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국가, 공권력 개입의 최소화, 관료제의 경직성 타파….’ 1980년대 초부터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공공 부문 ‘혁신’을 추진하면서 떠오른 이른바 ‘신공공관리론’의 모토다. 이미 우리에게도 일상이 됐다. 정부와 공공기관에는 어김없이 평가제와 계약제가 도입된다.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서다. 공공서비스의 ‘효율’을 위해선 민간 경영기법도 과감하게 도입해야 하고, 국가 재정도 ‘합리’적으로 지출해야 한다. 혁신·경쟁·효율·합리가 만들어낸 국가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하 ) 한국판 12월호가 표지 기사에서 물은 질문이다.
위기 때는 국가에 손 내미는 자본사회학자 로랑 보넬리와 윌리 펠르티에는 “전반적으로 공공정책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부피 줄이기는 근본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이처럼 국가의 부피를 줄이는 데는 공적 영역의 ‘군국주의화’라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운동이 수반된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국가의 모든 활동이 기업의 재무제표와 비슷한 회계 논리로 축소되는 한편에서 위계질서를 강요하고 공공서비스 인력에 대한 통제와 명령 체계를 강화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방임주의 병역국가’다. 그 나라에서 “세금을 인상하면서까지 재정 상태의 균형을 맞추려 했던” 보수 진영은, 이제 “의식적으로 공공 적자를 만들어내며 정부의 사회복지 개입을 무력화”하고 있다. 무한경쟁이 만들어낸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뒤처진 이들을 보듬는 것은 ‘도덕적 해이’로 매도된다. 그러나 팽창과 축적의 시기에 국가를 그토록 배척했던 자본도, 위기의 찬바람이 불어오면 어김없이 국가를 향해 빈손을 들이민다. 혁신·경쟁·효율·합리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데는 ‘대마불사론’이면 족하다.
“막대한 공적자금이 투입된 덕에 은행들은 본연의 색을 되찾았다. 은행들은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힘들었던 위기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양상이다. 다음에도 또다시 이런 위기가 발생할 경우, 은행들은 정부를 ‘볼모’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 세르주 알리미 프랑스판 발행인은 “이제 은행들의 도산은 교묘하게 유보됐으나, 이번에는 예산 부족과 수익성이라는 이름 아래 각 정부의 공공 예산들이 대폭 축소되고 있다”며 “경제위기로 더욱 무거워진 부채 비중이 이번에도 사회복지와 공익사업 폐기의 구실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썼다. 방임주의 병영국가, 그들만의 나라인 게다.
그런 나라에서 담론을 지배하는 건 국가다. 종종 대중의 역량 강화와 사회적 통합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대중의 주체적 자율성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분할통치에 의한 내적 분열과 사회적 배제만 난무하기 마련이다. 19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이 구사한 사회통제 시스템, 곧 국가동원 체제가 21세기에 요란하게 부활했다. 오경석 한양대 다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최근 2~3년 새 놀라운 속도로 유행처럼 번지며 우리 사회의 주류 담론이 된 ‘다문화주의’에서 새마을운동을 떠올렸다.
특집으로 다룬 코펜하겐 기후변화 정상회의 관련 기사에서 리카르도 페트렐라 스위스 USI 건축학교 교수는 ‘시장제일주의’보다 강력한 ‘미국제일주의’의 해악을 통박했다. 페트렐라 교수는 “미국은 그동안 자국의 사회 모델이나 ‘안전’(곧 ‘세계의 안전’)의 우위를 내세워, 자신들의 정치적 선택이나 생활 방식은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제국주의적 일방주의 정책을 시행해왔다”고 지적했다. 이번엔 다를까? 페트렐라 교수는 비관적이다.
사무실의 일상적 업무가 된 전쟁이 밖에 언론인 로랑 세콜라·에두아르 플림린은 ‘극단의 20세기’를 지나온 인류가 21세기에도 여전히 마주한 극한의 폭력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폭격을 퍼붓는 곳에서 몇천km나 떨어진 미국 네바다의 크리치 공군기지에서 중앙정보국(CIA) 요원이 컴퓨터 자판과 조이스틱을 사용해 무인항공기를 조종한다. 전투원의 최종 행위, 곧 ‘죽음을 안기는 방법’이 완전히 바뀌었다. 전쟁은 사무실의 일상적 업무, 게다가 비디오게임이 돼버렸다.” 모니터는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다. 야만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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