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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증시라면 폐장하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월호,
‘투기에 빠진 증시’ ‘직업이 좌파인 진보 진영’ ‘피사로의 참여예술’ 등 다뤄
등록 2010-02-10 15:33 수정 2020-05-03 04:25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월호

‘증시를 폐장하라.’

(이하 ) 한국판 2월호의 표지 기사 제목은 자극적이다. 프레데리크 로르동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연구팀장은 “지난 2년간 전세계를 뒤흔든 경제위기를 겪으며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주식시장은 더 이상 “잉여자금을 투자할 곳을 찾는 경제주체(예금자)와 자본을 필요로 하는 경제주체(기업)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이상적 형태의 매개기관”이 아니란 점이다.

주식시장은 활기, 실물경제 자금 조달은 궁지

기업이 조달하는 자금보다 배당금 등으로 주주가 가져가는 자금이 더 많아졌다. 기업이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자금을 대주고 있는 꼴이다. 주가가 올라가고 주식시장은 활기를 얻지만, 실물경제에 대한 자금 조달은 점점 힘들어지는 모순적 상황은 그래서 발생한다. 이미 미국에선 주식시장의 실질적 자금 조달 기여도가 마이너스가 됐단다. 기업은 이제 다른 곳에 가서 자금을 융통하고, 증시를 지배하는 건 돈을 벌겠다는 ‘고삐 풀린 욕망’뿐이다. 로르동 팀장은 “투기의 마당으로 바뀐 증시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다른 경제 영역과 완전히 단절된 채 작동하고 있다”며 “투기의 장이 아닌 자본 조달 제도로서의 주식시장은 그 존재 이유를 잃게 됐다”고 강조했다.

특집으로 꾸민 ‘진보좌파의 길’에선 프랑스와 미국의 좌파 진영을 둘러본 뒤, 우리 진보 진영의 나아갈 길을 따져 물었다. 알렉산더 제빈 미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는 연구 역량도 없이 언론만 앞세워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 골몰하는 프랑스의 좌파 싱크탱크를 ‘직업이 좌파’라고 비판했다. 매카시즘을 이겨낸 질긴 생명력과 민권·반전 운동이란 강력한 대중투쟁을 이끌었던 미국의 진보 진영이 정치 세력화에 실패하면서 1980년대 이후 급격히 ‘박제’가 돼가는 과정은 훌륭한 반면교사다. 자유기고가 한윤형씨는 이렇게 사색했다.

“분명한 것은 (촛불시위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적 시민의 욕망과 자본주의를 벗어나려는 좌파의 욕망이 대화하고 섞이는 곳에서 좌파는 대중의 신뢰를 얻기 위한 단서를 얻게 되리라는 것이다. 좌파는 자신이 대중과 다르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대중과의 소통을 도모해야 하지 않을까?”

마리 베닐드 언론비평 전문기자가 쓴 인쇄(종이)매체의 미래에 대한 분석 기사는 ‘비관적인 낙관론’으로 읽힌다. 그의 지적대로, 요즘처럼 수많은 매체를 통해 ‘정보 이용’이 가능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반면 ‘정보 생산’은 최악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온라인 유료화’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지만, 그 또한 예측 불허다. 베닐드 기자는 ‘정보의 공공재적 개념’이 확산되는 데서 희망을 발견한다. 그는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말을 따 “언론 생산물의 운영을 시장의 손에 맡긴다는 생각은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썼다.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선별적이다.” ‘빛의 화가’로 알려진 인상파의 거두 카미유 피사로(1830~1903)의 잊혀진 ‘참여예술’을 들춰낸 기사도 흥미를 끌 만하다. 인상주의 화가의 7차례 공동 작품전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유일한 인물로 알려진 피사로를 정치 참여 화가로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게다. 는 “이번에 새로 편집돼 나온 그의 작품집 에서 피사로는 그의 섬세한 예술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투박한 민중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며 “인상파 기법에 리얼리즘을 결합해 투쟁하는 민중을 그려냈다”고 평했다.

아이티의 ‘강요된 재앙’

이번호에도 지구촌 구석구석의 소식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 역사학자 크리스토프 와르그니는 ‘제국주의를 몰아낸 노예들의 국가’에 가해진 외세 침탈의 역사와 매판세력·정치폭력·자연재해에 시달리다 끝내 최악의 참극을 겪게 된 아이티의 ‘강요된 재앙’을 세밀하게 풀어냈다. ‘가시밭길’을 앞에 두고도 더디지만 한 걸음씩 나아가는 아프리카 각국의 독립 50주년을 점검한 기사도 눈길을 끈다. 이 밖에 미국의 대리전을 벌이는 파키스탄 정부와 전투 자체가 목적이 된 탈레반의 ‘출구 없는 분쟁’에 대한 특파원의 보고도 묵직하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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