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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들을 가난한 자로 여기나

지그문트 바우만의 <새로운 빈곤>,
시장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면 가난한 자들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네
등록 2010-04-01 15:30 수정 2020-05-03 04:26
〈새로운 빈곤〉

〈새로운 빈곤〉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 중요할 때가 있다. 가난한 자는 왜 가난한가? 이 질문을 던져온 학자는 제법 있다. 대답은 얼추 정해져 있다. 실업·질병·장애·나이 등이 가난의 원인이다. 복지 시스템의 미비를 지적한다면 더 좋은 대답이 될 것이다.

폴란드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대신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가난한 자는 어떻게 가난한 자로 여겨지는가? 이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어떤 이를 가난하다고 여기는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질문을 바꾸면 새로운 눈을 얻는다. 바우만의 질문을 따라 (천지인 펴냄)을 읽으며 우리는 돋보기 대신 거울을 얻는다. 가난한 이를 들여다보는 돋보기 말고 ‘그들을 가난하다고 여기는’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 가난의 원인이 있다.

자본주의적 근대는 생산자의 사회다. 생산-노동-직업으로 이어지는 탄탄한 구조가 떠받치는 사회다. 가난은 비정상의 범주다. 일하지 않는 것은 비정상이다. 근대의 가난은 실업의 문제였다. 주어진 소명을 구현하기 위해 노동한다는 칼뱅주의의 신념 이래, 근대사회는 노동을 추앙했다. 노동이 윤리의 문제라면, 노동하지 않는 것, 즉 실업도 윤리의 문제다.

따라서 실업은 윤리적 차원에서라도 치유돼야 할 문제로 인식됐다. 복지제도는 이에 대한 경제적 해법이었다. 이런 접근은 근대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과도 잘 어울렸다. ‘예비 노동 인력’은 언제건 노동시장에 투입될 수 있도록 잘 준비돼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는 비용을 치렀다. 가난한 자들이 노동시장에 돌아올 수 있도록 보살폈다. 그때의 ‘우리’는 생산하고 노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1970년대 미국 정치인과 기업인들은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인간은 정말 노동하는 존재인가? 미국인들은 스스로를 생산자로 여기지 않았다. 인간은 ‘모험’하는 존재이고, 현대의 인간은 특히 ‘기업’하는 존재다. 기업(모험)하는 존재에게 노동은 가치가 아니라 수단이다. 최종 목표는 자유다. 더 행복하고 부유한 자유를 위해 시장의 여러 도전을 헤쳐나가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태도가 미국인들 사이에 번졌다. ‘프로테스탄트적 자본주의 정신’의 고향인 경건한 유럽에도 이런 태도가 전염됐다. 이에 따라 또 다른 질문이 등장했다. 어떻게 하면 더 자유로울 수 있는가?

더 많이, 더 빨리 소비하면 된다. 짜릿한 체험을 수시로 경험하며 삶의 다양한 국면을 누리면 된다. 이것이 70·80년대 이후 세계 자본주의가 내놓은 답이다. 이때로부터의 세계를 지그문트 바우만은 ‘새로운 근대’ 또는 ‘탈근대’라 부른다. 그것은 생산자 사회가 소비자 사회로 변경되는 경계다. 여기서 자유는 끊임없이 선택하는 것이다. 생산자 사회에선 누구건 일해야 했다. 소비자 사회에선 누구건 소비해야 한다. 생산하지 않는 자가 빈자였다면, 이제 소비하지 않는 자가 빈자다. 가난을 정의 내리는 방식에 결정적 변화가 생긴 것이다.

탈근대사회에선 생산자의 확보가 아니라 소비자의 확보가 중요하다. 이제 가난은 구제의 대상이 아니다. 바우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역사상 처음으로 빈곤층은 근심과 골칫거리가 됐다.” 탈근대사회에선 ‘실업’ 인구를 ‘잉여’ 인구로 본다. 이미 상품이 과생산되는 체제에서 이들을 노동시장에 다시 끌어들일 이유가 없다. 이들은 소비를 위한 지불능력도 없으므로 그저 ‘잉여의 인간’이 된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역설적이게도 ‘복지 세대’가 이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복지제도 덕분에 경제 자립을 일군 70년대 이후의 중산층은 스스로 인생을 선택한다는 소비자 사회의 모토에 가장 열렬히 환호했다. 그리고 복지제도를 걷어차버렸다. 생산자 사회의 가장 큰 수혜자인 중간층이 생산자 사회를 배반해버린 것이다.

바우만이 내놓는 대안이 있다. 노동과 노동시장을 분리하고, 소득 자격과 소득 능력을 분리하는 것이다. 복잡하게 들리지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실직자에게도 기본소득을 보장하라는 이야기다.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갈 기본 조건을 마련하는 차원에서 소득을 지불하면 된다. ‘우리’가 시장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면,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아도 된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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