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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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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과 인혁당, 조작의 재생산

등록 2005-12-28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냉전이 끝나 반공의 약발이 떨어진 자리를 국익이 메우기 시작하는가
합리적 의심이 작동 못하도록 만드는 폭력이야말로 국가보안법의 본질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어딜 가나 황우석 교수 이야기다. 고3 때인들 생물 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했을까? 온 국민이 갑자기 줄기세포 전문가가 되어버렸다. 한마디로 나라가 온통 뒤집혀버렸다. ‘인위적 실수’라는 현란한 말장난의 안개가 걷히며 충격적인 조작극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황우석 쇼크가 전국을 강타하기 열흘쯤 전인 12월7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인혁당 재건위와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한마디로 인혁당 재건위원회란 단체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1975년 4월9일 대법원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8명의 고귀한 목숨을 앗아가버린 박정희 시대 최대의 공안사건은 철저하게 조작된 것이다. 2005년 12월, 국민들은 3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발생한 두 개의 희대의 조작극이 탄로나는 광경을 지켜보게 되었다.

한국의 철칙, 말 많으면 공산당

나는 2005년 초부터 국정원 진실위원회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실무책임자 일을 맡아보았기 때문에, 내가 비록 과학에는 문외한이지만 황우석 쇼크를 보면서 느끼는 바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원래 국가보안법에 대한 연재를 마치고 인혁당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다룰 예정이었지만, 희대의 조작극이 발생한 마당에 계획을 수정해 두 조작사건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두 사건 모두 일반 시민들이 이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신뢰를 뒤흔들어놓았다. 처음 조작 의혹이 제기됐을 때 많은 국민들이 황우석 교수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것은 황우석 교수가 던져준 희망의 불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환자 맞춤형 줄기세포가 그리 빨리 임상치료에 적용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더라도, 많은 시민들이 ‘설마하니 과학자가 논문을 쓰면서 기본 자료를 조작하랴’ 하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발표됐을 당시에도 엄혹한 군사독재 정권의 탄압만이 아니란 많은 국민들이 정부에서 하는 발표이니 사실이겠지 하고 믿었던 것이다.

믿음이란 것은 중요한 가치이지만, 믿음이 힘을 발하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믿음의 경우는 조금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철저한 검증과 감시에 기초해야 한다. 믿음의 다른 측면은 합리적인 의심이다. 합리적인 의심을 품을 수 있고, 이런 합리적인 의심이 검증될 수 있는 시스템, 이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가 왜 3권을 나누고, 견제와 균형의 장치를 겹겹이 만들어놓는가? 이는 권력의 속성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나는 황우석 사건을 보면서 국가보안법을 떠올렸다. 줄기세포 파문에 웬 국가보안법이냐 하실지 모르지만, 나는 합리적인 의심이 작동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폭력이야말로 국가보안법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마음속에 의문이 생길 때 이를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서야 어찌 풀어갈 수 있으리오? 그러나 국가보안법에 기대어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철칙은 무엇인가? 말 많으면 무조건 공산당이다. 반대 의견을 표출하지 못하는 사회, 정부의 발표는 무조건 믿어야 하고, 교과서에는 진리만이 실리고, “신문에 났어” 하면 더 이상의 검증이 필요 없는 사회, 이것이 국가보안법이 그리는 이상사회였다.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인 1974년 1월,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제1호를 발동했다. 이는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와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이를 어기는 자뿐 아니라 이 조치를 비방한 자까지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긴급조치 제1호의 6항은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고 규정했다. 도대체 얼마나 상황이 긴급했기에 영장을 발부받을 시간도 없었고, 군사법정에 사람들을 세워야 했을까?

황우석 교수 파동을 보면서 들었던 의문은 연구진이 수십 명인데 과연 이 모든 사람들이 조작의 공범인가, 아니면 이들을 다 속이고 조작하는 것이 가능했는가 하는 점이다. 연구진으로 참여한 쟁쟁한 과학자들이 모두 양심을 저버린 인물은 아닐 텐데, 왜 검증이 안 된 것일까? 정부는 수백억원의 연구비를 몰아주면서 덩달아 장밋빛 꿈을 꾼 것일까?

“고문하고 있나?” “안 하는데요”

사실 이 의문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다루면서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문제였다. 물증이라고는 달랑 북의 방송을 청취해 기록한 노트 한 권뿐인 사건- 그나마 이 노트는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혐의의 증거가 아니고 반공법상의 이적표현물 소지의 증거일 뿐이다- 에서 8명이 목숨을 잃는데 사건을 수사한 중앙정보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검찰이나 법원은 도대체 무엇을 했으며, 언론은 또 무엇을 하였기에 이런 엄청난 조작사건이 그대로 먹혀들어갈 수 있었을까? 국가의 검증 시스템은 철저히 마비돼 있었다. 이 조작사건의 가장 큰 책임이 중앙정보부에 있다는 전제하에 국가시스템 전체가 조작사건의 공동정범으로 물려들어간 과정을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알고도 속아준 것인지, 모르고 속은 것인지 또는 그 경계가 어디인지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사 경험과 황우석 파동을 보면서 한 가지 확실하게 느낀 것은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가까운 사람을 속이는 것이 상식적인 타인을 속이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는 점이다. 중앙정보부의 전직 고위 간부는 당시에도 안팎에서 고문 의혹이 무성하게 제기됐는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고문하지 말라고 수없이 지시를 내렸을 뿐 아니라 수사관을 불러 구두로 조사했다고 답한다. 수사관이 “나를 못 믿습니까? 저런 빨갱이 말을 믿습니까?” 하고 펄펄 뛰며 부인하니 자기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라는 것이다. 안기부·국정원 도청 사건에서도 고위 간부들이 도청 근절 지시를 내리고 밑에서 안 한다고 보고하면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고문 의혹과 관련해 중앙정보부 내부 문서를 뒤지다 보니 1973년 10월의 최종길 교수 고문살인 의혹 사건 직후 중앙정보부장이 감찰실을 통해 수사 관련 부서의 수사 상황을 점검한 보고서가 나왔다. “고문하고 있나?” “안 하는데요.” 그냥 그렇게 넘어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진술 이외에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반국가단체가 만들어지고 8명이 목숨을 잃었다. 차단의 원칙이라는 이름하에 중앙정보부 내에서는 다른 부서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는지는 알아서도 안 되고 알 수도 없었다. 철저하게 분업화된 실험실에서 우리 팀원이 하는 일이라는 믿음 속에서 내부 검증의 절차는 자리잡을 수 없었다. 검증이 사라진 곳에서 조작은 싹텄다.

그래도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 당시에는 공안검찰이 중앙정보부나 검찰 수뇌부에 저항해서 중앙정보부에서의 진술 이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사건을 어떻게 기소하느냐며 저항하다가 사표를 내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는 적용되지 않고 단순 반공법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꼭 10년이 흘러 1974년에는 비록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라는 탈을 쓰기는 했지만, 대한민국의 검사들은 적극적으로 인혁당 재건위라는 반국가단체를 만들어내는 데 가담했다. 아니, 수사일지를 찬찬히 검토해보면 검사들이 투입된 이후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반국가단체 사건이 만들어졌다.

1심과 2심은 군인들이 재판관이 된 군사법정에서 행해졌다는 점에서 사법부 역시 사법권을 중대하게 침해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법원이 이 사법살인의 마지막 관문이었다는 점에서 사법부는 결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여기서 책임이란 역사적·도덕적, 또는 정치적 책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증거라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고, 고문 의혹은 만발했고, 심지어 공판 조서의 변조 의혹까지 제기되는 상황에서 대법원은 ‘법률심’이라는 간판 뒤에 숨어 아무런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법률의 적용에 잘못이 없다며 사형을 확정했다. 재심의 기회도, 구속 기간 중에 가족 면회의 기회도 갖지 못한 8명이 대법원에서 이 따위 ‘판결’이 내려진 이후 18시간 만에 처형됐다. 이 몰상식하고 반도덕적인 집행은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는 법률은 없으니 적법한 절차였다.

언론, 침묵과 애국주의 사이

이재승 교수는 최근에 발표한 논문에서 “법관의 범죄 행위로서 사법살인은 정치적 목적에 봉사할 의도하에 악법의 무제약적 적용, 법률 문언에 반한 법률 해석, 사실관계의 조작 증거의 자의적인 평가, 사실관계에 어울리지 않는 형량의 부과 등을 통해서 사형을 선고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는 행위”라 정의하고, 사형이 집행된 경우에는 살인죄의 기수가 된다고 주장했다. 법관이 살인죄의 처벌을 면할 수 있는 길은 심신상실의 상태에서 재판을 했거나, 아니면 본인이나 가족이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상태에서 재판을 한 경우이다. 유신 정권이 야만적이긴 했어도 이 지경은 아니었다.

그리고 언론. 황우석 파동에서 애국주의를 부추긴 언론이 인혁당 사건에서 수행한 역할은 조금은 복잡하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이 사형당할 때 언론은 침묵을 지켰다. 아니, 조작된 정보, 예컨대 사형선고를 당한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도 적화통일을 바란다는 식의 조작된 유언을 버젓이 전해 일반 국민들이 ‘아, 저들은 진짜 빨갱이구나’ 하는 잘못된 의식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독재정권이 처음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조작하던 1974년은 상황이 달랐다. 젊은 기자들은 할 말을 하고자 했고, 지금과는 사뭇 논조가 달랐던 <동아일보>는 유신독재 비판의 선봉에 섰다. 그리고 가해진 것은 광고 탄압. 역사상 처음으로 백지광고가 나갔다. <동아일보>는 그 와중에도 석 달을 버텼다. 독자들은 주머니를 털어 자기 의견을 광고에 실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1975년 3월 유신정권의 압력에 결국 무릎을 꿇었고, 100여 명의 기자를 내쫓았다. <조선일보>도 30여 명을 해직했다(이때 해직된 분들이 뒤에 한겨레신문을 만드는 주축이 되었다). 국가 권력에 의한 인혁당 살인사건이 자행되던 그 순간, 한국의 주요 언론은 바람잡이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유혈이 낭자한 해직의 칼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직후의 일이었다.

<동아일보>도 석달 버텼는데 최문순은…

황우석 파동에서 언론은 <u><한겨레21> 590호</u> 에서 지적한 것처럼 목청 찢어지게 ‘황우석 만세’를 외쳤고, 황우석 신화의 검증을 요구하는 〈PD수첩〉을 물어뜯었다. 1975년을 뒤흔든 반공궐기대회 같은 푸닥거리 대신에 2005년의 언론은 ‘국익’을 내세웠다. 냉전이 끝나 반공의 약발이 떨어진 자리를 국익이 메우기 시작했을 뿐, 반공이든 국익이든 방식은 똑같았다. 다른 생각은 용납되지 않았다. 황우석을 의심하는 자는 매국노였다. 이제 국익은 신판 국가보안법의 새로운 주문이 되었다. 1975년의 조작극과 다른 점은 당시는 대중들이 국가 권력의 조작극에 속아넘어가 구경꾼이 된 반면, 2005년의 황우석 사태에서는 대중들이 적극적으로 애국주의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2002년 월드컵의 흥분이 그저 한 판의 잔치가 아니라 폭발적 열기의 중독증을 가져온 것일까? 아니면 국가보안법의 교육효과가 서서히 나타나는 것일까? 반공을 위해서라면, 국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것도 정당화됐다. 황우석을 비판하는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자

“언론의 ‘진실 규명’도 나라가 있고 민족이 있은 다음에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번 일처럼 ‘나라와 민족’을 무시하고 오직 개인적인 ‘진실 규명’만을 중시하는 태도로 언론이 나아간다면 우리나라와 민족의 미래는 없습니다. 일본놈들은 ‘난징 대학살’이나 ‘종군위안부’같이 피해자들이 버젓이 살아 있는 사항에 대해서도 온갖 핑계를 대서 ‘부정’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우리나라 학자의 작은 잘못 하나 감추어주지 못한단 말입니까? 당신들은 우리나라보다 ‘미국’이나 ‘일본’을 더 사랑하십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매국노’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국익을 위해서 때로는 ‘진실’이 감추어질 필요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저의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리켜 ‘파시즘’이라고 매도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파시스트’가 되겠습니다. 되고 말고요.”

실망스러운 것은 문화방송의 태도였다. 1975년의 <동아일보>는 광고가 다 떨어져나가 광고난을 백지로 내는 상황 속에서도 석 달을 버텼다. 유신권력보다 ‘애국 대중’이 더 무서운 탓일까? 김상만의 <동아일보>도 석 달을 버텼는데, 최문순의 문화방송은 〈PD수첩〉 광고가 떨어져나간 데 이어 <뉴스데스크> 광고 역시 떨어져나갈 조짐을 보이자 바로 꼬리를 내렸다. 가슴 아픈 일이다.

조작은 혼자서 하지 못한다. 인혁당 사건도 그렇고, 황우석 사건도 그렇고, 혼자서 그 모든 일을 조작할 수는 없다. 유신권력 내에 민주주의는 없었다. 박정희가 불순세력이 인민혁명을 꾀하고 있다고 엄포를 놓으니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이 일어났고, 저들은 극형에 처해 마땅하다고 악을 쓰니 일사천리로 사형이 집행됐다. 윗사람의 얘기는 곧 법이었다. ‘대통령 각하의 담화’나 ‘부장님(중앙정보부장)의 발표문’에 맞춰 수사는 철저히 짜맞추기 식으로 진행됐다. 황우석이 조작을 지시했을 때 연구원은 잘못된 줄 알면서 지시를 따랐다. 연구실은 군대보다 더했다고 한다.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비민주적인 분위기에서 절대권력자의 지시에 의해 조작은 이루어졌다.

진실의 쓰디쓴 승리

30년 전의 국가범죄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는 조작극과 2005년의 황우석 사건을 보면 그래도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아직 희망은 있다. 결국 진실은 드러나게 돼 있지만,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8명이 죽은 뒤 30년의 세월이 흐르고서야 진실이 드러났다. 황우석 파동은 다행히 사람 목숨은 다치지 않은 채 몇 달 만에 진실이 밝혀졌다. 젊은 과학자들의 용기와 성실성이 황우석 신화가 드리운 거짓의 장막을 벗겨낸 것이다. 긴급조치와 국가보안법으로 지탱되는 유신체제하에서 청년학생과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인혁당 사건이 조작임을 외쳤지만, 그 소리는 울려퍼질 수 없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시대에 젊은 지식인들이 조금씩 지혜와 노력을 모으니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힘을 만들어낸 것이다. 진실의 승리였다. 그러나 진실은 결코 달콤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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