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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했던 진 선생님

가지지 못한 자의 ‘편향된’ 시각으로 쓴 <미국민중사> 등을 남기고 떠난 하워드 진
등록 2010-02-04 11:23 수정 2020-05-03 04:25

미국 진보 진영의 큰 별이 졌다. (국내판 이후 펴냄) 등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하워드 진 보스턴대 명예교수가 1월27일 숨을 거뒀다. 향년 87살. 등 외신은 그가 여행지인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에서 수영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킨 뒤 회복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작가이자 언론인인 나오미 클라인은 진보적 인터넷 매체 가 마련한 추모 방송에서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교사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네이팜탄을 퍼붓던 시절

〈미국민중사〉

〈미국민중사〉

하워드 진은 1922년 8월24일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유대계 이민 2세대로 태어났다. 1940년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18살 나이에 조선 노동자가 됐고, 이 무렵 그의 독서 목록엔 카를 마르크스가 더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불을 뿜던 1943년 젊은 진은 “파시스트와 맞서 싸우기 위해” 입대를 결심한다. 유럽 전선에 배치된 그의 주특기는 ‘폭격수’였다. 종전이 다가오던 1945년 4월 중순 프랑스 루아얀 지방에서 나치 잔당 소탕을 명분으로 사상 첫 네이팜탄을 퍼부었던 경험담은 을 포함한 그의 책에서 유독 자주 등장한다.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우리는 좋은 편이고 적은 나쁜 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무슨 짓이든 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믿는다. …하늘에선 지상의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폭격이 만들어낸 유혈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무슨 짓이든 저지르게 된다.”

군 복무를 마친 뒤에도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는 양조장에 취직을 했고, 브루클린의 지하 셋방을 전전했다. 그러다 운 좋게 공공임대 주택을 얻게 됐고, 내처 제대군인 장학금을 받아 뒤늦게 대학에 진학하기에 이른다. ‘우리가 아는 하워드 진’ 탄생의 서막이었다.

1951년 뉴욕대를 졸업한 그는 컬럼비아대학으로 무대를 옮겼다. 석사학위 논문에서 1914년 콜로라도주 탄광 파업 사건을 추적한 그는 대공황의 끝자락에서 뉴욕시장을 지내며 ‘뉴딜 시대’를 이끌었던 피오렐로 라가디아의 정치와 삶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써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56년 학위를 마친 그는 ‘흑인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 기관’으로 유서가 깊은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스펠먼대학에 둥지를 틀었다.

당시 미국 남부를 휩쓴 민권운동의 열정 속에 진은 ‘활동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학교 당국은 그런 그를 못마땅해했다. 1963년 그를 해고하면서 앨버트 맨리 당시 총장은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다”는 점을 이유로 거론했단다. 이듬해 그는 동부의 명문 보스턴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관심도 ‘민권운동’에서 ‘반전운동’으로 서서히 옮겨갔다.

하워드 진. 연합/AP

하워드 진. 연합/AP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과 1968년, 그는 반전 메시지를 담은 와 를 잇따라 펴냈다. 이후 희끗희끗한 머리에 사람 좋게 웃는 그의 모습은 각종 시위 현장에서 단골이 됐다.

1980년은 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취임으로 시작됐다. 미국 사회가 급격히 보수화하던 그 무렵, 진은 자신의 대표작인 를 펴냈다. 15세기 말 바하마제도에 도착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원주민인 아라와크족을 어떻게 살육했는지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기존의 역사관을 송두리째 뒤집어놓으며 밀리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 “편향된 시각”이란 비판이 나올 때마다 진은 이렇게 대꾸하곤 했다.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가진 자 편에서 기술돼왔다. 나는 소외된 이들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봤을 뿐이다.”

달리는 그의 인생에 중립은 없었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그는 사회적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티의 대지진을 바라보며 “야만적이고 불의한 미국의 정책이 아이티 비극의 뿌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취임 1주년을 맞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는 “그저 평범한 대통령에 그칠 공산이 큰데, 위기의 시대에 그런 대통령은 위험하기까지 하다”며 “그를 올바른 쪽으로 견인하는 건 오로지 시민의 몫”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인생은 ‘달리는 기차’였고, 그에게 ‘중립’이란 있을 수 없었다. , 자서전 제목이 꼭 그의 삶이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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