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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보다 노래

등록 2009-07-02 18:10 수정 2020-05-03 04:25
술보다 노래

술보다 노래

밤이면 노래방을 배회한다. 아니, 솔직히 낮에도 그렇다. 흡연자들이 가겟방에 들어가 “디스 한 갑이오”를 외치듯 난 노래방에 들어가 “30분만요”를 외친다. 노래방 30분은 담배 한 모금보다 아름답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그랬다. 노래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딸로서 나는 1990년대 초반, 동네에 노래방이 처음 생기던 그날부터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그 노래방에 갔다. 깜깜한 밤에 더 깜깜한 지하로 내려가면 번쩍이는 노래방이 나왔다. 그곳에서 노래를 할 때면 자유로웠다. 아버지의 트로트에 맞춰 코러스를 넣느라 나중엔 동요도 꺾어 부르는 경지에 올랐다.

처음으로 부모님 없이 노래방에 간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친구 세 명과 노래방에 들어가는데 ‘미성년자 출입금지’ 팻말 앞에 내심 떨렸다. 노래를 불러서 100점이 나오자 방 안에 있던 자판기에서 손톱깎이가 상품으로 나왔다. 인심 좋은 주인 아저씨는 5천원만 내면 4시간 동안 노래를 부르게 해줬다. 밝을 때 들어가도 나오면 깜깜했다.

그렇게 노래방을 들락거면서 자라났다. 고등학교 2학년 땐 처음으로 노래방에서 사랑 고백도 받았다. 대학생이던 그는 내 앞에서 을 불렀다. “처음이야, 내가. 드디어, 내가. 사랑에 난 빠져버렸어”라고 노래하는 그를 보며 난 앞으로 노래방에서 저 노래는 부르지 말아야지, 마음먹었다. 사랑이라니, 징그러워라. 처음으로 노래방이 참 은밀한 공간이구나, 느낀 날이었다.

이십대로 넘어가니 ‘사랑의 끝’에도 노래방을 찾았다. 실연을 당했거나, 실연을 당한 친구와 함께거나. “다 돌려놔~ 너를 만나기 전의 내 모습으로~”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다가 어느 대목에선 엉엉 울기도 했다. ‘난 괜찮아’를 부르다가 금세 ‘날 사랑하기는 했었나요’ 청승을 떤다. 이 장면은 훗날 부부싸움을 하고 혼자 노래방에 들어가 “30분만요”를 외치는 모습으로 승화된다. 레퍼토리는 비슷하다.

노래방은 ‘누구와 가는지’가 중요하다. 내겐 노래방 ‘지음’이 있다. 바로 나의 자매들이다. 10여 년간 같이 노래방을 다닌 덕에 이젠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숨소리만 들어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1절은 너, 2절은 나, 말 안 해도 안다. 피처링도 자동이다. 그들과 노래방을 갔다 온 날은 온몸이 땀에 젖고 목이 후들거린다. 그런 날은 몸이 한없이 가볍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밤 시간을 진정 ‘내가 흠뻑 즐긴 시간’으로 만들기란 쉽지 않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술도 마셔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하며 술도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술 마시길 옴팡지게 즐기는 이라면(심야생태보고서 ① 음주편 참조) 다르겠지만 말이다. ‘심야생태보고서-가무’편은 밤이 오면 가면을 벗고 넥타이를 풀고 가무를 즐기는 이들을 찾아나서려 한다. 생수만 두 병을 연거푸 마셔대며 노래방에 취하는 나처럼 자신만의 가무생활로 밤을 불태우는 이들을 만나고 오겠다. 기대하시라. 혹,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제보하시라.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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