건 같은 골치 아픈 사건이 터지면 한옥신은 직급을 초월해 구원투수로 투입돼야 했다.

1961년 박정희의 군사반란 이후 국가보안법은 반공법과 분리되었다. 막걸리 반공법이 속출하기도 했지만, 1960년대에는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이 한국 사회의 상층부를 더 겨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있던 1963년부터 1969년까지 박정희 정권의 초반부에 해당하는 시기에 그는 박정희 주변 인사를 정리하거나 권력 내부에서 군기를 잡는 수단으로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을 많이 이용했다. 특히 절대권력자였던 박정희 자신의 불그죽죽한 경력 때문에 사상 논쟁을 치른 터라 김형욱은 박정희 주변에 혹시 과거에 좌익 경력을 가진 사람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으려 노력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김형욱은 김성곤이나 엄민영 같은 대구 출신을 견제했고,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창이자 술친구인 문화방송 사장 황용주를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했는데, 이런 권력투쟁에서 김형욱이 동원한 무기는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이었다. 또 김형욱은 경향신문사 사장 이준구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아넣어 신문사를 빼앗아 박정희에게 바쳤는데(570호 ‘그는 언론이 탐나서 몸부림쳤다’) 적어도 이때는 주요 방송사나 신문사 사장, 공화당 실력자나 국회의원 등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먹이가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권력집단에 속한 인물들이 알아서 기게 되자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은 그 먹이를 점점 일반인이나 체제 도전 세력 내에서 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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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살로 집권한 전두환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학살범이라는 비난을 조금이라도 무마하려고 통행금지 폐지, 교복 자율화 등 몇 가지 가시적인 조치를 취했는데, 국제사회에서 많은 비난을 받아온 반공법을 폐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공법의 조항이 대부분 국가보안법으로 이관된 것에 불과하다. 반공법이 폐지된 전두환 시절에는 국가보안법의 대중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국가보안법의 상금 규정 신설이 북에서의 공작원 남파 중단과 맞물리면서 공안 사건에서 납북 어부 등의 조작 의혹을 받는 간첩 사건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늘어났고, 학생들의 선언문이 점차 급진적인 색채를 띠면서 웬만한 사건은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이적표현물 소지죄 같은 것은 대학생 잡아갈 때 책꽂이에서 적당히 서너 권 집어가면 100%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주는 ‘안전장치’였다.

80년대, 왜 교도소는 불타올랐나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은 수감자 번호를 붉은 표지판에 써서 가슴에 붙였는데, 학생들마다 붉은 딱지를 가슴에 달고 교도소를 메우게 되고, 또 70년대의 긴급조치 위반자들에 비해 수형생활의 태도도 고분고분하지 않고 교도소 당국과 날을 세우며 싸우게 되니 당시의 한 민중언론에서 가슴에 붉은 딱지 단 사람들의 뜨거운 투쟁을 빗대어 ‘교도소는 불타고 있다’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뽑기도 했다.

그 뒤 1987년 6월항쟁을 거치면서 국가보안법 개폐 논란은 끊임없이 벌어졌는데, 국가보안법은 1990년 헌법재판소의 한정합헌 판결, 1995년 유엔인권위의 폐지 권고 등을 거치면서 끈질기게 목숨을 유지하고 있다. 왜 이리도 국가보안법의 목숨은 끈질길까? 그것은 국가보안법이 국가의 안보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오히려 민주적 헌정질서를 내부에서 파괴하는 악법이다- 어떤 사람들의 철밥통을 유지하는 데에는 매우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의 변천사, 적용사에 이어 국가보안법과 밥그릇의 함수관계나 어떻게 하면 이 지긋지긋한 법을 폐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2~3회에 걸쳐 고민해보도록 하겠다.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고 말했는데, 국가보안법을 새로 지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독자 여러분께서 힘을 모아 우리 평화박물관으로 보내주시면, 다시는 강시처럼 콩콩거리며 다니지 못하도록 잘 간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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