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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책] 조선은 왜 정도전을 버렸을까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계보학적으로 파헤친 <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
등록 2010-07-03 15:06 수정 2020-05-03 04:26
〈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

〈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

 


김용헌 지음, 프로네시스 펴냄, 1만3천원

지식과 권력 혹은 담론과 권력의 내밀한 관계를 밝힌 사람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1926~84)다. 권력이 담론을 동원하고 담론이 권력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학문 방법을 푸코는 계보학이라 했다. 한국철학을 전공한 김용헌 한양대 교수가 쓴 은 이 계보학의 방법론을 빌려 조선 주자학 담론과 정치권력의 관계를 살핀 책이다.

맹자의 혁명 논리에 바탕을 둔 정도전

지은이가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사람은 정도전·정몽주·조광조·이황·조식·이이 여섯 명이다. 이들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느냐 하는 것은 권력투쟁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일이었다. 조선은 주자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은 나라였으므로, 주자학 안에서 특정 담론 계보를 도통으로 세우는 일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일과 분리되지 않았다. 특히 학맥의 우두머리를 공자의 사당에 함께 모셔 제사 지내는 ‘문묘종사’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이런 사정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 율곡 이이의 문묘종사 경위다. 율곡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제안은 인조 즉위 직후인 1625년에 처음 발의됐다. 율곡의 계보를 잇는 서인들이 발의자였다. 그러나 퇴계 이황의 학맥을 잇는 남인들의 반대 때문에 57년이 지난 뒤인 숙종 8년(1682)에야 성사됐다. 그러나 사건은 이것으로 완결되지 않았다.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율곡의 위패가 문묘에서 철거됐다. 다시 5년 뒤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율곡의 위패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문묘종사는 단순히 유학 내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나 학문이나 진리를 넘어 정치의 문제였고 권력의 문제였다.”

조선 주자학의 첫머리에 놓이는 정도전과 정몽주에 대한 평가의 반전은 드라마틱하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을 설계한 기획자이자 역성혁명을 주도한 혁명가였고, 주자학을 통치 원리로 세운 유학의 대가였다. 그러나 그는 조선왕조 500년 내내 간신으로 낙인찍혀 배척당했다. 그가 공식적으로 복권된 것은 고종 2년(1865)이었다. 경복궁을 설계한 공이 있다는 것이 복권 이유였는데, “경복궁을 설계한 공은 인정받았으나 조선왕조를 설계한 공은 끝내 인정받지 못했다.” 반면에 조선 건국 세력과 대립한 정몽주는 뒷날 조선 주자학의 우두머리로 등극했다. 이런 반전의 과정에 권력의 논리가 작용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1392년 7월 이성계는 왕위에 올라 즉위 교서를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임금의 존재 이유를 간략히 밝혔다. “하늘이 백성을 낳고 임금을 세운 것은 임금으로 하여금 백성을 길러 서로 살게 하고 백성을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군도(君道)에는 득실이 있고 인심에는 복종과 배반이 있으니, 천명이 떠나가고 머물러 있음은 여기에 달려 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이치다.” 정도전이 쓴 이 교서는 의 혁명 논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임금이 임금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 인심이 돌아서고 천명이 떠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정몽주 복권, ‘충신 이데올로기’ 확립

정도전은 의 민본주의를 자기 사상의 근본으로 삼았다. “유교적 민본주의에서는 군주의 정통성을 천명에 두고 있으며 그 천명은 궁극적으로 백성에 의해 확보되고 유지된다. 맹자에게 정치적 행위의 현실적 근거가 민심이라면, 이념적 근거는 하늘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유교적 민본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이며, 정도전도 이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를 ‘얼굴마담’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건국 이념에 맞춰 조선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른 실력자 이방원이 그 건국의 길에 최대 걸림돌로 등장했는데, 결국 그는 이방원 세력한테 붙잡혀 참수당한다.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은 난신적자의 지위로 떨어졌다. 반면에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이방원의 철퇴에 맞아 죽었던 정몽주는 그 이방원이 조선의 3대 왕이 된 직후 복권돼 충신의 자리에 오른다. 이어 중종 때 문묘에 종사됨으로써 조선 주자학의 태두가 된다. 정몽주 복권은 ‘충신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려는 왕권의 뜻과 주자학 이념을 튼튼히 세우려는 신진 사대부의 뜻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고명섭 기자 한겨레 문화부문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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