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걸음만 앞서 가라〉
강상중 지음, 오근영 옮김, 사계절 펴냄, 9천원
는 정치사상사를 전공한 강상중(59) 일본 도쿄대 교수가 정치적 리더십 문제를 다룬 최근 저서다. 재일동포 2세인 강 교수는 지금 일본에서 가장 잘나가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책 제목이 된 ‘반걸음만 앞서 가라’고 한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2005년께부터 김 전 대통령을 매년 만난 강 교수는 지난해 4월 정식 인터뷰를 했고, 그때 김 전 대통령이 세계화 시대의 리더 역할에 관한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정치학자 강상중이 제안하는 리더십 파워 일곱 가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따라서 김 전 대통령의 삶을 통해 바람직한 리더십이 무엇인지 조목조목 살펴보는 실용서적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런 형식을 일부 취하고 있을 뿐 책 편제나 내용은 일본 현실정치 이야기에 무게중심이 놓여 있다. 강 교수가 “이명박 정권하의 역주행” “거꾸로 가는 광경”이라 비판했고,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그 역행을 막기 위한 “마지막 투쟁”, 말하자면 사투의 결과라고 한 한국 현실정치에 대해서도 그 부분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는 미운털이 박혀 있고, 고국에서도 부당한 대접을 받는” “‘역사의 쓰레기’ 같은 존재”인 재일동포라는 자기모멸에서 그를 구출한 것은 1972년에 처음 가본 조국의 처참한 현실과 1973년에 일어난 ‘김대중 납치 사건’이었다. “나는 비로소 거대한 구조적 폭력을 들여다본 것 같았다. 한-일 유착의 구조와 그것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미국의 압도적인 그림자. 그것이 구조적 폭력의 ‘정체’임을 알았을 때, 나는 안이한 낭만적 감상에 이별을 고하고 역사적 현실이라는 거대한 존재와 마주하게 되었다.”
강 교수가 평가하는 김 전 대통령의 최고 덕목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구조적 폭력’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종식시키는 일을 평생 소명으로 삼고 실천했다는 것이다.
구조적 폭력과 더불어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청동 기저귀’다. 일본 정치인의 리더십 부재를 상징하는 청동 기저귀는 패전국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 일본에 채운 ‘특수한 수갑과 족쇄’를 말한다. 강 교수에 따르면 요시다나 기시, 이케다, 사토 등 미-일 동맹 체제의 틀을 완성한 총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카소네나 다나카 등 몇몇 특기할 만한 정치가들도 결국은 미국제 청동 기저귀를 차고 미국의 이해범위 안에서 논 “리더 아닌 리더” “리더가 리더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리더일 수 있는” 존재들에 지나지 않았다. 야당이 거세당한 상황에서 일본 국민은 집안싸움인 자민당 내 파벌 투쟁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현실생활에 별로 절박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우선은 살 만했고 생명에도 별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해도 상관없어’ 하고 지나쳐온 것이다.”
그런데 고도성장이 끝나고 냉전이 무너지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거품경제가 붕괴하고 불황이 가속화된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상황이 급박해졌다. 그런데도 자민당은 기껏 도로공사를 늘려볼까,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해볼까 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고이즈미가 등장한 것은 바로 자민당 주류 55년 체제의 ‘이익분배 정치’가 이런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였다. 사람들은 “뭔가 해줄 것 같은” 분위기를 요란하게 연출한 고이즈미에게 잔뜩 기대를 걸었으나 그가 해결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사회적 격차와 빈곤 문제를 키우고 지역사회를 피폐하게 만들고 사회보장 체제도 망가뜨렸다.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김대중은 그런 미국제 청동 기저귀를 찬 부류와는 달랐다고 강 교수는 말한다. 한국의 정치 리더들 역시 미국제 기저귀를 찼지만 그것은 청동제보다 더한 ‘무쇠’ 기저귀였다. 김대중은 무쇠 기저귀를 찬 게 아니라 그것을 찬 가짜 리더들과 목숨을 걸고 싸운 진짜 리더였던 셈이다. 이케다 등 청동 기저귀를 찬 자들의 리더십이 가짜였다면 박정희 등 무쇠 기저귀를 찬 자들의 리더십은 더한 가짜가 아닌가.
이른바 ‘전후정치’ 체제가 끝나고 새로운 변화 물결이 예고되는 일본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보여준 리더십의 진수를 전하고 싶다”는 게 강 교수가 이 책을 쓴 이유다.
한승동 선임기자 한겨레 문화부문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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