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유일한 ‘반미 무풍지대’ 학생들이 미 문화원을 불지르게 된 극적인 전환… 반미운동은 90년대 들어 더욱 성숙해갔으나 주류 세력의 미국화도 정신없이 진행돼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 사진 임종진· 장철규 기자 stepano@hani.co.kr
대한민국은 미국이 세운 나라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대한민국이 계승한 것은 임시정부라기보다는 임시정부를 부인한 미군정이었다. 미군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관료기구를 만들고, 한국군을 만들고, 국립 서울대학교를 만드는 등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탄생에서 미국이 ‘산파’였다고 하는 것은 미국의 역할을 너무도 과소평가한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한국 정부를 구원한 것도 미국이요, 주한미군을 통해 북의 ‘남침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지켜준 것 역시 미국이었다. 정치나 군사뿐 아니라 경제와 문화, 교육, 그리고 종교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한국에 미친 엄청난 영향은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이런 특수관계이다 보니 대한민국에서 반미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적어도 1980년 5월 광주를 겪기 전까지는….
부산 미 문화원, 감당하기 힘든 충격
광주는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반미의 무풍지대’였던 한국에 반미의 돌풍은 거세게 휘몰아쳤다. (광주 이전의 반미 문제에 대해서는 437호, 2002년 12월4일자에 실린 ‘반미의 원조는 친일파였다’에 서술했기에 본고에서는 80년대 이후만을 다루겠다.) 미국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도울 것이라는 일반의 기대와 달리 미국은 광주시민 대신 전두환을 껴안았던 것이다. 전두환이 최규하를 끌어내리고 대통령 자리에 감히 오르려 할 무렵,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미국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민의 국민성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그 지도자를 따라갈 것이며 한국민에게는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망언을 했다.
한국 국민들은 미국에 대해 가졌던 나름의 짝사랑이 여지없이 짓밟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했다.
한편에서는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미군이 왜 전두환의 반란과 광주 진압을 저지하지 않았는가를 물었다. “그런데 쟤들이 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거야?”라는 질문이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미국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고 한반도의 허리를 갈라놓은 분단과 미군정 시기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다. 그러나 광주를 겪은 청년학생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이 이런 역사와 사회과학적 질문에 대한 탐구에만 몰두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 청년들은 자신들이 고통스럽게 깨달은 문제의식을 전체 국민들과 함께하기 위한 행동에 착수했다. 그 행동은 미국이 실체를 드러낸 광주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 12월9일 밤, 광주 미 문화원 2층 옥상에서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불은 크게 번지지는 않았고, 출동한 소방차는 발화 20여 분 만에 불을 끌 수 있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당국은 처음에는 누전인 줄 알고 조사했지만, 지붕을 뜯고 불을 놓은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불을 놓은 사람들은 정순철 등 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한 청년들이었다. 당국은 이들을 적발해 재판에 회부했고, 극심한 통제를 받던 당시의 언론은 화재 사실만 간단히 보도했을 뿐 왜 불이 났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대부분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사건은 잊혀졌다. 그러나 건물의 불이야 소방차가 끌 수 있었지만, 한국민들의 마음에 일기 시작한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15개월 뒤인 1982년 3월, 부산 미 문화원에서 불길이 솟았다. 방화였다. 이번에는 밤에 빈 사무실이 잠깐 타다 만 것이 아니었다. 휘발유의 폭발성에 대한 지식이 없던 불을 놓은 학생들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불은 삽시간에 연건평 600여 평의 3층 건물 전체로 번졌고, 그 와중에 도서실에서 공부하던 대학생 1명이 숨지는 비극이 일어났다. 사실 광주 이전까지만 해도 남민전 당시 김남주 등이 식칼 들고 강도한 것이 최대의 ‘무장투쟁’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폭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한국의 민주화운동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게다가 내용은 반미라니….
아주 오랫동안 반미는 반정부에 그치지 않고 반국가행위였다. 반미가 얼마나 넘어서기 힘든 것이었냐 하면 광주 미 문화원 사건 관련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대등하고 올바른 한-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충정”에서 나온 반미가 아닌 ‘친미’라고 주장했어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반미를 내놓고 표방하고, 불을 놓다니…. 대낮에 사람까지 죽은 일이다 보니, 독재정권도 광주 미 문화원 사건처럼 쉬쉬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정부는 이 사건이 ‘불순분자’의 소행이라 단정했고, 언론들은 “방화범들은 사상적으로 좌경화돼 있거나 북한과 매우 깊이 연루돼 있는 불순분자들”이라고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사설에서 “반공과 친미는 헌법 이상의 국민적 합의”라며 기염을 토했다.
재야운동 노선투쟁 불러와
처음 이런 일을 겪고 미국에 대해 어찌할 바 몰라 절절매다가, 국민들, 특히 종교계를 향해 길길이 날뛰던 5공 정부에 비해 미국은 오히려 차분했다. 세계 도처에서 너무나 많은 반미 투쟁을 겪은 탓인지도 모른다. 국무성은 “방화사건이 한국민 전체의 대미 분위기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우아한 말로 슬쩍 넘어갔다. <뉴욕타임스>는 위컴의 들쥐 발언이나 워커 대사의 한국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버릇 없는 자식들” 발언 등을 볼 때 한국에 대해 미국을 대표하는 고위 인사들이 광주사태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그러나 양 국민 사이의 가장 큰 손실은 미국이 민주주의의 싹을 키울 것이라는 희망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이다. 이제는 악의 보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미국 문화원은 광주와 부산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1985년 5월23일 서울 시내 5개 대학생 90여 명은 시청 옆의 미 문화원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왜 또 미국 문화원이었냐고? 그럼 학생들이 미국에 항의하러 어디에 가겠는가? 전경들이 철통같은 경비를 서고 있는 미 대사관에 들어가겠는가, 아니면 총을 들고 버티고 있는 미군기지를 점령하겠는가? 미국 주권의 관할 구역으로 미국의 요청이 없으면 한국의 공권력이 진입할 수 없는 점도 점거농성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요인이었다. 만 3일간 미 문화원에 머무르면서 학생들은 광주학살 지원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었다.
부산 미 문화원 사건 때 검찰은 광주의 ‘광’자도 꺼내지 않고, 대신 극렬 좌경분자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망상 아래 미국의 공공건물에 방화해 인명까지 살상한 조직적인 좌경 테러로 규정했다. 반면 피고인들은 “광주가 아니었다면 자신들은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라면서 “방화의 목적이 반공만 내세우면 어떤 정권이라도 지지해온 미국에 대한 국민적 경고”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논쟁은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반면 3년 뒤의 서울 미 문화원 점거농성 때는 학생들의 주장이 보도되지 않을 수 없었고, 광주에 대한 미국의 책임 문제는 자연스럽게 국민들 속으로 퍼져갔다.
한편 학생운동이나 재야운동에서는 미국 문제와 민주화 문제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져왔다. 군사독재 정권과 미국 간의 관계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갖는 것인가, 민족과 계급 문제에서 어느 쪽을 먼저 해결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를 놓고 벌어진 논쟁은 학생운동, 재야운동의 투쟁노선과 맞물리면서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번져갔다. 이 논쟁 중에서 민족해방(NL) 계열은 민족 문제를 중시했고, 민중민주주의(PD) 계열은 계급 문제의 해결을 우선시했다.
80년대 중반 이후 반미 투쟁을 주도한 집단은 민족해방 계열이었다. 이들에게 미국은 분단의 원흉이자, 통일을 가로막는 세력이었다. 한국 사회 최대의 정치적 금기인 반미를 공공연히 들고 나온 사람들은 다름 아닌 어린 대학생들이었다. 일단 민간인 학살이 끝난 상태에서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사형을 당한 사람들은 죄다 통일 문제(미국이 통일을 가로막는 원흉이라는 점에서 민족해방 그룹에게 통일 문제는 곧 미국 문제였다)를 제기한 사람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나 장면 부통령을 저격한 사람도 사형을 선고받지 않았지만, 평화통일을 주창한 조봉암은 사형이 집행되었다. 4월혁명 이후 통일과 미국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민족일보>의 젊은 발행인 조용수도 5·16 군사반란 직후의 ‘혁명재판’으로 목숨을 잃었다. 통혁당, 인혁당, 남민전 사건 등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실제 사형이 집행된 사건들은 다 미국을 건드릴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69년대 후반부터, 그리고 결정적으로 1972년 유신쿠데타 이후 언론은 완전히 침묵했고, 미국을 비판하는 일체의 기사, 심지어는 미군이 저지른 단순범죄까지도 신문지면에서 사라져버렸다.
88 올림픽, 북한을 응원하다
전쟁과 학살, 그리고 군사독재의 폭압을 거치면서 우리는 우리의 정치적 언어를 빼앗겼다. 어떻게 해야 반미를 하는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싶은데 아는 노래는 하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광주를 통해 알게 된 미국에 대한 진실, 그 기막힌 사연을 이웃들에게 어떻게든 전해야 하는데 반미에 관한 한 1980년대의 한국 사회는 자신들의 정치적 언어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이북의 언어를 빌려 “양키의 노린내” “양키의 군홧발”을 몰아내고, “양키의 용병교육을 거부”하고, 또는 “미제의 각을 뜨자”고 외쳤던 것이다. 그 생경하고 투박한 목소리…, 금기는 그렇게 깨졌다. 서울 미 문화원 점거농성 때 유리창 한 장 다치지 않고 농성을 마무리하면서, “의사표출 방식을 집단행동에 의존해야만 했던 사실에 대해 미국 측에 정중한 사과를 보낸다”고까지 하던 그런 제스처는 이제 사라진 것이다. 말문은 트였지만, 아는 말은 딱 한마디였다. “양키 고 홈!”
분명 학생들은 당시의 대중적 정서에 비해 한참 멀리 나가버린 것이다. 그러나 반응은 뜨거웠다. 한 번도 제대로 꽃피지 못한 채 때로 정치적 탄압을 받고 때로 정치적으로 악용되었던 민족주의가 되살아난 것이다. 원래 산업화가 진전돼 계급분화가 심화되면 민족주의는 약해지는 법이지만, 한국의 경우는 오히려 80년대에 들어와 민족주의가 때 아니게 만발한 것이다. 그러나 이 반미민족주의의 담당층은 김동춘이 지적한 대로 학생과 지식인, 특히 문인과 개혁적인 기독교 인사, 재외 한국인들이었고, 실질적인 동력은 학생이었으며, 공업노동자들의 반미운동이나 통일운동에의 참가는 거의 미미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정치적 공간이 조금 열리고, 통일운동이 본격화됐는데, 이때는 또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이기도 했다. 당시 언론은 만일 미국과 이북이 축구경기를 한다면 어느 팀을 응원하겠는가 하는 식의 여론조사를 많이 했는데, 일본과 이북이 붙어도 일본을 응원하겠다고 할 정도로 반공의식이 민족의식을 압도했다. 그런데 1988년 전후에는 우리의 영원한 우방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미국과 이북이 경기를 할 경우, 이북을 응원하겠다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 놀라운 일은 실제 올림픽에서 벌어졌다. 미국과 소련의 경기에서조차 한국 관중들은 소련을 응원했다. 여전히 국민들은 미군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었고, 아직 소련은 공산 진영의 맹주로 건재할 때였음에도 반공의 보루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미국과 판정 시비가 붙었던 권투경기장에는 여고생들이 “우리는 미국이 싫어요”라는 팻말을 들고 나오는 등 모든 경기장에서 미국과 붙은 팀은 관중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홈그라운드에서 경기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가에서만 외쳐지던 반미 구호는 88올림픽을 통해 대중들 속으로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다. 또한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로 길거리에 미국으로 수출하던 상품이 가득 쌓이면서, 경제적인 반미도 강화되었다.
생활공간 속의 반미운동 시작
1990년대로 들어가면서 반미 문제도 좀더 성숙해진다. 한반도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미국 문제의 심각성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지 못한 채, 북의 낡고 거친 언어를 빌려와 “미국, 무조건 나빠”만 외치던 반미운동이 분화해 구체적인 문제들을 끌어안게 되는 것이다. 미군기지, 미군범죄, 환경, 기지촌 여성,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매향리 문제 등 구체적인 생활공간 속에서 미국이나 미군의 문제를 감시하고 문제점을 바로잡는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운동들은 80년대식 정치적 반미운동과 때로 긴장을 일으키고 때로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80년대의 반미운동이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피하게 북의 정치언어를 빌려 시작되었다면, 이제 남쪽의 정치언어로 표현되는 남쪽의 반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는 반미운동의 ‘탈북화’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조선일보> 등 수구세력은 반미운동이란 극렬 친북세력의 선동으로 자행되는 것이라 믿고 싶어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스펙트럼의 폭은 매우 크다. 1992년 10월 동두천에서 미군 병사에게 끔찍하게 살해된 윤금이씨 사건은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세력이 다시 한 번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이 사건을 어떤 입장에서 바라보는가를 둘러싸고 나타난 견해 차이는 인권, 여성, 계급 등 복합적인 문제들과 반미운동이 어떻게 결합돼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져주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은 어렵게 시작한 반미운동이 깊이를 더해가는 시기였다. 수많은 미국 유학생이 돌아와 한국 사회의 지식권력을 장악해왔지만, 1980년대까지 우리의 미국에 대한 지식은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 허공에 대고 작대기를 휘두를 수는 없지 않은가? 정말 “뭘 알아야 반미를 하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는 미국을 잘 몰랐다. 힘있는 미국, 그래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자기 편으로 포섭할 능력이 있는 미국은 상대에 대한 파악을 좀 더디게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80년대에 우리는 꽤 오랫동안 미국 내부의 입장 차이를 따져보려고 하면 “매파고 비둘기파고 다 똑같은 놈들이야” 하는 식으로 덮어왔던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의 미국 이해가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80년대에 비하면 미국에 대한 지식과 정보도 조금씩은 축적돼가고 있다.
1999년 뒤늦게 한국전쟁 시기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인 노근리 사건이 한국 사회에 알려진 뒤, 연이어 독극물 한강 방류, 기름 오염, 매향리 오폭 등 미군과 관련된 각 분야에 굵직한 사건이 터지더니, 2002년도 월드컵 열기 속에서 의정부의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희생됐고, 처음에는 주목을 끌지 못했던 이 죽음은 현행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하에서 미군 아무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국민적 공분을 불러와 10만 명이 모이는 촛불시위로 이어졌다. (자세한 것은 2002년 12월20일자 439호 ‘10만년어치 감옥살이를 벌었다?’를 참조하세요.)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제국인’들
촛불시위의 열기 속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반미 감정 좀 가지면 어때?”라 말하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고 한국은 파병을 결정했다. 파병 자체는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한국에 관철되는 미국의 힘이었다. 꼭 20년 전 김세진, 이재호 두 젊은이가 자기 몸을 불살라가며 반미를 외치던 그 시절과 비교한다면 반미의 대중화는 엄청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국 사회 주류의 미국화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이루어진 것 같다. 냉전 종식 이후 “세계를 단일제국으로 재편한 미국의 질서에 동참하지 않으면 죽는다”라고 협박하던 자들은 이미 국제인이 아니라 제국인(帝國人)이 되어 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전략적 유연성 문제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를 보면 한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들 제국인이다. 한국 이름을 갖고, 한국 대학 나오고, 한국에서 한국인 부인과 살고 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국익은 한국의 국익이 아니라 제국의 이익이다. 내선일체를 꿈꾸었던 옛날 일본 제국주의자들이나 친일파들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체감을 제국은 이미 이루고 있다. 80년대는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다. 그때는 ‘숭미(崇美) 사대주의자’라는 말도 쓰고, 친미파라고도 부르고 그냥 친미파라 하면 재미없으니까 ‘미친파’라고도 하고 그랬지만, 친일파나 친미파는 그래도 한국 사람에게나 붙일 수 있는 말이다. 한국말에 능통한 머리 까만 미국 사람들, 청와대에, 국회에, 정부 각 부처에, 언론사에, 대학에 득시글하면서 한-미 동맹만이 살길이라 외치는 사람들, 그들의 머리 속에 한국은 없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그리고 반미운동이 당면한 중요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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