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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 대사도 외면한, 아아 노근리

등록 2006-07-13 00:00 수정 2020-05-03 04:24

생존자 정은용씨와 <ap> 취재로 세상에 알려진 그날의 끔찍한 학살… 가해자 미국보다 한술 더 떠 사건 은폐에 열올린 한국 정부가 더 밉다</ap>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노근리, 영어로는 하필 ‘No Gun Ri’라고 썼다. 수백 명이 학살당한 비극의 현장의 이름이 ‘총 없는 마을’이라니, 이 무슨 역설인가? 아니, 역설일 것도 없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말 노근리는 총 없는 마을이었다. 그들은 무장을 하지 않은 민간인들이었다.

민간인 학살의 현장에서 늘 그렇듯이 죽인 자는 총을 들고 있고, 죽은 자들은 비무장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한 달 뒤인 1950년 7월26일부터 3박4일 60여 시간에 걸쳐 자행된 노근리 사건에서도 죽은 자들은 일평생 총 한 번 잡아본 일 없었을 평범한 농촌 사람들이었다.

개전 초기 충격과 혼란에 빠진 미군

나중에 노근리 사건의 진실을 둘러싸고 중요한 쟁점이 되는 문제이지만, 개전 초기 미군이 충격과 혼란에 빠진 것은 분명했다. 최초로 상륙한 미군은 24사단이었는데, 인민군과 처음 교전한 스미스 부대는 오산에서 참패했고, 24사단 주력부대도 대전 방어전투에서 병력의 절반을 잃고 궤멸했다. 24사단장 딘 소장은 간신히 대전을 빠져나왔으나 산속에서 길을 잃고 한 달여를 헤매다가 인민군에 포로가 되는 등 미군 전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영동으로 철수한 미 24사단 병력이 새로이 도착한 미군 1기갑사단에 영동 방어진지를 인계한 것은 7월22일이었다. 인민군은 거침없이 남진을 계속했고, 미군 1기갑사단도 후퇴가 불가피했다.

7월25일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영동읍 임계리 마을에 한 떼의 미군이 일본어 통역을 앞세우고 들이닥쳤다. 통역은 미군이 후방의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켜줄 것이라며 마을 사람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포성이 가까워지자 산으로 몸을 피했던 마을 사람들도 다 내려오고, 또 미군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수색해서 마을 사람들을 모이게 해 주민 200여 명이 모였다. 미군은 옆동네 주곡리에서도 마찬가지로 안전하게 피난시켜준다며 사람들을 모았다. 여기에 대전 등지에서 피난온 타지 사람들까지 합쳐 500∼700명의 대열이 모이게 되었다.

미군은 어두운 밤길에도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대열은 느리기만 했다. 노인과 아이들이 이불 보따리에 솥단지에 보리쌀 자루를 이고 지고, 게다가 형편이 되는 사람들은 소달구지에 짐을 실은 행렬이 군대가 원하는 속도를 낼 리 만무했다. 겨우 1.5km쯤 와서 미군은 행렬을 도로에서 벗어나 하천 바닥으로 내려가게 했다. 길도 없는 비탈을 내려가다 소가 구르고, 달구지가 구르고, 사람들이 넘어지고 혼란이 일었다. 미군은 총을 쏘고 고함을 지르며 누구도 이곳을 이탈할 수 없고, 날이 샐 때까지 고개도 들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 분위기는 살벌했다. 주민들이 잘 통제가 안 되자 미군이 총격을 가해 여기서만 7명이 살해됐다. 그중 두 명은 어린이였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들을 끌어 내놓은 미군은 다음날 아침 사라져버렸다. 주민들은 4번 국도를 따라 5km가량을 남하했는데, 미군은 탱크로 도로를 차단하고 피난민들을 도로 인근의 철로를 따라 남하하라고 지시했다. 피난민들이 지시대로 철길을 따라 1km쯤 내려가 노근리 쌍굴 가까이 이르렀을 때 미군 7∼8명이 나타나 행렬을 멈춰 세우고 짐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마침 점심 때였는지라 짐을 풀어 요기를 하는 사람들도 여기저기 보였다. 짐 검사에서는 무기라든가 어떤 위험한 물건도 나오지 않았다. 한참 짐 검사를 하던 미군은 어디론가 무전을 친 뒤, 짐 검사를 중단하고 사라져버렸다. 얼마 뒤 남쪽 하늘에 비행기 두 대가 나타나더니 갑자기 폭탄을 투하했다. 폭격과 기총소사는 20여 분간 계속됐다. 지상의 미군들도 총을 쏘아댔다. 느닷없는 폭격에 모두 몇 명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확히 세어보지 못했지만, 100명 가까이 죽었을 것이라는 것이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이다.

1960년 손해배상 청구, 답신 못받아

살아남은 피난민들은 미군의 공중폭격과 지상군의 사격을 피해 배수로와 나무 숲에 몸을 숨겼다. 다시 나타난 미군은 사람들을 다시 모아 100여m 떨어진 노근리 쌍굴다리로 밀어넣었다. 400∼500명의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쌍굴다리를 가득 메웠다. 한여름 7월의 무더위 속에 수백 명이 들어찬 쌍굴은 찜통과도 같았다. 오후 3시경부터 미군은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다. 사격이 뜸해졌을 때 타는 목마름에 물이라도 마시려고 밖으로 기어나간 가람들은 모두 사살됐다.

가끔씩 총격이 멎고 미군이 다가와 쌍굴 안의 동정을 살폈다.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처럼 그들은 부상자들을 치료해주기도 했다. 당시 주민 중에 연희전문 학생이 있어 그가 왜 아무 죄 없는 우리를 죽이는지 그 이유나 알고 싶다고 하자, 미군은 “피난민이라 할지라도 의심되는 사람은 모두 죽이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다”고 답했다고 한다. 밤이 되면 사람들은 굴 속에서 죽으나 도망가다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며 필사의 탈출을 시도했다. 청장년들은 대개 탈출을 감행했으나, 중도에 총격을 받아 사망한 사람도 많았다. 탈출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굴 속에서 시체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사흘째 되었을 때 굴 속에는 부인네와 어린이와 노인들 100여 명뿐이었다. 당시 9살로 끝까지 쌍굴다리에 있다가 살아남은 양해찬씨의 증언( 오연호 지음)에 따르면 인민군들에게 패주하던 미군은 굴다리 바로 앞에 와서 총을 난사하는 마지막 살육을 감행했고, 파김치처럼 지쳐 있던 사람들은 살려달라는 소리도 못하고 푹푹 고꾸라졌다. 굴속에 있던 절반이 그렇게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쌍굴에 들어선 인민군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노근리 사건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99년 9월29일 <ap>의 보도부터다. 그러나 <ap>의 특종 보도 이전에도 이 기막힌 사건은 여러 차례 와 등 국내 언론에 의해 보도됐다. 다만, 주류 언론들이 관심을 갖지 않다가 <ap>이 보도하고 와 같은 미국 신문들이 1면 톱기사로 보도하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대서특필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ap>의 특종 보도나 그에 앞선 국내 일부 언론의 보도가 가능했던 것은 오로지 노근리가 정은용(현재 노근리 미군 양민학살 사건 대책위원회 위원장)이라는 기록자를 가졌기 때문이다. 노근리에서 5살 난 아들과 2살 난 딸을 잃은 정은용은 이승만 정권이 몰락한 직후인 1960년 가을 신문에서 서울에 있는 미국 정부 소청사무소가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피해 신고를 받는다는 기사를 보고 눈이 번쩍 띄었다. 그는 즉시 생존자들을 확인해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지만, 소청사무소 쪽은 접수 기한이 지나서 제출했기 때문에 소청사무소에서 심의할 권한이 없다는 극히 사무적인 답신을 보내왔다. 정은용은 다시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5·16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이승만 몰락 이후 잠시 나타난 푸른 하늘 밑에서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을 요구하던 유가족들은 빨갱이로 몰리고 더러는 잡혀가 징역을 살기도 했다.

<ap> 취재팀 중간에 해체되기도</ap>

그리고 또 오랜 세월이 흘렀다. 미군 학살은 어디 가서 입을 떼기도 어려웠다. “빨갱이니까 그랬겠지. 미군이 그럴 리 있느냐”가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그나마 정은용이 경찰 간부 출신으로 반공연맹 일도 보았기 때문에 그 험한 시대에 이런 사연을 세상에 알릴 마음을 품을 수 있었다. 1994년 정은용은 이 엄청난 실화를 ‘소설’이라는 위장막을 쳐서 세상에 내보냈다. 가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사건이 있고 54년이 흘러 그가 고희를 넘긴 뒤였다. 그리고 이 책이 우연히 오연호 기자의 눈에 띄어 정은용의 안내로 취재가 이루어져 지 1994년 7월호에 ‘6·25 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 양민 300여 명 학살사건’이라는 특집 기사로 실리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도 1994년 5월4일 이 사건을 실었지만, 전국판이 아닌 충청판에만 실려 아쉬움을 남겼다.



이런 일련의 노력에 <ap>이 가세했다. 최상훈 기자 등 <ap> 취재팀은 미국에서 1기갑사단 장병들을 인터뷰하고, 또 미군 내부의 작전명령서, 상황일지, 통신문과 같은 문서자료를 뒤졌다. 최상훈 기자 등 <ap> 취재팀의 노력으로 몇몇 참전 미군들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피난민들에게 사격을 가했다는 증언을 했고, 또 방대한 문서 더미 속에서 미국 육군이 미국 공군에 피난민들에 대한 사격을 요청하는 제5공군 터너 로저스 대령의 메모(사건 하루 전인 7월25일치)나 “어떤 피난민도 전선을 넘지 못하게 하고, 전선을 넘으려는 자는 모두 사살하라”는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 통신일지(사건 이틀 전인 7월24일치)를 찾아냈다. 무수한 주검(또는 세월이 흐른 바람에 백골 더미)을 앞에 두고도 증거가 없다고 발뺌하던 자들도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ap> 취재팀은 이 탐사보도로 퓰리처상을 받는 영예를 얻었지만, 보도까지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간에 취재팀이 해체되기도 했고, 보도일자는 자꾸 미뤄졌다. 노근리 사건이 미군에 의해 자행됐다는 확실한 입증을 했음에도 <ap>은 ‘학살’(massacre)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고, 전쟁범죄라는 규정도 피해갔다. 그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ap>의 보도는 노근리 사건의 진상 규명, 나아가 한국전쟁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전체의 진상 규명 노력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는 전기가 되었다.

“피해자의 보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증거와 증언, 그것도 피해자 쪽 것이 아니라 가해자 쪽 증거와 증언이 나오자 미국 정부도 한국 정부도 노근리 사건의 진상 조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진상 조사가 진행될 무렵 마침 미군과 관련된 온갖 문제가 출석부라도 부르듯 빠짐없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용산기지 이전, 매향리, 주한 미군의 독극물 방류, 기름 누출 사고 그리고 미군의 시민 폭행 등 잊어버릴 만하면 미군 문제가 터져나왔다. 자연히 미군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어떻게든 이 사건의 파장을 줄여보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국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우발적인 사고였다는 쪽으로 몰고 가려 했다. 이는 미국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미국은 처음 미군에 의한 다른 학살 사건에 대해서도 조사할 의향을 비치다가 얼마 뒤 이 입장을 철회하고 노근리 사건만을 조사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쪽 조사단장인 루이스 칼데라 육군 장관은 조사가 한창이던 2000년 2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발포한 병사들은 증언 여하에 따라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발언했다. 미군의 민간인 학살이 아예 국제형사재판소의 처벌에서 면죄돼야 한다는 억지를 부리는 미국이 왜 갑자기 형사처벌 얘기를 들고 나왔을까? 당시의 진상을 알고 있는 참전 군인들에 대해 말조심하라는 협박이었다. 그의 발언이 있은 뒤 참전 군인들은 증언을 거부하거나 핵심적인 쟁점에 대해서 말을 바꾸는 등 <ap> 보도 직후에 형성된 고백의 분위기는 얼어붙어버렸다. 그리고 미국의 일부 언론은 <ap> 보도의 허점이나 실수를 파고들었다. 국내에서도 크게 보도됐던 에드워드 데일리라는 참전 군인의 경우 자신이 직접 기관총을 쏜 듯이 증언했으나 실은 옆 부대 소속이었다. 그러나 데일리 이외에 핵심적인 증언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ap> 보도의 본질, 나아가 사건의 본질이 흐려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런 미국의 태도야 당연히 예상된 것이었지만, 더 큰 문제는 미국보다도 더 미국을 걱정하는 한국 안보족들의 태도였다. 양성철 주미 한국대사부터 “미군 지휘관들이 사살 령을 내렸는지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피해자의 보상을 포함한 법적인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발언했다. 지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를 놓고도 한국 정부의 고위 관리들 발언도 마찬가지지만, 한 나라의 정부를 대표한다는 대사의 발언이 이럴진대, 미국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2001년 조사, 축소·왜곡 드러나

1년여의 조사가 진행된 뒤 2001년 1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노근리 사건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사과하지 않았다. 다만 깊은 유감을 표명했을 뿐이다. 사망자 수는 알 수 없고 원인도 밝힐 수 없었고, 추모비 건립과 유족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겠지만 이는 노근리 사건 희생자만을 위한 추모비 건립과 장학금 제공이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희생당한 모든 민간인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60여 건에 달하는 유사한 사건에 대해 조사도 하지 않고 덮어버리려 한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희생당한 다른 민간인 학살 유가족들은 진상 규명의 기회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당연히 노근리 대책위 등은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추모비 건립 등은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미국은 노근리 사건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겁에 질리고 혼란에 빠진 병사들이 상부의 명령 없이 피난민들에게 발포한 ‘불행한 비극’으로 ‘비계획적인 살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도 이 주장에 동의해 이런 내용으로 한-미 공동발표문을 작성했다. 그러나 최근 당시 미국대사인 존 무초가 본국에 보낸 편지에서 주한미군 최고위 간부들이 모여 “주민들의 남쪽으로의 이동을 금지하고 만일 난민들이 미군 방어선 북쪽에서 출현할 경우 그들은 경고 사격을 받을 것이며, 그래도 계속 전진하면 총격을 당할 것”이라고 피난민에 대한 발포 방침을 정한 것이 밝혀지면서 2001년의 조사 결과는 사건의 진상을 한참 축소, 왜곡한 것이라는 점이 들어났다.
전쟁 과정에서 학살은 때로 우발적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노근리 학살은 우발적인 학살이 아니다. 그리고 학살 은폐만은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없다. 은폐는 조직적인 것이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이라지만, 한국 정부의 일부 관료들이나 한국 사회의 주류 엘리트들이 보인 태도는 때리는 시누이의 새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들 중 일부는 한국 쪽 조사단에서 중책을 맡거나 미국과의 교섭 일선에서 활동했는데, 사실 이들의 목표는 철저한 진상 조사가 아니었다. 당시 조사단에 참가했던 한 관료는 “미국이 우리의 맹방이며 한국전쟁에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나라라는 인식과 어설픈 우호적인 감정은 협상을 그르치기 쉽다”고 회고한 바 있는데, 너무 점잖은 표현이 아니었나 싶다. 도저히 한국 사람으로 볼 수 없는 이 머리 까만 미국인들은 자기 조국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과 국익의 실현에 대한 절절한 심정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베트남, 우리는 가해자로…

노근리 사건이 세상의 주목을 받은 1999년 9월은 또 다른 노근리 사건이 오랜 망각의 벽을 넘어 우리와 대면한 달이었다. 바로 베트남 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이 의 끈질긴 보도로 세상에 알려진 것도 1999년 9월의 일이다. 노근리와 베트남에서 한국은 피해자와 가해자로 너무나 다른 역할을 한 것 같지만, 두 사건은 본질적으로 같은 사건, 즉 동맹군이라는 이름의 군대가 주둔국의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노근리 사건이 있고 채 20년이 되지 않아 우리는 베트남 중부에 무수한 노근리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한국전쟁의 학살의 고리를 끊지 못한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베트남판 노근리를 만들었듯, 노근리 학살의 고리를 끊지 못한 미군은 베트남에서 미라이 학살을 비롯한 300여 건의 학살 사건을 일으켰고, 지금 이라크에서 또 민간인 학살의 악연이 이어지고 있다.
오는 7월 말, 노근리의 비극이 일어난 지 56년이 될 무렵, 영화 (가제)의 촬영이 시작된다. 연극 의 연출자로 유명한 이상우 선생이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메가폰을 잡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영화인들이 모두 자기 몫의 출연료나 인건비를 받지 않고 온몸으로 영화 제작에 참여하기로 했다. 내가 일하는 평화박물관도 반전평화의 메시지를 주는 제대로 된 전쟁영화 한 편을 만드는 작업에 힘을 보태기로 하였다. 독자 여러분도 동참하실 수 있는 방법을 곧 알려드릴 터이니, 제작의 후원자로, 엑스트라로, 홍보요원으로 그리고 관객으로 많은 참여를 부탁드린다.</ap></ap></ap></ap></ap></ap></ap></ap></ap></ap></ap></ap></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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