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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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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노인 되어 열무비빔밥 먹고파

제철 채소를 씹으며 식량위기·기후위기 속 불안 ‘실감’
등록 2024-09-13 17:37 수정 2024-09-19 09:39


불볕더위에 입맛을 잃었다가 템플스테이에 다녀온 뒤로 입이 터졌다. 여름 끝자락, 대한민국 3대 사찰 중 하나인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2박3일을 머물렀다. 평일에만 신청 가능한 휴식형 템플스테이로 2인실 기준 하루 7만원이면 삼시 세끼 먹여주고 재워준다. 그림 같은 가야산을 바라보며 쉬다가 시간 맞춰 공양간으로 가면 채식주의자인 내게 딱 맞는 식사가 준비돼 있다. 마요네즈에 버무린 반찬이 나왔던 걸 보면 완전 비건식은 아닌 듯 보이지만 그 어떤 식당보다 채식 친화적인 음식이 차려진다. 먹고 싶은 만큼 덜어 빈자리에 앉으면 공양간 곳곳에 붙어 있는 ‘묵언’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식사하는 동안 말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말소리가 없어도 밥과 반찬을 뜨는 소리가 꽤 소란하다. 적당한 소음 속에서 옆자리에 누가 앉든지 말없이 식사에 집중할 수 있어 내심 좋았다. 이 우주에 음식과 나만 남은 것처럼 식사에 집중하면 더 귀하게 여겨지고 맛이 좋다. 군더더기 없는 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일어나면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의식을 끝낸 기분이다. 사찰에서 보낸 시간이 5성급 호텔보다 만족스러웠다. 밤이면 에어컨 없이도 시원한 바람이 분다.

자신을 돌보는 일에 지쳤을 때 다른 사람이 차려주는 밥을 먹었더니 기운이 난다. 해인사에 다녀온 뒤로 힘차게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다. 비건식을 먹은 지 6년차가 되니 계절에 민감한 입맛이 되어 제철 채소나 과일만 먹는 경향이 생겼는데 이번엔 열무에 꽂혔다. 제철 열무는 풋풋한 향이 난다. 흐르는 물에 깨끗하게 씻은 열무를 3~4㎝ 크기로 잘라 미끈한 광이 나는 은색 양푼에 담는다. 뽀얗고 찰기 있는 쌀밥을 한 공기 쏟아 넣고, 자잘하게 썰어 파기름에 볶은 배추김치를 두 숟갈 크게 넣는다. 고소한 참기름을 크게 두 바퀴 둘러 숟가락으로 쓱쓱 비비면 새콤한 빨간색과 풋풋한 초록색이 고소한 기름과 함께 조화롭게 섞인다. 고추장 대신 볶은 김치를 넣어 맛이 더 깔끔하다. 세숫대야보다 조금 작은 양푼을 끌어안고 열무비빔밥을 먹고 있으면 ‘이게 행복이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분명 충만했던 행복 아래로 외면하고픈 불안이 깔린다. 이 제철 채소를 언제까지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작은 불안이자 식량위기를, 기후위기를 피해갈 수 있을까 하는 거대한 불안이다. 그저 망상이면 좋겠지만 이미 한국의 여름은 길어졌다. 기후가 바뀌어 내륙지역에서 애플망고가 재배된다. 오히려 내일을 낙관하는 일이 망상처럼 느껴지는 현실이다.

해인사에서 실컷 호강하고 돌아오는 길, 인근의 상가 단지를 둘러보며 마음 한편이 무거워진 것과 비슷하다. 해인사에서 보낸 시간이 마냥 좋았다고 말하기엔 외면할 수 없는 장면이 있었다. 텅 빈 주차장과 폐허의 기운이 감도는 건물들이 다시는 북적이지 않을 오래된 유물처럼 건조하게 늘어서 있었다.

수도권을 벗어난 뒤로 저출생과 지역 소멸이 현재의 위기라는 감각이 더욱 예민하게 살아났다. 빈 상가가 늘어나고 아이들이 줄어든다. 사람에겐 사람이 가장 필요하다고 여기는데 미래로 갈수록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

내게 무사히 노인이 될 기회가 있다면 어떤 세상을 보게 될까.

초식마녀 비건 유튜버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가 ‘남을 살리는 밥상으로 나를 살리는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4주마다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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