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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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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두로 잘라 불태운 시집

등록 2006-03-31 00:00 수정 2020-05-03 04:24

해직기자와 교수·운동권이 출판에 뛰어들며 더 시끄러워진 ‘금서의 천국’…“데모 학생 책가방에서 나왔다” 등 온갖 황당한 이유로 판매금지 당해

<성경> <노자도덕경> <수호지> <코란> <신곡> <데카메론> <군주론> <유토피아> <천로역정> <법의 정신> <에밀> <상식>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적과 흑> <종의 기원> <죄와 벌> <톰 아저씨의 오두막> <곤충기> <인형의 집> <아큐정전> <의사 지바고> <무기여 잘 있거라> <수용소군도>….

너무나 유명한 이 책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유명 대학의 신입생 권장도서 목록의 앞자리를 차지하는 책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들의 진짜 공통점은 한때 어떤 이유로든 금서의 목록에 올랐다는 점이다. 역사의 진보란 늘 기성의 권위에 대한 비판과 도전에서 비롯됐다. 세상을 바꾼 책들이란 대개 한 번쯤 금서의 반열에 올랐다가 이제는 고전이 된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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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이 지배한 대한민국도 금서의 천국이었다. 오랜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짧게 열린 해방의 공간에서 백화제방처럼 여러 가지 책들이 쏟아져나왔지만, 전쟁과 학살이 휩쓸고 간 땅에서 책인들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앞줄 사형, 뒷줄 무기” 같은 황당한 재판으로 사람 목숨이 날아가는 시절이다 보니 당국에 의해 금서가 되는 이유도 참 황당했다. 1955년에 간행된 <최신아세아요도>라는 지도책은 “소련이 우리나라 영토와 같은 색깔로 되어 있고 공산 소련계와 영국, 호주, 카나다 등이 동일한 분홍색으로 되”어 있다는 이유로 문교부로부터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다.

70년대의 문턱에서 폐간된 잡지들

책마다 판권지에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휘날리자”는 ‘우리의 맹세’가 들어가야 했던 1950년대나, ‘국민교육헌장’이 웬만한 책의 앞머리를 차지하게 되는 60년대에는 80년대의 ‘이념도서’ 탄압 같은 금서의 대량생산은 없었다. 그만큼 출판사도 알아서 기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러나 필화 사건은 빈발했다. <사상계>와 같은 50년대와 60년대를 대표하는 잡지는 70년대의 문턱에서 김지하의 담시 ‘오적’ 필화 사건으로 인해 폐간되고 말았다. 김지하의 또 다른 담시 ‘비어’를 실은 잡지 <창조>도, 천주교를 배경으로 독자를 넓혀가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잡지 <다리> 역시 문학평론가 임중빈이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라는 글에서 좌절과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던 당시 학생층과 지식인을 비판하고 각성을 촉구하면서 “기성 권위와 가치에 대하여 마땅히 도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필화를 당해 필자, 발행인, 편집인이 구속됐다. 이 필화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은 무죄로 풀려났지만, 결국 잡지는 폐간되고 말았다. <다리> 필화 사건은 글도 글이지만, 이 잡지가 김대중과 가까운 야당 정치인 김상현에 의해 사실상 발행됐다는 점 때문에 일어났다고 할 것이다.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와 1975년 <동아일보> 광고 탄압 이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들이 무더기로 해직되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교수들이 해직되면서 한국의 출판계에는 큰 변화가 닥쳤고, 금서의 역사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해직 기자들은 ‘동아투위’나 ‘조선투위’를 결성하고 열심히 복직과 언론자유의 회복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지만, 유신정권이나 그와 결탁한 언론사 사주를 상대로 한 싸움은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을 깨달았다. 싸워도 밥은 먹고 싸워야 할 것 아닌가? 엄혹한 유신정권 아래에서 신문사에서 쫓겨난 기자들이나 해직 교수들이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종각번역실은 해직기자들의 사랑방

사실 언론과 출판은 다르면서도 중첩되는 영역이 있기에 해직 기자들이 전업을 꿈꿀 수 있는 곳이었다. 더구나 출판은 자존심 높은 해직 기자들이 밥벌이를 위해 현실과 타협한다는 느낌을 최소화해줄 수 있는 영역이었다. 특히 신문사 사주들이 정권과 야합함으로써 비판 언론의 기능이 마비됐기 때문에 출판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제구실을 못하게 된 언론의 역할을 대신해주어야 했다. 또 화집이나 사전, 교과서가 아니라 단행본 출판의 경우 책상 하나 전화 한 대 놓고 일단 일을 벌일 수 있어 큰 자본금이 없는 해직 기자들이 뛰어들 만했다. 한길사(김언호)를 비롯해 전예원(김진홍), 까치(박종만), 문학과지성사(김병익), 청람문화사(권근술), 정우사(김재관) 등이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이 차린 출판사였고, 두레(신홍범)는 <조선일보> 해직 기자가 차린 출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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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출판사를 차리지는 않더라도, 신문사 외신부에서 번역이라도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동료들이 차린 출판사나 다른 곳의 번역일을 맡았다. 해직 당시 <동아일보> 외신부 차장이던 이인철 등을 중심으로 일군의 해직 기자들은 1976년 종로에 ‘종각번역실’이란 간판을 달고 해직 기자들의 사랑방이자 번역 작업실을 열었다. 종각번역실의 첫 작품인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는 기대 이상인 3만 부가 나갔고, 또 같은 저자의 <소유냐 존재냐>는 그해의 최고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나남출판사 조상호 사장의 박사 논문에 의하면 동아투위 113명 중 출판사를 차리거나 번역업에 나서 출판계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사람은 모두 40명으로 35%에 해당한다. 또 송건호 선생 같은 분은 해직 이후 갑자기 많아진 시간을 저술의 기회로 삼아 언론뿐 아니라 현대사 연구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79년에 간행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의 대표 저자였으며, 그 뒤에도 <한국현대사> <한국현대인물사론> 등 저자로서 출판에 기여했다.

1970년대의 사회과학 출판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는 역시 계간지 <창작과 비평>의 독보적 역할을 바탕으로 창작과비평사(이하 창비)가 차지하고 있었다. 백낙청 교수가 단행본 출간을 시작한 것은 1974년인데, 그가 그해 말에 민주회복국민회의 등에 참여했다가 서울대에서 해직됐고, 뒤이어 창비 편집위원인 염무웅 교수가 덕성여대에서, 김윤수 교수가 영남대에서 각각 해직돼 창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됨에 따라 창비는 해직 교수들이 전면에 나서 운영하게 되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의 와중에서 <창작과 비평> 1975년 봄호가 도피 중인 김지하의 시와 해직된 백낙청의 논문을 실은 것에 대해 염무웅은 “어디 칠 테면 쳐봐라”의 분위기였고, “판금의 빌미로 모자람이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리영희의 베트남 전쟁이 실린 여름호 역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판매 금지됐고, 조태일의 시집 <국토>나 <신동엽전집>, 황명걸의 <한국의 아이> 등 역시 연달아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다. 창비에서 간행된 것은 아니지만, 양성우의 시집 <겨울공화국> 역시 금서가 되었는데, 이 책의 제목은 유신 시대를 상징하는 말로 널리 회자됐다.

운동권들, 출판사와 서점으로

1970년대를 대표하는 금서는 역시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1974)인데, 이 책은 처음에는 판매금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시위하다 잡혀온 학생들마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눈을 뜨게 되었다고 진술한 덕에 1979년에 뒤늦게 판매금지 도서가 되었다. 그전인 1977년 리영희 선생은 ‘중공’이 아닌 ‘중국’을 처음으로 다룬 <8억인과의 대화>를 창비에서 간행했다가 “국외 공산 계열을 고무·찬양”했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리영희의 또 다른 저서 <우상과 이성>도 1977년에 나오자마자 판매금지가 되었다. 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1979) 역시 천주교평신도회사도직협의회가 간행했지만 번역자가 구속되는 필화 사건으로 이어졌다. 가톨릭계 분도출판사에서 간행한 <해방신학>(1977)과 <페다고지>는 종교 출판사에서 간행된 신학과 교육학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유해도서라는 이유로 판매금지가 되었으니, 참으로 기막힌 유신의 폭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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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80년대 초 금서 양산의 주역은 해직 기자들만이 아니었다. 긴급조치에 의해 학교에서 쫓겨난 수많은 학생들 역시 변변한 취직 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이들은 해직 기자들이 차린 출판사에 직원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독자적으로 출판사를 차렸다. 광민사(이태복), 형성사(이호웅), 일월서각(김승균), 풀빛(나병식), 학민사(김학민), 돌베개(이해찬), 동평사(이종범) 등을 비롯해 수많은 학생운동 출신들이 출판사를 차렸다. 또 대학가의 서점들 역시 학생운동 출신자들이나 그 가족에 의해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서울대 앞의 광장서적(이해찬), 대학서점(김문수)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들 서점이나 출판사는 수시로 압수수색 대상이 되는 등 탄압이 심했기 때문에 출판사나 서점의 대표로 부인이나 형제 등의 명의로 등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긴급조치와 국가보안법이 금서를 양산하던 시대에 학생운동 출신들은 복사집과 영인본 출판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학생들이 자주 복사하는 책들을 영인해 친구나 가족이 경영하는 대학가 책방에서 팔아보고, 그렇게 해서 반응이 좋은 책은 선후배 친구들에게 번역을 의뢰해 출판하는 방식이다 보니, 책을 선별하는 눈도 남달랐다. 진보적인 원서 영인에서 사회과학 출판으로 진출한 대표적인 예는 정치경제학이 강한 한울(김종수·조희연)과 철학이 강했던 이론과 실천(김태경, 영인 단계에서는 지청사) 등이다.

사회과학 출판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운동이 지속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제공한 일등공신이라 할 것이다. 60년대 중반까지의 학생운동 출신이 대개 뿔뿔이 흩어진 것에 비해 60년대 후반 학번들부터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고 민주화운동 진영에 남게 된 것은 교련반대나 민청학련 사건같이 집단적으로 강제 징집이나 징역을 산 인연도 있지만, 출판 활동을 통해 지식 청년들의 반체제 공동체의 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학생운동의 확산과 대중화 속에서 사회과학 서적이 지금과는 달리 비교적 잘 팔려 출판사들도 새로운 기획을 준비하면서,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족민주운동 전반의 이론적 수준도 높아갔다. 복사·영인·기획·번역·출판·편집·서점 운영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넉넉하지는 않지만 운동을 하면서 생활을 영위하고, 나아가 출판이 단순히 생계 수단이 아니라 진보적 이론을 확산하는 운동 기능을 담당하는 데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해직 기자, 해직 교수, 제적 학생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련의 사회과학 출판은 한국 출판계의 지형에 큰 변화를 주었다.

이념도서 해금, 실은 반공도서 해금

광주학살과 함께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무언가 부드러운 이미지를 주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그래서 12시 통행금지도 없애는 등 일련의 유화 조치를 단행했는데, 1982년 2월 이념도서의 해금 조치도 그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이 조치로 약 15종의 이념서적들이 간행됐는데, 대표적인 것이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이사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 로버트 콩퀘스트의 <거대한 폭력>, 로버트 터커의 <칼 마르크스의 철학과 신화>, 레오나드 샤피로의 <소련공산당사> 등인데 사실 모두 정평 있는 공산주의 비판 서적이었다. 다 무게 있는 책들이지만, 이념도서 해금이란 이름을 붙이기에는 낯간지러운 수준 높은 반공 서적들의 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마르크스의 수염난 얼굴이 찍힌 책이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서점가에 깔리게 된 것은 박정희 시대의 궐기대회식 반공에서 그나마 반공에도 이론이 필요하다는 이규호 등 군사정권에 참여한 지식인들의 주장이 먹혀든 덕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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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유화 조치가 있었다고 해서 출판계에 봄이 온 것은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은 출발부터 1천여 명의 언론인을 해직하고,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뿌리깊은 나무> 등 172종의 정기간행물을 폐간시키는 등 만행을 저질렀는데, 유화 조치가 있던 1982년에도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가 창비에서 간행되자 전량 압수해 작두로 책을 잘라서 불태우고, 출판사는 세무 사찰까지 당해야 했다.

전두환 정권이 본격적인 출판 탄압에 착수한 것은 1985년 5월1일을 기해서였다. 그전까지는 주로 문공부에서 ‘행정지도’를 통해 납본필증을 내주지 않거나 내용 수정을 요구하는 방식을 취했다면, 이때부터 대대적으로 인문사회과학 출판사에 대한 사법적 제재 조치를 취했다. 문공부와 경찰이 주축을 이룬 정부합동단속반은 서점과 출판사에 대한 압수수색 등 행동에 나서 많은 서적과 유인물을 압수했다. 당국은 처음에는 압수수색 영장도 없이 마구잡이 위법 단속을 하다가, 비판이 거세게 일자 사후에 영장을 발부받았다.

이때의 단속은 윤재걸 기자에 따르면 원서는 판매 금지되고 번역본은 판매 허가된 경우(<칼 마르크스의 철학과 신화>), 월간지에 발표될 때는 아무 문제 없었는데 단행본으로 묶자 판매금지된 경우( <박정희 시대>), 10여 년 전에 절판된 도서를 다시 출판했는데 판매금지된 경우(<유한계급론>), 제목에 제3세계나 4월혁명 등과 같은 특정 용어가 들어가면 무조건 판매 금지한 경우 등 무원칙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 탈 없이 납본필증을 받았는데, 시위하다가 잡힌 학생 집에서 책이 나오면 뒤늦게 판매금지 도서 목록에 오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Marx가 안되면 Max도 안돼!

교도소의 검열은 더 심했다. 납본필증이 나와서 판매되고 있는 도서라도 교도관이 내키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었다. 막스 웨버의 책에 막스가 있어 안 된다기에 ‘Marx’는 좌파이고, ‘Max Weber’는 우파의 대가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더라는 일화도 있었고, ‘표지갈이’라 하여 저쪽에서 보기에 절대 불가인 금서의 포지, 목차 등을 말랑말랑한 책의 표지와 목차로 바꾸어 감쪽같이 제본해 교도소에 집어넣어 여러 명이 돌려보게 했다는 무용담도 금서 시대에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이제 출판사는 물론이고 서점 주인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는 시대가 되었다. 국가보안법은 원래 목적범을 처벌하는 것인지라 공소장에는 관용구처럼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가 안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과연 출판사가 책을 찍어내고 서점이 이를 판매하는 행위가 돈을 벌려는 것이겠는가, 아니면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풀빛이 1985년 간행한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같은 책은 당국이 초판 2만 부와 지형까지 압수해가 출판사에 막대한 손실을 입히기도 했다. 5공 당국의 출판 탄압이 극에 달한 것은 1985년 하반기에 김형욱 회고록을 간행한 아침출판사의 등록을 취소한 데 이어 창비마저 등록을 취소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취소하면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새로이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받아주지 않았고, 또 신고제여야 할 출판사의 등록을 받아주지 않는 방식으로 새로운 사회과학 출판사의 출현을 막으려 했다(때문에 출판사의 등록증이 수백만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당시 사회과학 출판사들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출판물을 단행본으로 내려면 기획 기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계간지와 같은 정기간행물을 내고자 했으나, 정권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책(book)과 잡지(magazine)의 중간 형태인 ‘무크’(mook)라는 독특한 부정기간행물을 연속으로 내놓았는데, 창비가 무크에 계간 통산 57호라고 명기했다는 이유로 출판사의 등록을 취소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는 대대적인 해금 조치가 있었지만, 출판물에 대한 압수수색은 오히려 늘어났다. 통일운동의 열기 속에서 마지막 성역이던 북한 서적의 출판이 시도된 것이다. 특히 출판사 등록을 받지 않던 희한한 조치가 철폐되면서, 해직 기자들이나 70년대 초·중반 학번 선배들이 운영하는 사회과학 출판사들의 책을 읽으며 학습한 80년대 학번들이 사회과학 출판사를 차리면서 그 이름부터 힘, 백두, 대동, 전진, 오월, 남풍, 광주, 황토, 진달래, 지리산 등 새로운 느낌을 주는 출판사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전을 넘어서서 이북 책들을 그대로 출간하기 시작했다. 1989년 봄 공안정국이 도래하면서 대검이 산하 지검에 내린 ‘좌경 이념서적 단속지시’를 보면 그 입장이 “저자, 역자, 편집자, 출판사 대표 등 원칙적으로 구속수사” 등 강경하게 되어 있다.

그때 급진 저자는 뉴라이트로…

국가보안법 시대에는 천수백여 종의 도서가 금서가 되었다. 정확히 몇 종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각 기관마다 그리고 지방마다 자체적으로 이적표현물 목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늘 금서 목록을 만들어 단속을 하지만,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에서 보듯이 금서 단속이 성공할 수는 없다. 그 시절도 금서는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해 볼 수 있었고, 서슬 푸른 5공 때도 단속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학가 서점에서 모든 판금 서적을 구할 수 있었다. 단속반도 높은 것들한테 보이려고 보고용으로 책을 압수해가긴 하지만 모든 책을 압수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론 죽어 있던 책이 금서 목록에 오르는 바람에 잘 팔려 출판사 입장에서 재고 처리를 해주기도 했다. 책이 죽고 사는 것은 권력자 마음대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천만 독자가 읽은 <태백산맥>이 이적표현물이라면 대한민국이 이적국가가 아닐 수 없다.
평화박물관에서 국가보안법 관련 ‘국가 공인 나쁜 책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자료를 모으다 보니, 드물지만 어떤 저자는 뉴라이트가 되었고, 또 손꼽히던 급진 출판사의 대표도 뉴라이트가 되어 있었다. 어떤 뉴라이트는 금서만 읽다가 내 청춘 다 갔다고 탄식하고 있다. 금서를 보면 시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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