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의 역사이야기]
해방 이후 국가가 교육 책임 떠넘기며 사학의 기형적 성장을 초래
1990년 사립학교법 개악하자 족벌언론마저 개탄했던 족벌사학 활개쳐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한나라당이 사립학교법 개정에 반발해 국회를 뛰쳐나가 거리를 방황하다가 두 달 만에 국회로 돌아왔다. 도대체 사립학교법이 뭐기에 유신공주 박근혜는 구국의 결단을 외치며 엄동설한에 거리를 헤매야 했던 것일까? 이번의 개정안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사학을 통제하는 법이 유신공주의 아버지 박정희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1963년 이래 사립학교법은 36차례 개정됐지만, 이 법 때문에 국회가 파행으로 간 것은 처음인 것 같다. 5·16 군사반란 이후 사립학교법이란 단어를 <조선일보>를 통해 검색해보니 모두 540회의 기사가 실렸는데, 그중 1990년 3월의 말 많고 탈 많은 개악 이전의 기사는 17건에 불과하다. 근대적 사립학교가 수립된 이래, 사립학교법이 사회적 논란의 핵심적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척된 이후인 극히 최근의 일이다.
농지개혁 임박, 보상 노린 지주들
‘역사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학교가 원래 니 거였니?’(373호, 2001년 8월22일)를 통해 사립학교 문제를 다룬 적이 있는데, 그때는 대표적인 비리 사립대학의 기막힌 사례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았다. 오늘은 왜 사립학교 문제가 이토록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되었는지 한국 교육 속에서의 사립학교의 역사를 통해 짚어보도록 하겠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공교육보다는 사립학교가 성했다. 고려 때 12공도가 그랬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향교가 몰락하고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이 득세했다. 그러나 근대 사립학교의 탄생은 이와는 좀 맥을 달리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나라가 망해갈 때 많은 지식인들은 재산을 내고 몸을 바쳐 학교를 세웠다. 특히 일제의 침략이 심해져 국가기구가 일제에 장악돼가자 민족적 지식인들은 사립학교를 세웠다. 이동휘 같은 웅변가가 함경도를 한 번 돌며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사자후를 터뜨리고 가면 학교가 100여 개씩 일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다. 이런 사립학교를 통제하기 위해 통감부는 1908년 ‘사립학교령’을 제정했는데 1910년까지 당국의 인가를 받은 사립학교가 2250개였다. 일제는 1915년 기존의 사립학교령을 강화해 ‘사립학교규칙’을 반포하고 교육 목적과 내용, 교사의 자격 등을 엄격히 통제했는데, 이에 따라 사립학교는 1920년 689개로 위축됐고, 전체 학교 수에서 1919년 68.5%이던 사립학교 수는 1945년에는 17%로 줄어들었다. 한편 사립학교에 대한 일제의 간섭이 심해지자, 반일적 성향의 가정에서는 아이들을 근대식 학교 대신 서당에 보내는 일이 많았다. 그러자 일제는 1918년 3월 ‘서당규칙’을 공포해 서당을 통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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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의 해방은 정치적 해방만이 아니라, 교육받고 싶은 열망의 해방이기도 했다. 그러나 교육에 대한 재정투자는 극히 미약했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 이후 ‘동화정책’을 실시하고 징병제를 준비하면서 많은 ‘국민학교’를 세웠는데, 미군정이나 그 뒤를 이은 한국 정부는 당시의 폭발적인 교육 수요에 대해 재정투자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일제 말기의 취학률은 54%였는데, 그때 이미 교실이 부족해 2부제를 실시하던 상황이었는데, 1949년 취학률이 81%에 달했으니, 교육 수요의 폭발과 그에 따른 시설 부족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1946년 교육예산 11억원 중 68%인 7억3천만원이 초등교육의 경비로 쓰였으며, 초등교육에서도 국가예산으로는 학교 운영비의 30%만 충당됐고 나머지 70%는 학부모들이 부담했다. 중등교육 비용은 교원 봉급을 제외하면 80%를 학부모들의 협조에 의해 조달했다. 당시 미군정이나 초기의 이승만 정권은 국가가 아니라 학부모들이 교육비의 대부분을 부담하는 것을 ‘수익자 부담의 원칙’이란 미명하에 정당화했다. 그러나 교육의 혜택을 입는 자가 학생과 학부모에 국한되지 않고 국가사회 전반에 미친다는 점에서 수익자 부담의 원칙은 처음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고, 두고두고 말썽이 되었다. 당시 미군정이나 초기 한국 정부는 의무교육의 기반을 닦고, 문맹을 퇴치해야 한다는 목표로 사학의 설립을 장려했다. 특히 농지개혁이 임박하자 지주들은 토지 형태의 재산을 제도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사립학교, 특히 대학 설립에 투자했다. 1940년대 말 교육재단에 대한 지주들의 토지 기부는 대개 농지개혁 과정에서의 문교재단에 대한 특별보상을 앞두고, 자산관리의 한 방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당시의 지주들은 농지개혁 과정에서 국가가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사학재단에 기부한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해주지 않았다고 불만을 터뜨렸지만, 국가기구는 농지개혁 과정에서 ‘문교재단 소유농지 특별보상법’을 통해 교육자본에 속한 재산을 상대적으로 보호했다.
한국전쟁 기간 중에 재학생 징집 연기 등을 통해 사립대학이 팽창한 이야기는 이미 전에 한 적(‘상아탑은 병역비리탑?’, 429호, 2002년 10월9일)이 있으므로 여기서 되풀이하지는 않겠다. 전시하에서 교육예산은 정부 예산의 2.0~2.6%에 불과했는데, 그나마 파괴된 교실 복구에 사용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사립학교에 대한 국가의 재정지원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는데, 중학교에 비해 고등학교에서 사립학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이는 쥐꼬리만 한 교육예산을 의무교육인 국민학교에 우선 배정하고, 남는 부분을 중학교육에 배정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때문에 학생 수를 기준으로 할 때 사립고등학교의 비중은 1952년 20.3%, 1954년 32.9%, 1956년 36.1%로 계속 증가했다. 공교육에서 사립학교의 비중이 크고, 국공립학교의 비중이 적다는 것은 해방 뒤 국가가 공교육기관을 충분히 확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학의 지나친 비대는 사학 우선 정책의 산물이 아니었다. 이는 국가 교육재정의 궁핍으로 초래된 국공립 교육의 부실에서 온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1950년대에 사립학교는 특히 중등교육 부분에서 국가의 책임을 대신해 교육 기회 확충에 큰 기여를 했다.
학생수는 증가, 국가재정은 빈곤
1945~60년 기간 중·고등학생 수는 10배 이상, 대학생 수는 13배 증가했는데, 이같은 급성장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국가가 이같은 폭발적인 교육열 앞에서 교육재정을 확보할 의지도 능력도 없을 때, 학교들이 문을 닫지 않은 것은 ‘사친회’로 결집된 학부모의 힘 덕분이었다. 미국의 PTA(Parent-Teacher Association)와는 달리, 1950년대 한국의 사친회는 교원들의 생활대책 강구, 교사 건축, 학교 운영비 조달 등을 위해 발족한 것으로, 학교 운영의 재정적 부담을 지는 것이 주된 기능이었다. 사친회를 통해 학부모들이 학교에 지불한 금액이 학교 수입의 93%였다. 이는 사학의 재정이 주로 학부모의 교육비 부담으로 유지됐다는 것으로, 한국의 사립학교법이 사학의 자주성보다 공공성을 중시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사립학교의 자유방임 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박정희였다. 박정희 정권은 1963년 8월 사립학교에 대한 통제와 감독을 위해 ‘사립학교법’을 제정했다. 군사정권은 학원 내의 부패와 구악의 일소를 공약으로 내세웠으며, ‘사학의 기업화’를 막겠다는 데 초점을 두고 처음으로 사립학교법을 제정했다. 사립학교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민법과 교육법 등을 적용하거나 준용해왔으나, 학교기관의 감독에 사법(私法)인 민법을 적용하는 것은 공법상의 근거가 약하기 때문에 사학분규 등을 방지하기 곤란해 취해진 조치였다. 사립학교법이 제정 공포되자, 사립학교장연합회·대한교련 등 사학 관계자들은 공공성만을 강조하면서 자주성을 침해한다고 강력히 반발하면서 법 개정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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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 쪽은 1964년 3월 국회에 개정법률안을 제출하는 등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이 개정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사립대학의 정원 초과 모집 사태가 적발되면서 물의가 일어났다. 이 와중에 국회는 개정안 원안을 폐기하고 학교 법인 임원과 학교장의 승인 취소 조항을 신설하는 등 최초의 법안보다 훨씬 강력한 통제 방안을 갖춘 새로운 개정안을 마련했다. 사학 쪽은 당황해 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공청회를 열고 반대결의문을 채택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사학 쪽은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사학법인은 투자 의욕을 상실하고, 행정권한은 무제한 확대되며, 교육의 정치적 중립이 위협을 받고, 법인 임원과 학교장 간, 교직원과 학교장 간의 알력과 분규가 조장된다고 주장했다. 사학 쪽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정안은 11월10일에 공포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1969년 중학교 무시험제도를 실시했다. 이 때문에 사립학교는 학생선발권을 박탈당하게 됐는데, 무시험 전형제도의 채택은 경제성장과 함께 중학교 진학률이 1970년 50.9%에서 1975년 71.6%, 1980년 95%로 급격히 높아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상당 부분을 사학이 떠맡게 되어, 사립중학교도 급속히 팽창했다. 교육 폭발의 추세가 초등교육을 넘어서 중등교육의 영역으로 파급된 것이다. 중학교 무시험 전형이 실시되자 사립중학은 이 조치가 사학의 독자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이 조치 이후 중학교는 공·사립의 구별 없이 의무교육 기관화했는데, 사립중학교에 대한 국가 보조가 실시되지 않아 큰 불만을 초래했다. 1970년 9월 중고등학교장회는 대의원대회를 열고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신입생 배정을 전면 거부하겠다며 국고 보조를 강력히 요구하기도 했다. 1973년 5월5일자 <동아일보> 사설을 보면 “교육의 책임을 반 가까이 또는 반 이상을 사학에 떠맡기고 있으면서도 이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전혀 배려치 않은 채 학사감독권만의 구사를 능사로 여겨왔던 것이 또 하나 우리나라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재정 열악한 사학, 우후죽순 생겨나
한편 1974년에는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이 시행됐는데, 1979년 사립고등학교 학생 수는 전체 고등학교 학생 수의 58.7%에 달했다. 무시험 진학에 따른 고등학교 진학 인구의 증가를 사학이 담당해주도록 사실상 위임한 결과에 따른 것인데, 이는 정부가 중등교육 분야에서 고등학교 교육보다는 여전히 중학교 교육의 기회 확충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학교 수를 보면 공립이 사립보다 많았으나, 학생 수는 사립이 더 많았는데, 이는 공립고등학교는 주로 지방에 설치된 소규모 학교가 많았기 때문이다.
급격한 도시화와 교육열, 그리고 중·고교 무시험 진학제도의 도입으로 인해 학생 수가 크게 늘어나자, 정부는 교육재정을 확보하는 대신 학교 설립을 민간에 떠맡기게 되었고, 사립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는 땅만 내놓으면 정부가 학교 건축비를 지원해줬고, 수익용 재산도 형식적으로 5천만원 정도면 학교 설립을 승인했다. 학교법인 설립 때 한 학급당 130만원의 수익용 기본 재산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법인 인가의 조건으로 규정된 것은 80년대에 들어온 다음부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사학재단 설립자 쪽이 학교 교육을 위해 추가 투자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열악한 재정 상태임에도 앞다퉈 사립학교를 세운 것이다. 이런 사학들이 결국 부실과 부패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손인수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상당수의 사학재단들이 학교 설립 당시 재산을 한 번 내놓고 나면 더 이상 출연하기를 꺼리고, 학생들에게 거둬들인 수업료·등록금으로만 학교를 운영하려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심한 경우, 오히려 “학교에서 돈을 빼내 재단 경비로 쓰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 “학교 경기가 좋았던 시절 많은 이익금을 올려 밑천을 뽑아냈던 재단들까지도 일단 한 번 뽑아간 돈을 다시 내놓으려 하지 않고 쪼들리는 학교 경비만 줄이려 하다 보면 재정난이 가중될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신군부 간섭은 법인의 의욕마저 빼앗아
재단 설립 당초부터 열악한 상태에서 출발한 사학재단의 재정은 평준화정책 이후 더욱 악화됐다. 사립학교의 학생 1인당 교육비는 1970년에는 공립보다 전반적으로 높았으나, 점차 감소해 1976년 이후 공립보다 낮아지며, 1983년에는 공립의 80% 수준으로 낮아졌고 해가 갈수록 낮아지는 추세가 되었다. 추첨에 따라 배정된 것이지만, 사립학교 학생들이 공립학교 학생들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사립학교의 교육환경은 날이 갈수록 황폐화됐고, 돈벌이를 위해 학교를 시작한 일부 사학에서는 각종 비리가 독버섯처럼 퍼져나갔다. 비리를 은폐하기 위해 사학재단들은 학교의 주요 요직에 친인척을 배치해 족벌 체제를 형성했다. 중·고등학교 평준화 이후 사학은 학생 선발권과 수업료 책정 권한을 상실했고, 사학재정의 악화와 이로 인한 각종 비리, 그리고 비리를 감추기 위한 족벌 체제의 전횡은 1980년대 학원민주화운동이나 전교조운동을 낳는 씨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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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광주학살로 등장한 신군부는 자신들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사학을 둘러싼 부조리를 강경책으로 ‘정화’하고자 했다. 1980년 9월26일 문교부가 사립대학과 학교법인에 지시한 ‘사학운영쇄신기본시책’은 1981년 2월 사립학교법 개정으로 이어졌는데, 설립자와 학교법인이 재정과 인사 등 학교 행정에 부당하게 간섭할 수 없게 하는 것이 골자였다. 이 조치는 무력화돼버린 사학법인으로 하여금 대학 지원을 위한 책임이나 의욕도 잃어버리게 만드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사학에 좀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한다는 미명하에 자행된 1990년의 사립학교법 개정은 이사장 직계 존비속의 총학장 취임 금지를 해제하고 이사 정수 중 친족 비율을 3분의 1에서 5분의 2로 확대하고, 교수 임용권을 총장에서 법인으로 옮겼고, 비리 임원의 임명 승인 취소제를 해임 요구제로 바꾸는 등 개정이라기보다는 형편없는 개악이었다. 학교의 경영을 설립자 일족의 전횡에서 분리하려는 일련의 노력은 1990년의 개악으로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대학의 자율성을 높인다는 명목하에 법인의 권한만 확대하고 대학의 자율성은 엄청나게 침해한 것이다. <조선일보>의 3월23일자 ‘만물상’조차 이 개악을 “아무리 뜯어봐도 하나에서 열까지 재단 편이지 대학 편은 아니다. 이제부터 설립자 가족이 톡톡히 재미볼 수 있게 됐다. 총장 자리에도 오를 수 있게 됐다. 그렇다고 대학이 좋아질 가망은 없다”고 비판했다. <조선일보>조차 “아빠는 총장, 엄마는 이사장, 아들은 처장”이라 개탄한 족벌 체제는 이렇게 복귀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비리사학에 파견되는 임시이사의 임기를 2년으로 제한하고, 비리 관련자의 재단 복귀 길을 터준 1999년의 개악은 덕성여대나 상문고의 분규로 이어졌다.
현재 중·고교 사학은 학교만 설립자가 세웠을 뿐 재정 구조에서는 국공립이나 마찬가지다. ‘설립’은 사립일지 모르나 운영은 공적 자금으로 운영되는 사립공영학교라고나 할까? 이는 재단전입금이 전무하다시피 한 현실이 말해준다. 사립 중·고교의 경우, 1년 학교 운영비에서 재단이 내놓는 전입금은 고작 3.0%에 불과하다. 나머지 97%는 학생등록금과 국가보조금으로 충당되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서 사학 문제의 근원은 과도한 군사비 부담 때문에 국가가 개별 자본을 교육 부문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교육재정 부담을 줄이려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응당 국가가 했어야 할 시설투자에 교육자본을 활용한 채 운영비를 대주다 보니 돈은 돈대로 들고 교육은 교육대로 부실해진 것이다. 사학재단을 만든 교육자본은 또 “열악한 재정 상태 속에서 극히 비정상적 방법으로 자기 증식을 꾀할 수밖에 없고, 국가는 이런 비정상적 이윤 추구를 묵인·비호하면서 그 대가로 사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관철”시켜온 것이다.
박정희도 “돌아가거라”하지 않을까
전교조 선생님들의 연수에 참가해보면 공립학교지회와 사립학교지회의 분위기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사립지회의 분위기는 아직도 80년대, 어쩌면 70년대를 보는 듯 처연하다. 물론 사립학교 중에는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곳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돈벌이를 목표로 한 기업들도 외환위기 이후 사외이사를 받아들여 기업의 체질 개선을 하고 경쟁력을 높였는데, 아이들을 키우는 사학에서 투명 경영을 위한 개방형 이사제의 도입이 나라 망할 일이란 말인가? 21세기의 벽두에 거리를 방황하는 유신공주를 보며, 40여 년 전 사립학교법을 처음 제정해 사학에 대한 법적 통제를 실시한 박정희도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고 혀를 차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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