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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단 환영식도 불참한 이승만

등록 2006-06-03 00:00 수정 2020-05-03 04:24

일제에 끌려와 남북 대결의 현장에서 철저히 이용당한 재일조선인의 역사…남은 외면하고 일본은 쫓아내려 한 그들, 북송선은 눈물나게 감동적이었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지난 5월17일 일본 도쿄에서는 하병옥 민단 단장이 총련 본부를 찾아 서만술 총련 의장과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민단과 총련의 50년 만의 공식 대면은 인사말을 하던 양쪽 간부들이 자주 울먹이는 바람에 종종 끊겼다고 한다. 아직도 일본의 일부 언론은 민단과 총련의 대화에 대해 대북 압박의 전선이 약화된다며 딴죽을 걸고, 민단 일각에서도 민단과 총련의 화해는 시기상조라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한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6년이나 지나서야 일본에서 민단과 총련의 수뇌가 처음 만난 것인데 이것이 시기상조일까? 역사적인 방문을 한 민단의 하병옥 단장은 70살이고, 귀한 손님을 맞은 서만술 의장은 78살이었다. 그 분열과 대립의 세월을 생각한다면 이건 시기상조가 아니라 만시지탄이다. 만시지탄도 이런 만시지탄이 있을 수 없다.

해외이민자 14%, 철저한 무지

어느 나라의 이민사회든지 본국의 사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일본의 한인 이민사회는 본국의 분단에서 너무나 큰 영향을 받았다. 38선이 일본에도 그어진 것이다.

동포 사회의 힘과 지혜를 다 모아도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과 편견을 넘어서기 힘들었을 처지에 본국의 분단이 동포 사회를 갈가리 찢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민단과 총련이 더 이상 동포 사회의 배타적인 두 구심점이던 시기는 지나갔다. 그러니 만시지탄이란 말이 안 나올 수 없다. 물론 화해를 안 하고 넘어가는 것보다야 백 번 천번 잘된 일이지만 말이다. 많이 늦었지만, 그래서 더 반가운 민단과 총련의 만남의 의미는 고통스러웠던 재일동포들의 역사, 그리고 그 역사를 더욱 고통스러운 것으로 만든 남북 양 정권의 동포 사회에 대한 개입 속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1980년대 이후 한국 근현대사 연구가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엄청나게 중요한 분야임에도 근현대사 연구자들이 응당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분야가 이민사다. 현재 해외에 살고 있는 한민족 구성원은 중국 200만 명, 미국 100만 명, 일본 100만 명, 중앙아시아 등 옛 소련 지역 40만 명, 유럽 및 기타 지역 50만 명으로 약 5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남북한 인구 7천만 명에 500만 명을 더해 한민족을 7500만 명으로 잡으면 전체의 6.67%에 달한다. 1945년 해방 당시를 기준으로 잡으면, 당시 한민족 전체 수는 3500만 명이고 해외 거주 인구는 중국 220만 명, 일본 230만 명, 옛 소련 40만 명, 미국 및 기타 지역 10만 명으로 역시 500만 명에 육박해 전체 민족 성원의 14%가량이 된다.

한국 근대사에서 해외 이민은 조선 말기인 1860년대 초반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부터 시작됐다. 그러니 1945년 당시 인구의 14%가 해외에 있었다는 것은 80여 년 만에 인구 7명에 1명이 해외로 나간 것을 의미하니 참으로 슬프고도 숨가쁜 ‘세계화’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한 민족집단의 다수 성원이 짧은 기간에 해외로 나간 것은 1840년대 아일랜드의 대기근으로 10년 동안 100만 명이 굶어죽고, 100만 명이 이민을 떠나 800만 인구가 600만 명으로 줄어든 것을 제하고는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민족의 이산이었다. 화교가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지만, 1949년 신중국 수립 이전 전세계에 분포된 화교 수를 대략 1천만 명으로 잡는 것을 보면, 전체 중국 인구에서 화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우리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해외 이민은 단지 양적으로만 보더라도 이렇게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문제인데, 역사 쪽에서는 제대로 연구되지도 가르치지도 않고 매우 등한시됐다. 해외의 독립운동사도 사실 해외 동포 사회를 기반으로 한 것인데, 동포 사회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남짓이다. 대학의 경우 사학과에서 과목을 가르치는 곳은 거의 없고, 주로 인류학과에서 디아스포라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교수가 있을 경우 이따금 과목이 개설되는 것 같다. 우리가 해외이민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 자체의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바로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역시 이주노동자로 해외로 나간 우리 동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한민족 공동체 운운하면서 전세계에, 그것도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4대 강국에 무시 못할 이민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한인 이민들이 한민족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고, 그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각 이민집단이 한국의 근현대사와 이주해간 나라의 근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어떤 과정을 겪어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겸허히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역사적 특수성 때문에 한반도의 분단이 그대로 재현되고, 본국의 분단 정권이 각각의 필요에 의해 치열한 남북 대결의 현장에 동포들을 끌어들여 ‘이용’했던 일본의 이민사회에 대해서는 사실 남북 정부가 각각 동포들께 머리 숙여 사죄해야 할 것이다.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

일본 내 한인 이민사회의 역사는 여기서 한 번에 정리하기에는 매우 복잡하다. 먼저 용어부터 보자. 그들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재일동포’인가, ‘재일교포’인가? ‘재일조선인’인가, ‘재일한국인’인가, ‘재일코리안’인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그냥 ‘재일(자이니치)’인가? 재미 한인에게 하듯이 ‘한국계 일본인’(Korean-Japanese)인가? ‘교포’란 말은 임시로 거주한다는 뜻으로 현실로는 어려워도 마음만은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던 1세들이 주류를 이루던 때에 많이 사용되던 명칭이지만, 일본에서 나서 자란 2, 3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재일동포는 또 지나치게 핏줄 중심인 용어인지라, 현재 동포끼리의 결혼이 전체 결혼 건수의 10% 이하로 추정되고 동포와 일본인 간의 결혼이 90% 이상인 현실을 얼마만큼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재일한국인과 재일조선인의 문제는 직접적으로 남북 분단의 현실을 반영하는데, 문제는 더 복잡하다. 일본 내 한인 이민사회의 국적 문제는 크게 볼 때 네 가지 범주로 나눠볼 수 있다. 대한민국 국적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일본으로 귀화해 일본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 외에도 무국적자인 ‘조선적’(朝鮮籍)이 따로 있다. 조선적은 흔히 이북 국적을 갖고 있는 총련 동포들과 오인되는데, 이들은 이런저런 이유에서 적극적으로 대한민국 국적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원래의 호적을 그대로 두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느 한쪽의 국적을 의미하는 호칭이 문제가 있다고 한동안 일본의 이민사회에서는 ‘재일한국·조선인’ 또는 ‘재일조선·한국인’이란 말이 사용되기도 했다. 는 문제 없고, 란 이름은 허용될 수 없는 게 아니라면 호칭 문제에는 좀 관대해질 수 없을까?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란 말이 월드컵 응원 구호가 되는 한국에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문제이겠지만, 민족적 차별이 심한 일본 사회에서 “나는 한국(또는 조선) 사람입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고국은 그런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지는 못할망정, ‘조선’이냐 ‘한국’이냐의 선택을 충성 서약처럼 들이댄다. 재일조선인도 ‘괜찮고’, 재일한국인도 ‘일없는’ 그런 날은 언제쯤일까?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할 당시 재일본 한국인 수는 채 1천 명이 되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인의 일본행을 제한하는 도항(渡航) 규제를 했지만, 현재의 한국 사회가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일본 내에서 저임금 조선인 노동자의 수요가 존재하는 한, 조선인 노동자의 도항을 막을 길이 없었다.

재일조선인의 역사에서 최대의 비극은 너무 일찍 찾아왔다. 1923년 9월1일 도쿄를 강타한 관동대지진은 10만 명 이상의 인명을 앗아갔는데, 그중 최소 6천 명, 어쩌면 2만 명은 조선 사람이었다. 그냥 천재지변으로 희생자가 났어도 큰 비극인데, 조선인 피해자의 대부분이 “조선인이 방화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푼다” “조선인이 일본 여자를 강간한다” 등의 유언비어에 흥분한 일본인들에 의해 학살됐으며, 이 유언비어가 주로 관헌들에 의해 유포됐다는 점은 우리를 전율케 한다. 도쿄도지사인 이시하라 신타로 같은 극우파 입에서 요즘도 사회 혼란시 제3국인에 의한 범죄 운운하는 말이 나오는 것이 끔찍한 것은 다 이런 비극과 공포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관동대지진에 이은 대학살이 일어날 당시 지진이 발생한 관동 지역의 재일조선인 수가 3만 명 정도였다는 점에서 당시 조선인 학살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철저한 것이었는지를 짐작게 한다.

담배 20갑만큼의 돈에 쫓아내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일본에서는 실업자가 급증했는데, 재일조선인 수는 이 무렵 크게 늘어나 1934년에는 50만 명에 달했다. 일본 사회가 극심한 실업난에 빠져드는 과정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들에 비해 훨씬 열악한 저임금을 받고, 가장 혐오스러운 직종에 종사하게 된다. 재일조선인들은 일본 사회 내에서 전통적인 최하층 신분인 부락민(部落民·한국의 백정에 해당)과 함께 2대 천인 집단을 형성했다. 일제의 전쟁 동원이 본격화되면서 일본 내의 남성들 징병이 확대되자,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일본은 처음에는 조선에서 노동자를 모집했다. 이런 노동자 모집은 곧 강제 연행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해방 당시 재일조선인은 230만 명에 달했다.

당시 일본에 설치된 연합군 점령사령부는 재일조선인 문제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고 별 관심도 없었다. 이들은 재일조선인을 우범자 취급하는 일본제국주의 관료들에게서 정보를 제공받고 그들과 같은 시각에서 재일조선인 문제를 바라보았다. 일본 쪽이나 점령군사령부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직접적인 산물인 재일본 조선인 사회 형성의 특수성과 이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귀찮고 부담스러운 존재인 재일조선인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내고자 했다. 약 230만 명의 재일조선인들 중 4분의 3가량은 귀국했지만, 약 60만 명은 잔류를 희망했다. 1946년 11월 점령군 사령부는 귀환자가 지참하고 귀국할 수 있는 돈을 1인당 1천엔으로 제한했는데, 이는 담배 20갑에 해당하는 말도 되지 않는 액수였다. 강제로 끌려온 재일조선인 중에서 수많은 잔류자가 나온 것은 이 조치와 무관하지 않다.

재일조선인들은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1945년 10월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을 결성했는데, 이 단체의 진보적 성격이 강화되자 우파는 청년동맹 등을 만들어 대항하다가 1946년 10월 재일조선인거류민단(민단)을 조직해 조련과 대립했다. 당시 재일조선인들이 주력한 것은 민족교육이었는데, 1947년 10월 현재 조선인학교가 소학교 541개, 중학교 7개, 청년학교 22개, 학원 3개 등으로 대부분 조련의 영향력하에 있었다. 그런데 조련이 일본공산당과 밀접히 연결돼 좌경화하자 연합군사령부와 일본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어 대부분의 학교가 1948년 폐쇄령이 떨어졌다. 이에 많은 조선인들이 격렬히 저항해 효고현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는 등 오사카∼고베 일대에서 ‘한신교육투쟁’(阪神敎育鬪爭)이라 불리는 대대적인 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조련이 주도한 이 격렬한 투쟁을 겪은 일본 정부는 1949년 조련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조련이 해산된 뒤 1951년 1월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이 결성됐는데, 민전 안에는 두 흐름이 있었다. 한 흐름은 일본의 해방 없이는 재일조선인의 해방을 달성할 수 없다며 일본공산당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활동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한 흐름은 민족 문제를 중시하면서 일본공산당의 지도를 받기보다는 북과 손을 잡으려 하는 입장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의 공산주의운동이나 급진노동운동에서 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았다. 특히 30년대 중반 이후 일본 공산주의운동 내에 전향이 유행병처럼 퍼지자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없었다면 일본 내 공산주의운동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민전 내에서 일본공산당과 유대 관계를 강화하려는 흐름이 등장한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한 일이었다.

10만 동포가 북으로 간 까닭

이 흐름은 초기에는 민전의 주류를 형성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북과의 유대를 강화하려는 민족파의 세가 강화됐고, 1955년 이들의 주도하에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일본 사회에서는 총련이라 부르나 남쪽의 보수세력은 꼭 ‘조총련’이라 부른다)가 한덕수를 의장으로 하여 결성됐다.

한덕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해외 공민인 재일조선인은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말고 조국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련은 이제 조국의 평화통일과 재일조선인의 기본권 보호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총련이 일본혁명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총련의 결성 뒤 북은 북대로 전쟁 복구로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교육 원조금과 장학금 명목으로 1957년 2억2천만엔을 보내는 등 1959년 12월까지 모두 7억엔을 보냈다. 당시 일본 정부가 재일조선인 중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지급하는 금액이 연간 2억엔 정도였다고 하니, 북에서 보낸 대규모의 교육 원조금은 교육열은 높으나 생활은 중·하층에 머물던 재일조선인들에게 엄청난 ‘감동’으로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재일조선인의 97%가 38선 이남을 고향으로 두고 있었음에도 총련에 적을 둔 동포가 70%를 넘었던 이유나, 10만 가까운 재일동포가 자신의 고향인 남쪽이 아니라 북으로 ‘귀국’한 것은 이데올로기 등 다른 이유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입장에 따른 용어의 문제는 재일동포 ‘북송’ 문제에서 다시 첨예하게 제기된다. 남쪽에서 볼 때는 꼭 저지해야 할 ‘북송’이고, 일본 입장에서는 한 명이라도 더 보내버렸으면 하는 ‘귀환사업’이고, 북쪽 입장에서는 감격스러운 ‘귀국’이었는데 1959년부터 남쪽 출신 재일동포 8만6천여 명과 그들의 일본인 가족 7천 명이 북으로 간 것이다. 지금 이 문제, 특히 북으로 간 일본인 가족은 납치 문제와 더불어 조-일 수교 교섭에서 중대한 문제로 제기됐지만, 이 ‘귀국운동’은 당시 상당히 감동적인 분위기에서 전개됐다. 당시 이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가 후일 총련을 떠나 반북운동을 벌인 사람들도 첫 번째 귀국선이 니카타항에 들어올 당시를 회상할 때면 마치 꿈꾸는 듯 얘기를 하곤 한다. 차별받던 그들에게는 단순히 배 한 척이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조국’이 온 것이었다. 지금은 회한으로 남는 일이지만,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북송사업에 대해 이승만 정부는 펄쩍 뛰며 반대했지만, 국내에서 궐기대회를 열거나 일본에서 민단을 동원해 데모하는 것 외에는 별 방법이 없었다. 모리스 스즈키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은 생활이 어려운 재일동포들이 한 명이라도 더 많이 귀국하도록 생활보호금을 깎거나 취소하는 등 인도주의를 가장한 사실상의 추방운동을 벌이는 판이었으니 말이다. 이 사업을 통해 북으로 간 재일동포는 다시는 일본 땅을 밟지 못했고, 새로운 이산가족을 만들어냈다. 모두 남쪽 출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70만의 재일동포 사회에서 10만 명 가까운 사람이 북으로 귀국했다는 것은 그만큼 일본에서의 생활이 고달팠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동포 사회 내에 누구나 북에 친척을 두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고삐를 남북 정권은 모두 잡아당기려 했다. 북은 총련에서의 이탈 방지 수단으로, 남은 재일동포 간첩 사건의 마르지 않는 원천으로.

박정희, 분열을 책동하다

남쪽 출신의 재일동포들이 대거 북으로 귀국한 데에는 남쪽 정부의 책임도 매우 크다. 오죽하면 버릴 ‘기’자를 쓴 ‘기민정책’이란 말이 동포 사회에서 나왔을까? 오죽하면 관변단체로 소문난 민단이 1959년 자유당 정권을 불신임하기까지 했을까? 1948년 10월 이승만이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이승만은 일제시대에 징역을 가장 오래 산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박열 민단 단장을 접견하지도 않았고, 민단이 주최한 환영대회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이 기민정책은 박정희 정권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더 나쁜 것은 이승만 정권은 동포 사회에 무관심했다면 박정희 정권은 남북 대결의 장에 동포들을 동원하기 위해 민단을 장악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민단 내 반대파들을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모략하고 탄압해 동포 사회의 분열을 부채질했다는 점이다. 이때의 반대파(유지간담회)들이 뒤에 한민통·한통련으로 발전하게 된다. 1973년 이들은 10월 유신 쿠데타 이후 김대중이 미국과 일본을 전전할 때 김대중을 한민통 의장으로 옹립하려 했는데, 이때 김대중이 내건 전제 조건의 하나가 민단에서 떨어져나온 유지간담회 쪽과 조총련이 ‘7·4 남북공동선언’ 기념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접촉하는 것을 당장 중단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남북 정상회담을 이끌어낸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던 어려운 시절이었고, 이렇게 조심했음에도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나고, 그는 오랜 기간 빨갱이의 대명사가 되었다. 남북의 만남도, 일본 땅에서 민단과 총련의 만남도 이렇게 어려운 길을 가고 또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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