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의 역사이야기]
국보법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2)…“세상에 이런 일이” 시리즈
서평의 원문 인용도 걸리고, 중공군 강간을 인민군이 말리는 영화도 걸리고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세상에 이런 일이>란 TV 프로가 있다. 제목 그대로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은 별난 사람들의 별난 사연을 소개하는 프로이다. 우습기도 하고 짠하기도 한 살아가는 이야기 때문에 상당한 인기를 얻어 장수 프로가 되었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이 실제로 적용된 역사를 살펴보다 보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하고 깜짝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역사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막걸리 반공법 등 기막힌 사례들을 많이 소개하기도 했지만, 그 기막히고 황당한 사례는 차고 넘쳐난다. 국가보안법의 황당한 사례는 <타임머신>처럼 옛날의 기막힌 일을 다루는 프로가 아니라 21세기에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다.
김대중 시절, 법정 진술도 ‘유죄’
수업시간에 과제물로 제출한 글을 온라인 카페 게시판에 올렸는데, 이게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어 다시 구속된 학생도 있었다. 먼 데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바로 2000년 2학기에 내 한국근현대사 수업을 들은 전지윤군 이야기다. 다른 학생이 복사해다 준 구속영장을 보고 나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전지윤군은 당시 민주노동당 내의 학생 그룹인 ‘다함께’의 열성 활동가로서 내 수업을 듣기 전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적이 있던 친구였다. 그의 구속영장에 열거된 구속 사유에는 내 수업시간에 제출한 과제물뿐 아니라, 전지윤군이 과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을 때 법정에서 행한 최후진술도 포함돼 있었다. 이미 재판을 받은 사건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한 발언이 또다시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다니…. 군사독재 정권은 강신옥 변호사 사례처럼 변호사의 변론을 문제 삼아 처벌했는데, 인권 대통령을 표방한 김대중 정부에서는 자신의 변론문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한 것이다.
최후진술문의 내용 중 경찰이 문제 삼은 부분은 두 곳인데, 하나는 “자본주의는 영원불변한 체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사회를 통제하고 운영하는 더 발전된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밝힌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정리해고제 폐지와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 행동에 옮길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는 상태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인권 대통령을 자처하는 것은 너무나 위선적”이라고 비판한 대목이다. 역사의 변화 발전에 대한 개인의 생각을 표현한 부분을 문제 삼은 것도 어처구니없지만,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한 부분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는 것을 보면 과거 유신독재 시절 유신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것을 긴급조치로 봉쇄하면서 긴급조치 자체에 대한 비판을 긴급조치로 처벌한 사실이 떠오른다.
경찰은 전지윤군이 필자의 한국근현대사 수업시간에 국가보안법의 문제점을 지적한 발표 내용까지 문제 삼았다. 당시 필자는 우리 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학생들에게 찬반토론을 준비시켰는데, 전지윤군은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찬성의 입장에서 발표를 했다. 나는 당시에는 전지윤군의 전력에 대해서 알지 못했지만, 그가 학부생으로서는 드물게 충실한 자료조사와 탄탄한 논리에 입각해 인상적인 발표를 했던 점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만약 공안당국이 수업시간에 행한 발표를 문제 삼는다면, 먼저 그런 발표를 시킨 필자를, 나아가서는 국가보안법 문제를 수업시간에 다루는 이 땅의 수많은 인문사회과학 교수들을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전지윤군 사례에 대해 항의하는 글을 <한겨레>에 썼더니 같은 그룹에 속해 있는 노동자가 국가보안법에 걸린 사건에 대해서도 법원에 제출할 감정서를 써달라는 부탁을 잘 아는 변호사를 통해 받게 되었다. 이적표현물 조항에 걸린 사건인지라 공소장에는 이렇게 흉악한 얘기를 한 문건을 갖고 있고, 판매까지 했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의 기관지 <열린 주장과 대안>을 계승한 <월간 다함께>라는 잡지를 판매한 것이 주된 죄목이었다. 이번에는 피해자가 대학생이 아니라 여성 노동자였다.
내 글이 실린 블로그도 폐쇄됐다
대학원 시절부터 민족해방운동사를 전공한 탓에 공소장이야 숱하게 보아왔지만, 난생처음 감정서까지 써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아주 꼼꼼히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전기나 자서전은 읽어보면 하나같이 천사 같은 사람이고, 공소장은 그냥 읽어보면 다 죽을 죄를 저지른 나쁜 놈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공안검사가 공소장에 ‘적시’한 내용만 보면 정말 흉악한 ‘빨갱이’ 같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하고 다른 자료와 비교해가며 보아야 한다. 따라서 공소장에 ‘적시’된 ‘이적표현물’들을 구해다가 원문 전체를 읽어보는 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최소한의 의무가 된다.
그런데 원문을 읽고 나는 충격과 절망과 분노를 넘어 깊은 슬픔에 빠지고 말았다. 대한민국의 공안검사는 하필이면 <월간 다함께>에 실린 서평을 문제 삼았는데, 공소장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 문제 삼은 대목은 “트로츠키는 중간계급을 노동계급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파시즘 앞에서 동요하는 급진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반파시즘 공동전선을 통해 노동계급의 단호한 힘을 보여줄 때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는 부분이었다. 문제가 된 서평은 러시아의 혁명가 트로츠키가 지은 <프랑스 인민전선 비판>이라는 책을 다룬 것이고, 문제가 된 대목은 서평자의 주장도 아니고, 책의 저자인 트로츠키가 한 말이었다. 세상에, 서평에서 원저자의 주장을 인용한 것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하다니! 아아, 그 어려운 고시에 합격해 엘리트 공안검사가 되었다는 자의 자질과 성실성이 이것밖에 안 된단 말인가? 일제 사상검사들이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기소할 때도 이렇게 막돼먹게,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하지는 않았다. 그 엄혹했던 일제시대, 악랄하기 짝이 없던 일제 사상검사와 고등경찰이 서평의 인용문을 문제 삼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나는 무죄 판결을 확신했지만, 법원은 검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2004년 7월쯤이었다. 인터넷에서 나는 네이버가 블로그 게시물을 문제 삼아 블로그를 폐쇄했다는 기사를 읽고 “세상에 이런 일이!”라며 분개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붙잡혀가 조사받은 사건은 아니지만, 국가보안법에 길들여진 사회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내면화된 검열 시스템이 가장 자유로운 인터넷 공간에서도 작동한 것이다. <노동신문>도 광화문에 가면 볼 수 있는 세상에 도대체 어떤 흉악한 글을 올렸기에 그런 험한 일을 당했나 하고 생각하다가 잊어버렸는데, 한참 뒤에 알고 보니 블로그 폐쇄 사태의 빌미가 된 글은 내가 여기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란에 쓴 ‘20세기형 민족주의자, 김일성’(517호)이란 글이었다. (늦게나마 블로그 주인 ‘똘레랑스는 칼이다’님께 위로의 인사를 전한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이 막강한 힘을 발휘한 분야는 영화였다. 할리우드의 광풍이 세계를 평정해가는 가운데, 한국 영화가 선전하고 있는 것이 오로지 스크린쿼터 덕분일까?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그리고 국가보안법을 받들어 모시는 자들의 못된 심성이 끊임없이 시비를 걸고 있지만, 민주화된 덕분에,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한 부분을 이루었던 젊은 영화인들이 영화계의 주된 일꾼이 된 덕분에 한국 영화는 국가보안법을 넘어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1차 인혁당 사건이 일어난 해인 1964년 12월 서울지검 공안부는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가 “감상적인 민족주의를 내세워 국군을 무기력한 군대로 그린 반면, 북괴의 인민군을 찬양하고 미군에게 학대받는 양공주들의 비참상을 과장 묘사하여 미군 철수 등 외세 배격 풍조를 고취하였다”는 어마어마한 혐의로 이만희 감독과 제작자인 이종순씨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설마 1960년대에 한국 영화가 인민군을 찬양했을까? 진상은 이랬다. 인민군에 잡힌 여자 포로를 중국인민지원군 장교가 겁탈하려 할 때 북한군 장교가 막아주었다. 그 여자 포로가 북한 장교에 대해 “참 멋진 남자야”라고 독백한 것이 고무찬양죄가 된 것이다. 공안당국이 진짜 문제 삼은 것은 중공군의 행동을 감히 인민군 ‘따위’가 제지했다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미군이 한국 여인을 겁탈하려 할 때 이를 막아주는 멋있는 국군장교를 그려도 역시 미군을 비하했다고 잡혀갔을 것이다. 남정현의 소설 <분지>는 이런 상황을 홍길동의 10대손을 주인공으로 우화적으로 그렸다가 봉변을 당했다.)
“가자! 가자”는 북으로?
공소장은 “공산계열인 북괴와 중공은 공산주의 이념이 동일하고 대한민국을 침해함으로써 상호간 무력충동을 몽상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이 여군들을 겁탈하려 드는 것을 괴뢰군 수색대장으로 하여금 제지케 하여 위안부로 하여금 ‘장교님의 행위는 훌륭했어요’라는 등 칭찬을 하게 한 것은 결과적으로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고무·동조·찬양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못을 박았다. 냉전 시기 한국의 엘리트들 머리 속의 네 편, 내 편에 대한 진영 인식은 이처럼 강고해 성폭력을 말리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 것은 이 멋진 ‘괴뢰군’ 장교가 자신이 구해준 여포로와 함께 ‘자유를 찾아 남하’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가 중공군에 대든 것이나 여포로가 그를 찬양한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였다. 또 영화의 구성상 국군의 배역을 코미디언이 맡았는데 전투원으로서의 역할이 없어 무기력하게 그려졌다는 것도 중요한 혐의였다. 세련된 반공영화가 반공법으로 처벌받는 현실 속에서 국군이나 인민군이 등장하는 영화라면 모름지기 <배달의 기수>를 모델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재판부가 영화를 직접 본 뒤 이만희 감독 등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하고 필름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만 발부해 당장의 구속 사태는 면했지만, 영화는 여러 곳이 잘려나가고 급히 새로 촬영한 부분이 삽입되어 <돌아온 여군>으로 제목이 바뀌어 상영되었다. 결국 이만희 감독은 구속되어 보석으로 석방될 때까지 짧은 기간이나마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7인의 여포로> 사건이 있은 뒤 <오발탄>의 유현목 감독은 1965년 3월23일 세계자유문화회의 한국지부 주최 세미나에서 ‘은막의 자유’라는 논문을 통해 “작가의 창작행위가 절대적 힘의 소유자에 의해 간섭받고 있다”며 한국에서의 창작의 자유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일 수 없다. 한국의 작가는 국가적 현실 때문에 주제로서의 권리가 타의에 의해 침해받고 있다”면서, “만일 반공이라는 국시 때문에 언제까지나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그래서 생명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대저 갈등은 어디에서 만들어내고 드라마는 어떻게 꾸려가며 영화예술의 차원은 어떻게 높여간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최근 영화들까지 끈질긴 시비
유현목 감독은 “아무리 한국적 현실이 미묘하다고 해도 몇 가지 조문이나 법관복 몇 벌의 위력만으로는 작가의 내면세계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이라며 공안당국이 이만희 감독을 구속한 것을 비판했다. 당시 유현목 감독이 과감하게 이런 비판을 하고 나온 것은 당시 한국의 영화가 중흥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욱이 우리는 세계 유수의 영화 생산국으로서, 바야흐로 양산이 아닌 우수 영화를 세계 시장에 수출해야 할 단계로 줄달음치고 있는 실정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이 싹은 꺾였다. 유현목 감독은 전후 1950년대의 급격한 사회 변화의 혼란상을 예리하게 다룬 <오발탄>에서 주인공의 실성한 노모가 “가자, 가자!”를 외치는 대목이 “북으로 가자는 것이냐”고 하여 뒤늦게 곤욕을 치른 바 있었는데 이 일까지 겹친 것이다. 이후 한국 영화에서 사회비판의 문제의식은 거세된 채 호스티스 영화나 <애마부인>류의 영화가 스크린을 장식하게 된다. 한국 영화의 쇠퇴를 가져온 박정희가 죽어서도 우리 영화의 발목을 부여잡은 것이 영화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시꺼멓게 만들어버린 <그때 그사람들> 파동이다.
유현목 감독은 1심에서 1년6개월형을 구형받았는데, 결국 반공법 부분은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음화(淫畵)에서는 유죄에 해당하는 선고유예를 받았다. 왜 갑자기 음화냐고? 이것이 반공법, 국가보안법에 꼭 따라다니는 안전장치인 끼워넣기다. 국가보안법으로 일단 잡아넣으면 공안당국은 압수수색에서 나온 사회과학 서적 한두 권을 이적표현물로 걸어서 같이 기소하면 법원은 본안(반국가단체나 이적단체 가입죄나 간첩죄, 또는 논란의 소지가 많은 고무찬양죄)과 상관없이 이적표현물에 대해서는 유죄를 때려준다. 이적표현물 소지죄가 있어 국가보안법 불패의 신화가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음화 부분은 유현목 감독이 당국을 세게 비판하자 그가 <춘몽>이라는 영화를 만들 때 여배우의 뒷모습 나체를 찍은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수백만 명이 읽은 <태백산맥>도 국가보안법 위반 서적이 되었다. 영화 <태백산맥>은 너무 일찍 만들어진 탓인지 국가보안법의 위력 앞에 소설의 힘을 살리지 못했다. 최민식씨가 북한군 장교의 내면 세계를 그려 화제가 된 <쉬리>가 나온 것이 1999년, <7인의 여포로>가 난도질당한 때로부터 햇수로 따지면 36년이 된다. 한국 영화의 사실성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일제 36년만큼의 세월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후 국가보안법 교도들은 ‘분단의 오욕’을 나름대로 뛰어넘으려던 <공동경비구역 JSA>는 물론이고,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우익 성향의 영화들까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문제 삼았다. 그러나 대중은 적어도 영화에 관한 한 더 이상 국가보안법 교도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최근 <조선일보>가 <웰컴 투 동막골>을 국군과 인민군이 힘을 합쳐 미군에 저항하는 불온한 반미영화로 몰아가려다 실패한 것은 국가보안법 시대의 종언에 대한 예고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 고만 해라, 국가보안법에 물리면 마이 아파.
<무림파천황> 같은 무협지에서 사부가 제자에게 가르침을 준 것도 유물변증법으로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주었다 해서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었고, 신학철 화백의 <모내기>는 그림의 배치에서 아래쪽에 쓰레기를 그리고 위쪽에 백두산과 함께 밝은 모습의 농민과 아이들을 그렸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당국이 북쪽 농민들이라 강변한 것이 사실은 화가가 고향마을 사람들의 사진을 모델로 그린 것이라고 사진까지 제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50년대에는 성균관대 법대의 이동화 교수(정치학)가 수업과 시험에서 미국과 소련 간의 평화 공존에 대해 이야기했다가 기소되어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고, 1970년대에는 중국의 베이징중의학원이 간행한 <침수임상취혈도>라는 책자의 일어번역판을 복사 판매한 사람이 중국 책자 군데군데에 박혀 있게 마련인 마오쩌둥 인용문 때문에 반공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국이 보기에 흉악한 ‘의식화’ 책자들을 판매하는 사회과학 서점들은 심심하면 압수수색에 시달렸고, 때로는 구속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이제 세상도 많이 변하여 사회과학 서점이라 할 만한 것은 몇 남지 않았지만, 성균관대 앞 풀무질의 은종복씨는 <말> <철학 에세이>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같이 대학가 새내기 추천도서에 빠짐없이 실려 있고, 지금도 잘 팔리는 책들 때문에 곤욕을 치른 시절을 몸서리치며 회상했다.
흉악한 책자들이 지금은 추천도서
수구세력은 국가보안법이 국군, 한-미 동맹과 함께 “우리 체제를 지키고 지속적인 대한민국의 번영을 가져온 3대 토대”(<국가보안법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라고 강변하지만, 국가보안법에 대해 공부할수록 의심스러운 부분은 이 법이 정작 지킨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국가보안법의 가장 큰 문제는 자유민주주의를 기본부터 파괴하는 법이며, 자유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법이라는 점이다. 국가보안법이 진정 지켜온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공안기관 종사자들의 철밥그릇의 보안과 번영이었다. 국가보안법은 이제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수구세력의 밥그릇 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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