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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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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의 판타지, ‘여’배우의 리얼리티

페이크 다큐멘터리 <여배우들>을 통해 본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로 산다는 것’
등록 2009-12-10 14:43 수정 2020-05-03 04:25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신의 경지에 오르는 일일지 모른다. 예쁘고, 성격 좋고, 연기 잘하며, 사생활까지 무결점이어야 사랑받는다. 영화 의 대사를 빌리자면 “독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숱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상황을 견디면서 스타로서 꼿꼿한 자존심도 지켜야 한다.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여’배우와 여‘배우’의 틀에서 끊임없이 평가받으며 살아야 한다. ‘박수’와 ‘돌멩이’를 동시에 받는 정신분열적 상황이 반복되는 삶. 이게 배우라는 직업을 택한 여성들이 지고 있는 십자가다.

〈여배우들〉

〈여배우들〉

속마음은 “이 화보 왜 찍는다 했지?”

‘여배우 여럿의 화보를 찍을 때는 절대 서로 만나지 않게 시차를 둘 것.’ 패션계에 전해지는 오래된 불문율이다.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데 익숙한 여배우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나눠 쓰게 될 때 당황한다. 상대방보다 주목받지 못하면 예민해진다. 그래서 “여자들은 모여도 여배우들은 모이지 않는다”는 말도 나온다. “세상엔 남자와 여자, 여배우가 있다”는 누군가의 정의도 오버가 아닐지 모른다.

영화 도 여배우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했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2008년 크리스마스이브. 패션지 화보 촬영을 위해 20대부터 60대까지 각 세대를 대표하는 6명의 배우들이 모인다.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나눠 쓰는 데 익숙지 않은 이들은 예상된 기싸움을 벌인다. 패션계의 불문율을 깬 새로운 시도가 스튜디오를 발칵 뒤집어놓을 분위기다. 여정은 자신이 섭외 1순위가 아닌 것 같아 찜찜하고, 현정은 도도한 지우가 못마땅해 시비를 건다. 막내 옥빈은 누구부터 선생님이고 누구까지 선배님으로 불러야 할지 호칭부터 막막하다. 어색한 기류 속에 모두들 속으로 생각한다. “이 화보를 왜 찍는다고 했을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어려운 ‘페이크 리얼리티’ 영화 은 여배우의 이미지 가면을 벗겨내고 누구나 알지만 몰랐던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연인, 엄마, 누이 등 모든 여성을 품고 사는 여배우들의 얼굴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연기를 하는 건지, 그냥 나를 보여주는 건지 헷갈렸다”는 배우들의 얘기 속에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여배우들의 씁쓸한 고백이 담겨 있다.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데 익숙한 여배우들은 한 자리에 모이자 미묘한 신경전을 펼친다.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데 익숙한 여배우들은 한 자리에 모이자 미묘한 신경전을 펼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자연의 섭리인데 여배우에게 이 자연의 섭리는 재앙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맡을 수 있는 배역의 제약이 심해진다. 스타덤의 기한이 남자배우에 비해 짧은 편이다. 꽃다운 나이를 지나면 자신의 열정과 인생 경험을 쏟아 부을 작품이나 캐릭터를 만나기 어렵다. 여배우에게 젊음과 참신함을 기대하는 남성적인 시각이 팽배한 영화판에서 여배우들이 세월을 두고 쌓은 경험과 재능은 제작비에 부담만 주는 요소일 때가 있다. 영화판보다 사정이 낫다는 텔레비전도 다르지 않다. ‘국민 엄마’로 불리며 연기력을 인정받는 중년 여배우도 드라마에서 맡는 역할이 아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못된 시어머니에 국한될 때가 많다. 영화 처럼 중년의 여배우를 톱으로 내세우는 과감한 실험은 보기 드물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40대 이상의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며 ‘상상력의 부재’를 꼬집었다.

사정이 이런데 대중은 캐릭터의 부재를 연기력을 넓히지 못한 배우 탓으로 돌리기 일쑤다. 이미숙도 “나이는 누구든지 다 먹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여배우들은 나이를 평가받으면서 먹어야 하는 건지. 그런 게 너무 괴로운 거지”라며 영화 속에서 하소연할 정도다. 윤여정은 “노배우가 됐기 때문에 후배들 예쁜 거 바라보는 것을 즐겁게 할 수 있다”며 달관한 경지를 보이면서도 자존심을 다치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배우가 직업인 여자는 여‘배우’가 아닌 ‘여’배우여서 슬프기도 하다. 여배우에게 사랑과 결혼은 사치이던 시절이 있었다. 문화방송 에 출연한 고 최진실은 “여배우였기 때문에 20대의 나는 내 사랑에 당당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1990년대 광고모델로 전성기를 구가한 그의 계약서엔 사전 통보 없이 스캔들이나 결혼 소식이 나가면 광고 제품의 이미지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계약금의 3배를 물어내도록 돼 있었다. 제품 홍보모델도 사람이 아닌 제품처럼 다뤄지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혼으로 방송 금지당한 윤여정, 눈물짓는 고현정
한국의 여배우들은 숱한 호사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상황을 견디면서 스타로서 꼿꼿한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 <여우비>에 출연해 여배우의 삶을 고백하는 배우들. SBS 제공

한국의 여배우들은 숱한 호사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상황을 견디면서 스타로서 꼿꼿한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 <여우비>에 출연해 여배우의 삶을 고백하는 배우들. SBS 제공

현재라고 다를까. 대중은 스타의 사랑과 결혼을 축복해주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불발로 끝난 스캔들과 이혼에는 너그럽지 못하다. 윤여정은 “이혼 때문에 2년간 방송 금지를 당했다”며 “이혼이 주홍글씨가 됐다”고 말한다. 그때까지 활기차게 떠들던 고현정도 그답지 않게 젖은 목소리로 “지금도 그런 분위기가 있지 않아요?”라며 영화 속에서 눈물을 흘린다. 이미숙의 눈에도 눈물이 맺힌다.

일과 가정을 동시에 돌보는 일은 ‘여’배우들에게 큰 짐이다. 가정 때문에 일에 소홀해지면 여배우로서 게으른 자신을 자책하고, 일 때문에 가정에 소홀해지면 엄마로서 자격 없는 자신을 자책하게 된다. 여배우와 엄마로서 살아가는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고민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에서는 한 여배우가 “끝없는 죄책감뿐”이라고 말한다. 강병진 기자는 “여배우들의 고민은 비슷할 텐데 한국의 여배우가 더 힘든 건 한국이 그만큼 여성이 살기 힘든 환경이어서”라고 풀이했다.

에 등장하는 선배들과 달리 여배우라는 직종이 오해 없이 자리잡을 수 있는 세대에 속한 김민희는 그래서 특별해 보인다. “여배우들이 사생활을 잘 드러내지 못하고 사는 부분이 많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냥 제 사적인 생활도 즐기고 공적인 일도 즐기는 그런 자유로운 여배우가 되고 싶어요.” 의 수영복 화보가 싫었던 윤여정·이미숙과 달리 패션지 화보 촬영을 즐길 수 있는 세대인 그는 시대와 함께 변화해온 여배우라는 직종의 특성을 대변한다. 김민희처럼 체계화된 매니지먼트 시스템에서 길러진 임수정, 신민아 등은 배우를 직업으로 즐기는 세대의 탄생이다.

60대 윤여정과 20대 김민희 사이에는 전도연, 김혜수, 송혜교 등 다양한 매력을 뽐내는 여배우들이 많아졌다. 여배우 3명이 모든 작품을 선점하던 트로이카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개성이 다른 21세기형 여배우들이 척박한 시장에서 무한경쟁을 하는 중이다. 이들은 ‘여자’로서의 자존심과 ‘배우’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스스로와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드라마 에서 극중 여배우로 분한 김자옥이 “사람 도리도 못하고 사는 게 배우”라고 했던 표현을 이겨내는 노력을 해나가는 중이다.

‘여배우’라는 판타지와 ‘배우가 직업인 여자’라는 리얼리티 사이를 경쾌하게 오가는 영화 은 주인공인 6명의 배우들이 이재용 감독과 함께 공동 각본에 이름을 올렸다. 진짜 삶과 경험에서 터져나오는 공감 가는 이야기는 그들이 자신을 내보였기에 완성됐다. 다양한 세대의 여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벌어질 법한 상황을 통해 여배우들 사이의 미묘한 알력과 신경전을 드러내는 영화는,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모두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소통의 파티로 선회한다. 도도한 한류스타 최지우가 못마땅했던 고현정도, 여배우 위계구조에서 막내로서의 본분을 다하려 애쓰지만 쉽지 않았던 김옥빈도 스타이기 전에 인간관계에 서툴고, 질투에 휩싸이고, 쉽게 상처받는 한 명의 인간으로 그려진다.

“보통 여자와 똑같이 힘들어해”

SBS의 한 드라마 PD는 “여배우는 누리는 게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얘기를 해보면 보통 여자들이 겪는 똑같은 문제로 힘들어하더라”며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고 레드카펫 위에 서 있는 모습만 보지 말고 우리와 똑같이 울고 웃는 사람으로 여배우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문정희 인터뷰
“배우는 일 없어도 카페 알바를 못해요”


배우 문정희. 한겨레 자료

배우 문정희. 한겨레 자료

지난 3월 방송된 SBS 스페셜 (이하 )은 영화 의 인터뷰판이라고 봐도 좋다. 는 결혼을 앞둔 여배우 문정희가 인터뷰어가 돼 20여 명의 여배우를 만나 스포트라이트 뒤에 감춰진 여배우들의 고민을 들어보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미모와 나이에 밀려 맡을 수 있는 배역이 줄어드는 현실, 육아와 일을 병행해야 하는 슈퍼맘의 어려움, 선택받아야 일을 할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환경 때문에 겪는 생계의 어려움까지, 화려해 보이던 여배우들의 일상은 일반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과 비슷했다. 의 로잔나 아퀘트처럼 여배우들의 삶이 궁금했던 문정희에게 프로그램 뒷이야기와 그가 여배우로 사는 법을 물었다. 문정희는 드라마 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연극배우의 꿈을 키우는 남유희로 출연한 10년차 배우다.

의 공동연출을 맡는 등 프로그램 제작에 깊이 간여했는데.
결혼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어서 일과 결혼생활을 다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단순 호기심과 궁금증을 넘어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배우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여자는 모여도 여배우들은 잘 모이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서로 은근히 경계하는 분위기가 있다. 속 깊은 얘기를 잘 하지 못한다. 주위 시선 때문에 남자들처럼 술자리에서 자유롭게 어울리지 못한다. 배우들끼리 소통의 문제를 겪기도 한다.
당시 인상 깊었던 인터뷰 내용은.
연예인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인 경우가 많다. 특히 배우는 선택받아야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일이 없을 땐 생계의 곤란을 겪는다. 배우 조은숙씨가 돈이 없어 카페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갔는데 사람들이 알아봐서 일을 구하지 못했다고 하더라. 배우는 일이 없을 때도 배우라고 얘기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그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신인 여배우들이 이 때문에 유흥업소 등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여배우로서 가장 힘든 점은 뭔가.
배우는 대중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하지만 배우란 직업으로 인해 내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질 땐 대중의 관심이 부담스럽다.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로 사는 것이 힘든가.
꿈꾸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전문성을 갖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배우가 되면서 늘 나를 다잡고 살 수 있어 행복하기도 하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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