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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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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도 매체도 버린 중간필자

‘자유로운 문필가 집단’ 바싹 마른 출판계를 위한 제언…
필요한 것은 ‘아이템’이 아니라 ‘콘셉트’
등록 2009-09-16 18:53 수정 2020-05-03 04:25
한국에서 중간필자로 성공하려면 학계에서 ‘경계성 혼란’을 겪거나 매체 기자로서 가외의 심각한 노력을 들여야 한다. 한 서점의 인문학 코너.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한국에서 중간필자로 성공하려면 학계에서 ‘경계성 혼란’을 겪거나 매체 기자로서 가외의 심각한 노력을 들여야 한다. 한 서점의 인문학 코너.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한국 인문사회 출판에는 ‘중간필자’, 즉 저술을 주업으로 삼는 자유로운 문필가 집단이 형성돼 있지 않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대학의 인문학이 고사 상태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상상력과 자의식을 먹고 사는 학문인데, 지금 대학에서 이뤄지는 인문학 연구의 80%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고증학·통계학·교육학·족보학 넷 중 하나다. 이들의 공통점은 일정한 ‘공식’에 따라 이뤄지는 연구이기 때문에 품만 들이면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18%는 인문학을 표방하지만 싱겁거나 외곬이라서, 그 연구 결과물을 읽고 나면 “에라~ 그래, 혼자 놀아라” 하는 마음이 든다. 그리고 남는 2%가 그나마 읽을 만한 논문을 생산해내는데, 그들은 대학 내에서 열심히 ‘왕따’당하다 결국 입지 구축을 포기하고 대충 한 발만 걸쳐둔 채 밖으로 나온다. 그 경계성 혼란을 인문학으로 승화시켜 대중적 성공을 거두는 이들이 현재 한국의 중간필자다.

‘미국식’과 ‘기지촌 지식인 기질’이 결합한 학계

둘째는, 매체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탐사보도를 하는 언론이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에 매체에서 뽑아져나오는 인문학이 거의 없다. 고만고만한 연재물이 대부분이다. 인문학을 기반으로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고 대중의 지적 관심을 강하게 집약시키는 해외 저술들은 절반 이상이 저널리스트가 쓴 것들이다. 베트남전의 실상을 밝혀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저널리스트의 유작 란 책이 최근 나와서 이목을 끌었는데, 이는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한국전쟁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생생하게 묘사한 책으로 남을 것이다. 전쟁의 원인, 구조, 경과 등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읽는 사람이 진짜 폭탄 터지는 소리를 듣고, 다리가 잘리는 아픔을 느끼게 하는 능력도 중요하다. 현장에서 10년 이상 지독하게 훈련받고 직업상 방대하게 독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저널리스트들이야말로 학자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기발한 방식으로 ‘글감’을 구상하고 실천할 수 있다.

그동안 간혹 중간필자에 대한 논의들이 있었는데, 아쉬운 것은 ‘전문가-중간필자-대중’으로 너무 구획지어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이런 논의 구조에서는 학계가 지리멸렬하니 중간필자라도 잘해주면 좋겠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학계는 무시하고 대중을 선도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근본을 잘못 보는 것이다. 나는 중간필자를 ‘흘러넘침’ 현상으로 본다. 학계와 언론을 포함한 전문가 집단이 질적·양적으로 흘러넘쳐서 이뤄지는 중간필자야말로 ‘상업성’과 ‘개인적인 이유’ 등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정확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흐르기는커녕 바싹 말랐다.

학계는 에서 조우석 문화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미국식 시스템’과 ‘기지촌 지식인 기질’이 결합해서 아주 가관이다. ‘군단’급 학회를 제외한 중소 규모의 학회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비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학술지 논문의 구색을 맞추느라 아는 사람들에게 논문 한 편만 보내달라는 ‘강제성’ ‘구걸성’ 전화를 돌리느라 바쁘고, 젊은 학자들은 2~3년 기본 연봉을 보장해준다는 이유로 자기 연구 분야도 아닌 프로젝트에 무미건조하게 투입돼 시간과 능력을 허비하고 있다. 출판사와 ‘의욕적으로’ 계약한 원고는 ‘공수표’로 방치한 채 말이다. 이런 현상이 갈수록 심해진다.


가외의 심각한 노력이 요구되는 매체 구조

언론도 마찬가지다. 최근 우연히 한 블로그를 알게 됐는데, 어떤 역사적 사건을 다양한 문헌을 근거로 파고들어 역사상식의 뒤통수를 치는 글을 연재하는 개인 블로그였다. 글마다 참고 문헌이 붙어 있는데 많을 경우 10편이 넘어갔고, 그중에는 해외 석학의 최신 저작이나 논문도 포함돼 있었다. 글을 잘 쓴다기보다 질문을 잘했고, 역사적 맥락을 따져보는 품새가 아마추어적인 듯하면서도 꼼꼼하고 알찼다. 그런 글이 100편 넘게 올라와 있었다. 원고지 매수로는 3천 매 정도였다. 당장 연락을 취해 책을 내자는 제안을 했고 현재 계약을 맺은 상태다. 그런데 그 사람은 대학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한 경제신문 국제부 기자였다. 그는 직장의 일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이 짬을 내어 성실하게 그런 글들을 써나갔던 것이다. 나는 지금 허랑한 글들의 바다에서 괜찮은 글 하나를 발견한 기쁨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글이 나오는 구조가 글쓰는 이에게 가외의 심각한 노력을 요구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다수의 대중을 훌륭하게 설득하고 감동시킬 수 있는 한 사람의 저자가 탄생하기까지는 적어도 5권 이상의 전작이 필요하다. 적어도 책을 5권은 내야 5천 부 팔리는 저자에 도달한다는 출판계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지속적인 저술 작업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블로그에 글을 쓰고 포털이 중계하는 환경이 구축된 최근 5년 사이에 매체는 ‘빅뱅’이라고 할 만한 양적 팽창을 이루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표현 욕구를 블로그 등에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인문학’이란 간판을 달고 책으로 펴낼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에세이·잡기류거나 재테크·다이어트 같은 실용류다. 역사·예술·문화비평 등도 간혹 있지만 체계성이 부족하거나 콘셉트가 부여되지 않은 리뷰, 세상 읽기 종류가 압도적으로 많다.

지금 우리 인문저술계에 필요한 것은 ‘아이템’이 아니라 ‘콘셉트’다. 조선시대 역사교양서만 예를 들어보자. 기생, 하층민, 양반, 무기류, 살인사건, 연애사건, 왕, 후궁, 2인자 등 아이템이 널려 있다. 이들을 매개로 역사의 빈곳을 채워나가는 건데, 나도 이런 책들을 내긴 하지만 과연 이걸 인문학적 역사물이라 할 수 있는가? 나는 순수한 인문학 독자로서 왜 18~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이 하나같이 갑자기 백과전서 짓기에 몰두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밝히는 다큐멘터리를 내고 싶다. 또한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이라는 원전을 어떻게 이 땅에 ‘번역’하고 어떤 경우는 ‘베껴먹었는지’ 그 체계적인 커넥션과 계보학이 궁금하다. 게다가 동인·서인도 모자라 남인·북인·소론·노론·벽파·시파·노론청류까지 뻗어나가 나라가 망한 판국에, 그들의 다양한 역학관계라는 주제 하나만 가지고 온전하게 알아듣기 쉽게 정리해놓은 책 한 권 없는 현실이다. 과연 이런 것들이 변화된 매체의 양적 팽창이라는 환경을 등에 업고 이뤄질 수 있을까?

번역하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길?

앞으로는 출판도 해외로 수출해야 영세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중국만 해도 얼마나 시장이 큰가. 10년 전만 해도 중국 책들은 공무원이 쓰는 도덕 교과서처럼 재미가 없었다지만, 요즘은 대륙도 상업출판이 불붙어서 얕잡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글발’에 물이 올랐다. 거기에 ‘대표선수’로 내보내려면 최소한 소재의 특수성(특수한 보편성), 콘셉트(관점)의 확실성, 자료조사의 성실성, 논술 구조의 정합성은 담보돼야 한다.

그런데 문학이나 다른 실용·경제 분야라면 몰라도 인문학 분야에서 그러기는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다. 해외로 판권을 수출하려면 실용서나 경제경영서를 잘 세팅해보는 게 오히려 빠르겠다는 판단이 자꾸 앞선다. 어차피 그쪽은 내용보다는 콘셉트 싸움이니 말이다.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랬다”고 가벼운 책으로 돈을 벌어 정말 중요하고 절실하게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책 읽고 ‘외국어는 안 돼도 콘셉트는 되는’ 진짜 엘리트 중간필자가 많이 생기게 말이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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