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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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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공습한 ‘아메리칸드림’

신자유주의 물결 타고 유럽 내 미국화 가속…
겉으로 미국 반대하면서도 열심히 영어 배우는 이중적인 현실
등록 2009-11-12 11:12 수정 2020-05-03 04:25

올해 여름 학회 참석차 들렀던 독일 쾰른의 풍경은 나를 다소 놀라게 만들었다. 미국식 카페로 단장해 있는 하이스트리트에서 뉴욕이나 서울과 유사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10여 년 전 처음 독일을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이런 변화는 좀 생경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2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거치면서 새롭게 건설된 쾰른이라는 도시가 갖고 있는 특수성도 한몫했겠지만, 쇼핑몰과 고급 카페로 가득한 거리의 풍경에서 독일 특유의 ‘보수주의’를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유럽적인 것은 지속 가능한가. 유럽의 가수들도 영어로 신곡을 발표하고, 유럽의 젊은이들은 스타벅스에 열광한다. 프랑스 파리의 한 스타벅스 지점 앞에 줄지어 선 사람들. 로이터

유럽적인 것은 지속 가능한가. 유럽의 가수들도 영어로 신곡을 발표하고, 유럽의 젊은이들은 스타벅스에 열광한다. 프랑스 파리의 한 스타벅스 지점 앞에 줄지어 선 사람들. 로이터

“유럽 여행 땐 현지어 써야”는 옛말

여하튼 독일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여행자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나를 낯설게 만들었이다. 영국에서 공부했던 나에게 독일을 포함한 유럽의 이미지는 ‘영어를 쓰기에 불편한’ 나라들이었다. 그래서 학회 발표차 유럽 어느 국가를 여행할라치면, 간단하게나마 해당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포켓판 사전이나 외국어 안내서를 구비하는 것이 필수였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이런 나의 기억과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물론 나의 경험이 지엽적이고 한정적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미약할지언정 분명히 변화는 감지할 수 있었다. 영국의 경우도 샌드위치 가게만 눈에 띄던 거리에 맥도널드의 노란 간판이 선명하고, 영국 체인점 커피레볼루션이 있던 자리에 스타벅스가 들어선 풍경을 목격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프랑스 퐁피두 광장에 스타벅스가 들어왔을 때, 언론들은 앞다퉈 이 상징적 사건을 보도했지만, 이제 유럽에서 ‘미국’을 발견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은 분명히 1990년대와 뚜렷하게 다르다. 1993년 는 유럽에서 미국 문화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윌리엄 슈미트의 기사를 실었다. 슈미트의 기사는 페터 슐트라는 독일 청년을 예로 들면서, “젊었을 때는 미국제라는 이유만으로 신발이나 음반을 사곤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유럽 문화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요지의 발언을 소개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미국 문화를 더 이상 유럽의 젊은이들이 즐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인데, 오늘날 이 기사를 다시 읽어보면 슈미트의 기사는 지금 현실과 보기 좋게 빗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문화는 오늘날 유럽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부정하기 어려운 존재감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슈미트의 기사에서 거론하는 유럽 문화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이 완전히 소멸했다고 말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와 사뭇 다른 정서가 유럽에 흐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대중문화의 변화이다. DVD 대여점과 매장을 가득 메운 미국 드라마의 인기는 최근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겉으로 미국을 비판하는 그리스 젊은이들이 나 을 즐겨 보는 모습을 나는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문화의 형식이다. 형식을 장악하는 문화가 정서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내용이 유럽적이라도 그 형식이 미국적이라는 것은 미국 문화의 영향력을 실감하게 만든다. 이탈리아인의 사랑을 표현하는 음악 양식이 미국의 댄스뮤직이라면, 상황은 더욱 자명해진다.

미국 문화는 전후 유럽에서 미국의 존재감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심지어 미국은 미국 문화의 보급을 중요한 외교 전략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1980년대 이후 본격화한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재편의 과정은 미국의 대중문화를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소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미국의 대외정책이나 미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목소리와 별도로, 미국의 문화상품은 유럽의 젊은이들을 유혹했던 것이다.

‘문화의 형식’ 선점한 영어· 미국문화

유럽 통합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개최하는 유럽가요제에서 노랫말이나 사회자 진행의 공식어는 바로 영어다. 동유럽의 가수들이 서툰 영어로 노래를 부르고 어색한 악센트로 인터뷰를 하는 광경은 흔한 일이다. 영어라는 공통 언어와 미국 문화라는 공통 감각을 매개로 유럽은 ‘통합’ 중인 셈이다. 영원한 좌파의 고향이라는 이미지를 과시했던 프랑스에서 사르코지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이와 같은 일련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이런 사실을 적시하면서, 프랑스가 대외적으로 급진주의의 조국인 것처럼 비쳐졌지만, 사실은 장구한 보수주의 역사를 가진 나라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어떻게 보면 바디우의 생각은 ‘자기반성적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지금 유럽이 처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암시해주기도 한다. 바디우의 말을 비틀어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결국 지금까지 프랑스라는 ‘국가’가 보여준 상대적 진보성은 미국에 대한 거부나 부정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로 진입하던 무렵에 유럽의 지식인들이 복지국가라는 ‘유럽적 가치’에 대한 옹호를 주장하고 나섰을 때, 상황은 그 주장보다 더 복잡했던 셈이다. 미국의 문화에 내재한 특징은 세계체제의 변화를 가장 민감하고 효과적으로 문화적 코드로 변환시켜 보여준다는 사실에 있다.

통해 유포되는 영미식 감각 체계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영국 문화산업과 미국 문화산업의 공조 체제다. 영국의 J. K. 롤링이 를 쓰면 미국의 할리우드는 영화를 만든다. 롤링의 는 영어 배우기 붐을 타고 유럽 전역을 휩쓸고, 영국식 애국주의는 19세기 제국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미화한다. 그리고 라는 문학적 장치를 통해 만들어진 영미식 감각의 체계는 미국 대중문화의 논리를 수용하게 만드는 하나의 프로토콜 노릇을 하는 것이다. 영국의 외교 전략이 문화 전략과 행복하게 조우하는 광경을 우리는 여기에서 목격할 수 있다.

미국의 비평가 조너선 애럭이 이런 문제를 고찰하는 글을 에 기고한 적이 있었는데, 이런 상황은 흥미롭게도 유럽에 내재한 미국 문화를 대하는 이중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이중성이라는 것은 겉으로는 미국을 반대하면서, 실제로는 취업이나 경력 업그레이드를 위해 영어를 열심히 배우려는 유럽인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지난 10여 년간 유럽 젊은이들의 꿈은 미국 월가로 진출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한 필수 항목이 바로 영어였다. 유럽 통합의 조건은 공식 언어를 영어로 채택하는 순간 이정표를 확실히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93년 의 슈미트가 예측했던 유럽 문화의 귀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유럽을 지배하는 것은 거대한 미국식 쇼핑몰과 카페들, 그리고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미국 드라마들이다. 아메리칸드림은 이렇게 유럽에서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미문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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