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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여, 가장 마지막까지 울어라

정호승 시인의 <동아일보> 칼럼을 읽고…

시인은 북한 공격 물증이 없어 우울하고, 나는 ‘시인 비판론’ 물증 앞에 우울하네
등록 2010-05-13 14:08 수정 2020-05-03 04:26
시인이여, 가장 마지막까지 울어라. 사진공동취재단

시인이여, 가장 마지막까지 울어라. 사진공동취재단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의 원인까지도 계산해내는 세상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 나라의 바다에서 배가 부서져 사람이 46명이나 죽었는데도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차분하게 사실을 따지기보다는 거만하게 의견을 말하는 데 익숙한 일부 언론은 일찌감치 북한의 침공으로 단정하고 막무가내의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답답하지만, ‘46명의 죽음’이라는 유일한 팩트에 근거해 그 죽음을 슬퍼하고 추모하는 것 외에 더 뭘 할 수 있을 것인가. 가까운 어떤 분께서 사람들이 타인의 죽음에 대해 점점 무감해지는 것 같다고 하는 말씀을 들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오늘날 시인들의 책무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가장 먼저 울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일 말이다. 그러다 정호승 시인이 쓴 ‘절망보다 분노하라, 울기보다 다짐하라’( 4월29일치)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그저 슬퍼하기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 자신이 오래전에 시인의 책무로 떠맡은 일도 그것이었으니.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슬픔이 기쁨에게’에서) 그러나 시인은 그 이상을 하려다가 모든 것을 그르치고 말았다. “단호한 응징”을 촉구하면서 이런 문장을 덧붙이는 식이다. “부처님은 어디선가 독 묻은 화살이 날아와 허벅지에 박혔을 때 먼저 그 화살부터 빼라고 하셨다. 허벅지에 독 묻은 화살이 꽂혀 있는데도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왜 쏘았는지, 활을 만든 나무가 뽕나무인지 물푸레나무인지 먼저 알고 싶어한다면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몸에 독이 퍼져 죽고 말 것이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화살을 빼라고 하셨지 화살을 쏘았다는 증거가 없는 이에게 그 화살을 되쏘아버리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망집과의 단호한 결별 혹은 중생 구원의 시급함을 말하는 귀한 말씀이 맹목적인 호전 논리로 각색되었다. 어리둥절한 아전인수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적에게 기습 공격을 당해도 물증을 찾아야만 항의할 수 있는 시대에 사는 나는 우울하다.” 이 놀라운 문장을 초현실주의적이라거나 선(禪)적이라고 하면 그것은 초현실주의자나 선승들에게 예의가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시인은 ‘아무런 물증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의 짓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상반되는 두 명제를 동시에 말하고 있다. 이 문장은 그냥 궤변이다. 물증이 없으면 침묵해야 한다. 물증이 없어서 피의사실을 유포하고 여론재판을 유도해 전 대통령을 자살로 몰고 간 검찰의 광태(狂態)와 무엇이 다른가. 시인들이 대개 논리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논리 너머의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지 논리에 미달하는 선동에 미사여구를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문학이 이렇게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 글 덕분에 플라톤의 에 나오는 저 유명한 ‘시인 비판론’을 떠올려야만 했다. 진리로부터 두 걸음이나 떨어져 있다는 ‘철학적인’ 이유로 시인을 타박한 것이라 알려져 있지만, 플라톤의 본의는 ‘정치학적인’ 것에 더 가까웠다. 감정에 호소하는 시가 그 강력한 영향력으로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면 “개개인의 혼 안에 나쁜 통치체제가 생기게끔 한다”(10권 605c)는 것, 그래서 결국 국가의 정체(政體)가 무너진다는 것이 ‘비판’의 깊숙한 이유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알랭 바디우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이 이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애써왔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일에서만큼은 플라톤의 말을 반박하기 어렵게 됐다. 시인은 북한을 공격해도 될 물증이 없어서 우울하지만, 나는 시인 비판론의 강력한 물증 앞에서 우울하다.

부기: 정호승 선생님께. 남의 허물을 탓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판을 즐기지 않는 편입니다. 하물며 인생과 문학의 선배가 그 대상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플라톤은 시인 비판론의 도입부에서 “어릴 적부터 호메로스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일종의 사랑과 공경” 덕분에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결국 그의 논지를 밀어붙입니다. “진리에 앞서 사람이 더 존중되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 할 말은 해야만 하겠네.” 제 마음이 그와 같습니다. 덧붙여, 설사 천안함을 박살낸 것이 북한으로 밝혀진다 해도 이 글을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글은 그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 발표되었으5니까요. 시인은 진실의 수호자이지 가설의 선동가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선생님과 더불어 다시 한번 46명 수병들의 명복을 빕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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