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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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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을 죽인 그들이 돌아왔다

등록 2006-08-24 00:00 수정 2020-05-03 04:24

뛰어난 외교적 안목과 실용외교를 사대주의로 짓밟은 조선의 사대부들… 요즘 목청 높이는 ‘머리 까만 미국인’들을 보며 깜짝깜짝 놀라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이라크 파병 때도 그랬지만, 요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를 보나, 전시 작전통제권 문제를 둘러싼 논란을 보나 자꾸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것은 우리 사회 안에 머리 까맣고 한국말 잘하는 미국인들이 이렇게 많았나 하는 점이다.

이자들의 특징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게 미국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주 자주 이들은 오버에 오버를 거듭한다.

임진왜란의 은혜를 갚아라?

이들은 자기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 마치 자기 얘기가 미국 입장인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 진보 진영에서 지나치게 친미적이라 비판을 받는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조차 최근 한 토론회에서 “한-미 동맹이 약화하고 있다는 주장의 초점은 한-미 정부 간에 큰 이견이 있다는 인식인데, 그 바닥을 보면 국내의 서로 다른 의견이 마치 한-미 간 이견인 것처럼 표출되고 있다”고 탄식했다. 미국도 전혀 반대하지 않고 있는 작전통제권 이양 문제에 대해 수구언론이나 한나라당이 한-미 동맹 균열 운운하며 금방 난리라도 날 듯 호들갑떠는 꼴을 보면 그런 탄식이 나올 만도 하다.

때로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비슷한 광경을 수백 년 전 우리 역사에서 찾아보게 되면 기분이 별로 유쾌하지는 않다. 지금부터 400여 년 전인 17세기 초반은 국제질서에 엄청난 변화가 몰아닥치던 시기였다. 중화적 세계질서의 정점에 섰던 명(明)은 쇠퇴하고,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이 급격히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강자로 등장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군주는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외교적 안목이 뛰어났다는 광해군이었다. 적자도 장자도 아니었기에 왕위에 오르는 데 어려움이 컸던 광해군, 그의 외교적인 역량은 탁월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참화를 겪은 뒤 전후 복구에 몰두해야 할 조선에 국제정세가 요동치게 된 것은 이중의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조선은 명에 구원을 요구했다. 당시 일본은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을 치려고 길을 빌려달라 했으나 조선이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워 이를 거부해 조선에 대한 무력행사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조선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의주까지 피난갔던 선조는 명군의 참전으로 간신히 한숨을 돌리게 되었고, 이후 명은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 즉 조선을 다시 일으켜주었다는 은혜를 내세우게 된다.

‘재조지은’의 문제가 결정적으로 조선을 옥죈 것은 1618년 명이 후금의 누르하치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라는 국서를 보내면서부터였다. 명이 조선에 원병을 파견한 것은 순망치한, 즉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이치에 따른 것으로 철저히 자신의 국익에 따른 계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번방’(藩邦·오랑캐 나라 또는 제후국)을 돕기 위해 대군을 파견한 예는 없었기 때문에 명이 생색을 낼 만도 했다. 그런 명이 이제 재조지은을 갚는 길은 누르하치를 치는 데 동참하는 것이라며 파병을 요구해온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명이 조선에 파병을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계승범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세종 31년인 1449년, 명이 몽고의 침략을 받아 영종 황제가 포로가 된 급박한 상황에서 명은 조선에 파병을 요구했다. 그때 조선은 조선의 강토를 굳건히 지켜 번국(藩國)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회답으로 파병 요구를 거절했다. 당시 조정에서 파병에 찬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몽골의 군대는 북경을 포위할 정도로 막강한데, 조선군이 간들 별 수 없으며, 몽골이 조선으로 침략해오면 강화(講和)하면 된다는 것이 조정의 지배적 의견이었다. 조선이 이렇게 파병을 거절했지만, 이로 인해 명과의 사이에 외교적 갈등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명도 워낙 상황이 급해 파병 요구를 하긴 했지만, 국초에 고려-조선과 요동을 둘러싸고 영토분쟁을 겪었던 터에 조선군의 진주가 달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조선 중기부터 ‘막나가는’ 사대주의

명은 세조 18년(1467)에도 다시 여진을 치기 위해 파병을 요구했다. 당시 건주(建州)의 여진족이 세력을 확대해가고 있었는데, 명은 건주 여진이 조선과 결탁해 명을 위협하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의 파병 요청을 받은 조선 조정은 이번에는 일사천리로 파병을 결정했다. 세조가 20년 전의 부왕 세종과는 달리 즉각 파병을 결정한 것은 조선 역시 건주 여진의 세력 확장이 조선에 대한 위협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명의 파병 요청이 있기 전에, 세조는 건주 여진이 조선의 변경을 침입하자 독자적으로 여진 정벌을 준비한 바 있는데, 국내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단했기에 명의 파병 요구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성종 10년(1479), 명은 건주 여진을 치려 하니 조선은 군대를 보내 퇴로를 차단하라며 또다시 파병을 요구했다. 사극을 많이 본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유교 지식인들은 전례가 있냐 없냐를 매우 중시한다. 그런데 상국(上國)인 명의 파병 요구에 대해 이를 거절한 전례도 있고, 따른 전례도 있다 보니 조정 내에서도 의견이 팽팽하게 갈렸다. 이때 국익론을 내세워 논쟁의 판도를 바꾼 사람은 하급관료인 정효손이었다. 그는 맹자의 이루장구(離婁章句)를 인용해 가족이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이라면 급하게 나가 도울 필요 없이 문을 걸어닫고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오랑캐 나라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 이익이 되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이웃나라끼리 서로 공격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익이 될 수도 있는데, 왜 하필 우리 백성을 전쟁으로 내몰아 다른 나라의 이익을 도와주느냐는 것이다. 정효손은 만일 조선이 명의 파병 요구에 “금년에 따르고 명년에 또 따른다면” 명이 “오랑캐를 정벌할 때마다 우리나라에서 군사를 징발하게 될까 두렵다”면서 최대한 일을 지연시켜 명이 단독으로 출정하게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했다. 파병에 찬성하던 대신들도 이 논리에 설득되었고, 성종도 명의 사신을 만나서 이 방침에 따라 가능한 한 명의 파병 요청에 애매모호하게 대응했다. 성종은 최대한 시간을 끌었고, 파병을 하면서도 그 목적을 포로 몇 명 잡아 명에 보내는 것 정도로 삼으며 원정군 대장 어유소에게 경솔히 전진하지도 말고 오랫동안 머물러 있지도 말라고 지시했다.

이로부터 60년가량이 지난 중종 38년(1543)에는 명이 파병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명의 청병을 예상해 그 대비책을 미리 논의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직 결정되지도 않은 명의 파병 요청 가능성만으로 파병 준비를 위해 국책사업으로 진행되던 북방사민정책(徙民政策)을 보류하자는 의견이 압도적일 정도로 파병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출병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모두 지적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어려움 때문에 출병을 거절해야 한다고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계승범에 따르면 국가의 손익을 저울질해보는 논의는 전혀 없었다. 손익계산도 없이 파병을 기정사실화한 것은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던 대응 태도였다. 재조지은이라는 담론이 형성되기 훨씬 이전인 중종대에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에 대한 사대와 조선의 국익을 완전히 동일시하고 있었다.

사대에도 군신관계의 사대가 있고 부자관계의 사대가 있다. 유교에서 군신관계란 의리로 맺어진 것으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신하가 임금의 잘못된 행동을 간(諫·신하가 임금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해서 듣지 않으면 떠날 수도 있고, 임금의 잘못이 클 때는 역성혁명도 가능하다. 그러나 부모-자식 관계는 천륜으로 맺어진 터라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섬기던 임금의 잘못을 세 번 간해서 듣지 않으면 떠나면 그만이지만, 부모의 경우에는 세 번 말씀드려 듣지 않으면 울며 따라야 하는 것이 도리다. 세종 때도, 중종 때도 사대정책이 있었지만, 고려나 조선 초기의 사대정책이 현실주의적 노선에 따른 것이었다면, 조선 중기 이후의 사대는 화(華)와 이(夷), 즉 중화와 오랑캐라는 화이적 세계관이 철저히 내면화된 이데올로기적 사대로 변모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조선의 사대부들이나 중국의 일부 엘리트들이 조선은 더 이상 번방이 아니라 중국의 내복(內服·한집안)이라는 인식을 강화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이 파병을 했고, 요즘 식으로 이야기해서 명과 조선 사이에는 혈맹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경솔하지 말고 만전을 기하라”

명이 1618년 조선에 파병을 요구한 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이이제이 정책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명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은 오랑캐라도 말을 잘 듣는 ‘순이’(順夷)였다면 누르하치의 여진은 대놓고 덤벼드는 ‘역이’(逆夷)였다. 역이란 손을 봐줘야 할 존재지만, 한명기 교수의 지적처럼 명의 내부 사정은 여진을 쉽게 손봐줄 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사실 역이도 믿는 게 있으니까, 그리고 대들 만하니까 대들지 않았겠는가.

명이 파병을 요구하는 국서를 보냈을 때 광해군의 입장은 단호했다. 오랫동안 명과 후금의 세력 변화에 대해 정보를 수집해온 광해군은 명이 후금을 군사적으로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한명기 교수에 따르면 광해군은 명에 보내는 답신에 “경솔하게 정벌하지 말고 다시 헤아려 만전을 기해야 한다”라는 구절을 집어넣으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속국의 처지로 감히 상국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안 된다고 아우성을 쳤다.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은 강홍립이 이끄는 1만의 군사를 파견했다. 당시 후금의 기병을 대적하기에 명군의 화력은 약했기 때문에 명군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육성된 조선의 조총수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독자적인 작전통제권 없이 명군에 배속된 존재였던 조선군은 1619년 3월 후금과의 심하 전투에서 대패한 뒤 후금에 투항했다. 강홍립이 이끈 조선군의 항복이 광해군의 지시로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한 결론이 내려지지는 않았다.

조선군이 심하 전투에서 후금에 패해 항복한 뒤 명의 반응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일부에서는 조선이 명을 돕기 위해 파병했다가 수천 명의 장병이 전사했으니, 조선을 위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강홍립의 항복이 고의적인 것이라고 의심했다. 한명기 교수에 따르면 명에서 이 두 입장을 보인 사람들의 속셈은 사실 똑같은 것으로 조선에서 다시 한 번 원병을 동원하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가장 강력하게 조선으로부터 원병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유명한 서광계(徐光啓)였다. 서광계는 만주의 여진과 싸우기 위해서는 서양의 과학기술과 무기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며, 중국의 고위 대신으로서는 유일하게 그 자신이 천주교 신자가 되어 서파울루스라는 세례명까지 받았다. 또 서광계는 마테오 리치와 함께 유클리드의 등 서양의 수학, 역학, 지리학 등 서적을 많이 번역한 인물이기도 하다. 서광계는 1619년 6월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조선에 재조지은을 베풀었으니 다시 한 번 징병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자신을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해줄 것을 자청했다. 조선은 의리를 아는 나라이니 설득이 가능할 것이며, 만일 설득이 안 되면 협박을 해서라도 파병을 관철시키겠다는 것이다.

비중 없는 조선감호론에 ‘화들짝’

만일 조선이 명의 재파병 요구를 거절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광계는 조선을 감호(監護)해야 한다는 이른바 ‘조선감호론’을 폈다. 19세기 말 임오군란 직후 청이 위안스카이를 보내 10년 이상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감호란 명이 직접 관리를 파견해 조선을 통치한다는 의미였다. 임진왜란 당시 명이 조선을 직접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명의 조야에서 간간이 나온 적이 있었기에 조선감호론이 제기됐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광해군과 신하들은 모두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서광계의 조선감호론은 조선이 “후금의 위협에 굴복하여 친교를 맺는 등 이미 후금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것이었다. 때문에 광해군은 서광계가 상소에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에 대해 서술한 부분은 사실과 다르니 명에 사신을 보내 이를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계승범 교수에 의하면 신료들은 해명도 급하지만 명에 의해 조선이 의심받는 상황에서는 “의심을 받을 만한 단서를 없애는 것이 일의 순서라고 지적”했다. 감호론이 나오게 된 것은 조선에 대한 명의 의심이 커졌기 때문이니 후금과의 왕래도 끊고 항복한 장수들의 가족도 처벌하고, 명이 요구한 재파병에 순응하기 위해 국경에 군대를 보내고 대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흥미있는 것은 논란이 된 명의 재파병 요구가 황제의 칙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요동에 주둔하고 있는 명의 장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당시 신료들은 “왕의 윤허도 없이 대신들이 임의로 파병을 약속해놓고 이미 수락한 이상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수 없으니 파병해야 한다는 억지 논리를 폈던 것”이다. 광해군은 명의 관리들이 서울에 머무는 동안 조정에서의 외교와 관련된 논의를 조보(朝報·지금의 관보나 신문)에 싣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조보를 작성하는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은 이를 무시하곤 했다. 외교 문제에 관한 한 광해군은 철저히 포위되어 있었다.

신료들은 감호론을 불러온 장본인이 바로 광해군 자신이라며 압박했다. 한-미 동맹, 아니, 조-명 동맹의 균열을 가져온 사람이 바로 광해군의 친후금정책이라는 것이다. 신료들은 광해군을 압박하기 위해 감호론의 실상을 과장해서 보고했다. 비변사에서는 “명 조정에서 조선을 의심하는 사람이 서광계 한 사람만이 아닐뿐더러 구경(九卿)이 황제에게 건의한 내용도 서광계의 뜻과 같으니 철저히 해명하지 않으면 엄청난 화가 닥칠 것”이라며 광해군을 협박했다.

를 보면 미국 조야가 한국의 작전통제권 환수 요구 때문에 분노와 배신감으로 들끓고 있는 것처럼, 당시 신료들에 따르면 명 조정은 온통 조선감호론으로 뒤덮여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에 조선감호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서광계가 제의한 감호론은 명 조정에서 비중 있게 논의됐다고 볼 수는 없다.

평등한 한-미 관계는 진정 불온한가

그럼에도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온 이정구는 명 조정에서 벌어지는 정청의 주목적이 조선에 대한 감호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인 양 과장했다. 나아가 그는 감호의 의미도 서광계에 비해 훨씬 강력하게 보고했다. 서광계는 감(監)이란 그 정형(情形)을 살핀다는 것이라 했는데, 이정구는 감(監)이란 그 나라의 정형(政刑), 즉 정치와 형정을 감독하는 것이라 과장한 것이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이정구가 발음이 같다고 情形과 政刑을 혼동했을 리는 없다는 점에서 이는 다분히 고의적인 왜곡으로 보인다.

흔히 광해군의 외교를 중립외교라 하지만 당시의 급변하는 정세에 중립이 용인될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실제로 명은 후금을 치기 위한 파병을 요구했고, 후금은 명과의 싸움에서 조선이 중립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만일 광해군이 ‘중립’을 추구한 것이었다면, 그 ‘중립’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외교정책은 내부적으로는 독립국가이기보다 중국의 내복이기를 원한 사대부들의 저항을 받았다. 400년 뒤의 분단된 한국에서 자주적이고 평등한 한-미 관계를 꿈꾸는 것 자체가 진정 불가능하고 불온한 일일까? 그래야 할까?


독자 여러분.
그동안 감사합니다. 처음 연재를 시작한 게 2001년 1월10일자 342호이니 중간에 1년 정도 쉰 것을 빼도 꼬박 4년 반을 찾아뵈었네요. 과거 청산에 관련된 일과 평화박물관 일이 너무 많아서 연재를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지난해에 좀 쉬려 했는데 고경태 기자가 느닷없이 편집장을 맡는 바람에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베트남전 진실위원회 시절의 ‘전우애’를 들먹이며 자기가 편집장 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그만두느냐는 통에 1년 넘게 더 끌려왔습니다. 원고 마감 날짜가 월요일에서 금요일로 바뀌는 바람에 주말에 원고 준비를 할 수 없게 되었지요. 과거 청산 일이 바빠지다 보니 읽고 있는 것은 다 그쪽 관련 자료인데 조사 중인 사건에 대해 쓸 수도 없고 해서 매번 고난의 행군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도 힘들었지만, 오지 않는 원고 기다리느라 편집부와 디자인부 식구들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제 독자 여러분 속에서 독자의 한 사람으로 을 사랑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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