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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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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카메라

등록 2009-05-16 10:42 수정 2020-05-03 04:25
어디든 있으나 어디에도 없는 신의 눈
신의 역할을 넘겨받은 유비쿼터스… 범법 행위를 합법적 오락으로 만드는 관음증의 도구

■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독어독문과

뚱뚱한 40대 남자가 진찰실로 들어온다. 의사가 사내를 매트에 눕히고 그의 배에 청진기를 갖다 댄다. 의사는 몇 번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초음파 장비를 꺼내 다시 사내의 배에 갖다 댄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밝은 표정으로 사내에게 말한다. “축하합니다. 임신하셨습니다!” 환자의 머리 위의 모니터는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태아의 초음파 영상을 보여준다. “보이시죠?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황당해하는 사내에게 의사가 내처 말한다. “뭐, 의학적으로 잘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수억분의 1의 확률로 이렇게 남성이 임신을 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몰래카메라 / 일러스트레이션 김중화

몰래카메라 / 일러스트레이션 김중화

“남자분, 임신하셨습니다”

난감해하는 환자에게 의사가 묻는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의사에게 되묻는다. “아이를 뗄 수는 없나요?” 의사가 정색을 한다. “알다시피 우리나라에서는 낙태가 불법입니다. 만약 낙태 시술을 해주었다가 적발되면, 저는 의사 면허를 반납해야 하지요.” 깊은 고민에 빠진 사내에게 임산부(姙産夫)에게 일반적으로 필요한 주의사항을 말해준다. “한두 달 뒤면 서서히 배가 불러올 겁니다. 이제부터 심한 운동을 피하셔야 하고요. 음주나 흡연은 절대로 하셔서는 안 됩니다. 음식도 되도록 가려서 드세요. 그리고 앞으로 정기적으로 들러서 태아의 상태를 체크하셔야 합니다.”

잠시 뒤 의사는 손가락으로 카메라 쪽을 가리킨다. 환자의 시선은 의사의 손가락이 지시하는 곳을 향한다. 거기서 살짝 감추어진 카메라의 렌즈를 확인한 환자는 비로소 안심을 하고는 박장대소를 한다. 모니터에 떠 있던 태아의 초음파 영상은 물론 임신한 다른 여인의 것을 녹화해서 틀어준 것이다. 한때 전세계적으로 ‘몰래카메라’가 유행을 했나 보다. 개그맨 이경규씨가 진행하던 ‘몰래카메라’를 보다가 유학을 갔는데, 거기서도 똑같은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 이 ‘임신한 남자’ 편은 독일에서 봤던 ‘몰래카메라’(Versteckkamera) 프로그램 중에서 나를 제일 많이 웃겼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몰래카메라는 진지한 목적에 사용된다. 가령 경찰은 범인을 추적하거나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몰래카메라를 동원한다. 그렇게 촬영된 영상은 수사를 돕는 자료, 혹은 범죄 사실을 입증하는 법정 증거물로 활용된다. 이미 도시의 거리에는 여기저기에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행인들이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그 역시 일종의 몰래카메라라 할 수 있다. 듣자 하니 강남의 주민들은 길거리에 더 많은 카메라를 설치해달라고 요구하는 모양이다. 이때 몰래카메라는 경찰이 없는 곳에서 경찰의 부재를 기계적으로 보충함으로써 범죄를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

방송사에서는 취재가 어려운 곳에 들어갈 때 몰래카메라를 들고 들어간다. 이때 기자 혹은 리포터는 카메라가 장착된 가방이나 핸드백을 들고 비리 현장에 잠입한다. 카메라 앵글이 제대로 맞는지 확인할 수 없기에, 시청자가 이를 TV로 볼 때는 종종 상반신이 뭉텅 잘려나간 상태가 된다. 또 가방에 들어갈 정도의 소형 카메라라 그것으로 찍은 영상은 해상도가 높지 않다. 거기에 프라이버시 침해를 막기 위해 종종 음성도 변조된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상황을 연출하지 않은 진짜 ‘몰카’이기에, 화질이 좋지 않은 이 저해상의 영상은 놀라운 현장감으로 시청자를 TV 앞으로 끌어당긴다.

알베르티의 날개를 단 눈

이런 공적인 목적이 아니라 사적인 목적에서 몰래카메라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 가령 의심 많은 남편은 출근 뒤 아내의 불륜을 포착하기 위해 집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한다. 여성 화장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해놓고 즐기다가 발각되는 응큼한 사내들도 있는가 하면, 간호사 탈의실에 몰래카메라를 달아놓는 병원장도 있고, 아르바이트생 탈의실에 카메라를 감춰놓는 편의점 주인도 있다. 그뿐인가? 모텔에 잘못 들어갔다가, 본의 아니게 라이브 포르노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뒤늦게 음란 사이트에서 자신이 출연한 포르노 야동을 본다는 모티브는 이미 상업영화의 소재가 됐을 정도로 빈번한 일이다.

이와는 반대로 매우 도덕적인 목적으로 몰래카메라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아직 가끔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기도 했던 시절. 일요일 아침이면 목사님이 교회에 갈까 말까 망설이는 게으른 신도에게 휴대전화 문자를 보내시곤 했다. “진중권 성도님. 하나님은 늘 성도님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으아악, 눈을 올려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에 계신 저 카메라는 건물의 벽은 물론이고 모든 것을 투시하는 초강력 엑스레이 울트라 몰래카메라. 신심이 충실했던 중세 사람들은 늘 하늘에 있는 신의 눈을 의식하며, 그것으로 자신의 행동을 바로잡았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 중세의 신학적 몰카는 세속화한다. ‘원근법’을 발명한 알베르티의 날개가 달린 눈을 가문의 문장(紋章)으로 사용했다. 눈에 날개가 달렸다는 것은 세상의 어디로든 날아가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원래 이 문장은 세상의 모든 것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는 신의 눈을 의미했으나, 알베르티는 거기에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어디에 있든지 달려가 그려낼 수 있는’ 원근법의 보편적 재현 능력이라는 의미를 살짝 덧붙인 것이다. 원근법이 기하학을 이용한 과학적 재현의 테크놀로지라고 한다면, 오늘날 도처에 존재하는 몰래카메라가 알베르티의 눈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우연히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가 중세의 신학자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에 관한 책을 발견했다. 책을 펼치자마자 굵은 활자로 찍힌 신의 속성에 관한 기술이 눈에 들어온다. “신은 도처에 존재하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아마도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하나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뜻일 게다. 묘하게도 이는 ‘유비쿼터스’ 개념을 연상시킨다. 오늘날에는 컴퓨터가 중세에 신이 하던 역할을 넘겨받은 듯하다. 컴퓨터는 모든 사물 속에 내장돼 들어가나, 너무 작아 이제 눈에 띄지 않는다. 아니, 몰래카메라야말로 신의 눈인지도 모른다. 카메라는 도처에 존재하나 눈에 띄지는 않는다.

시선의 권리, 시선의 권력

데리다였던가? ‘시선의 권리’에 대해 말했던 것이. 아니면 폴 비릴리오를 따라 이 말을 우리는 ‘시선의 권력’이라는 표현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상대에 대한 시야를 확보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는 왜 도처에 카메라를 깔아놓으려 할까? 그것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기 때문이리라. 권력을 행사하려면, 그 대상에 대한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므로 카메라 렌즈로 누군가를 포착한다는 것은 법적·정치적 의미에서 그를 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적 차원에서 몰래카메라는 이렇게 시선의 권력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적 측면에서 몰래카메라는 무엇보다도 관음증의 도구라 할 수 있다. 카메라의 둥근 렌즈는 공교롭게도 문고리에 달린 열쇠구멍을 닮았다. 그것은 공적으로 금지된 영역, 즉 ‘프라이버시’라 불리는 타인의 침실 속으로 내 시선을 들여보내는 구멍이다. 몇 년 전 어느 방송사에서 몰래 찍은 부부 스와핑 영상을 내보낸 적이 있다. 법적으로 위험한 일이지만, 부부 스와핑을 규탄하는 도덕적 목소리에 묻혀 더 중요한 프라이버시의 문제는 아예 제기되지도 않았다. 이거야말로 아찔한 일이다.

몰래카메라는 피사체의 동의를 얻어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들여다보는 범법 행위를 대중이 즐기는 합법적 오락으로 바꾸어놓는다. 그것은 대중에게 타인에 대한 시야를 확보했다는 유사권력의 느낌을 선사하면서 그들의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몰래카메라 프로그램은 노출증을 가진 미디어와 관음증을 가진 대중의 결혼에서 탄생한 아이라 할 수 있다.

<hr>과학자는 몰래카메라를 사랑해
관찰 행위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개발된 묘안… 웹캠 역시 몸 무겁고 영리한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것

■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과

선거철만 되면 기승을 부리는 여론조사와 설문조사, 과연 얼마나 정확할까? ‘설문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도 의심스럽지만, 더욱 황당한 것은 설문조사 자체가 참가자들의 행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다.

예를 들어, 선거일 전날 ‘당신은 투표할 의향이 있습니까?’라는 설문조사에 참여하게 되면, 그들이 투표할 확률이 무려 25%나 올라간다. 게다가 ‘이번 선거에서는 예년보다 투표율이 크게 올라갈 것으로 예상된다’는 뉴스를 접한 그룹은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투표에 참여할 확률이 20% 이상 올라간다.

물건을 구매할 때도 비슷한 효과가 나타난다. 미국인을 대상으로 50개주에서 4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표본 조사한 결과, ‘향후 6개월 안에 휴대전화를 구매할 의사가 있습니까?’라는 간단한 질문만으로도 구매율을 35%나 높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의 의도를 측정하는 설문조사가 그들의 구매 의사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의도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의 답변에 행동을 일치시킬 가능성이 높아지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단순측정효과’(mere-measurement effect)라고 부른다. 관찰하는 행위가 관찰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양자역학적인 효과의 일상생활 버전’이라고나 할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간의 의사결정이나 행동을 연구해야 하는 사회과학자들로서는 무척 골치가 아팠다. 설문조사의 답변이 진실이라고 말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조사 자체가 실험 결과에 영향을 미치니 난감할 수밖에.

공적 차원에서 몰래카메라는 시선의 권력이다. 사적 차원에서 몰래카메라는 관음증의 도구다. 사진 한겨레 박종식 기자

공적 차원에서 몰래카메라는 시선의 권력이다. 사적 차원에서 몰래카메라는 관음증의 도구다. 사진 한겨레 박종식 기자

구매할 의사가 있나요? 그럼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묘안을 짠 심리학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윌리엄 이케스. 1973년 위스콘신대 심리학과 교수로 부임한 그의 연구주제는 ‘마음 읽기와 공감’이었다. 그는 인간의 마음 읽기 능력을 정교하게 측정하는 실험이 필요했지만, 설문조사나 실험실에서 수행하는 ‘잘 짜여진 실험’으로는 도무지 ‘자연스런 마음 읽기 능력’을 측정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존 파울스의 소설 를 읽고 그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소설에서 주인공 니콜라스 프락소스는 그리스 섬에 있는 외딴 저택에 잠시 머무는 동안 일련의 이상한 사건들을 겪게 된다. 알고 보니, 나이 많은 부호인 모리스 콘키스가 자신이 구상해 놓은 상황 속에 프락소스를 빠뜨린 뒤, 그의 말을 도청하고 행동을 몰래 녹화했던 것이다.

이 소설에서 착상을 얻은 윌리엄 이케스 교수는 곧바로 연구실로 돌아와 모리스 콘키스처럼 자신이 ‘인간 본성의 세심한 관찰자’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잘 통제된 실험실 연구와 자연스러운 관찰 연구의 장점을 살려, ‘실험실’과 ‘실험 대기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실험 참가자들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기로 한 것이다(물론 실험 참가에 대한 서면 동의서를 받고서 말이다).

그는 피험자들을 실험실로 오게 한 뒤 ‘여러 개의 슬라이드를 보면서 내용을 평가하는 과제를 내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고 나서 작은 탁자 위에 있는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가동하기 위해 스위치를 켜는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면서 프로젝터 전구가 터져버린다. 실험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이를 어쩌지?”라고 말하면서 짜증나는 표정을 지으며, “새 프로젝터 전구를 가져와야겠네요. 옆 건물 지하 창고까지 가야 하니, 아마 몇 분 걸릴 거예요”라고 말한 뒤 홀연히 사라진다. 이제 피험자는 다른 실험 참가자와 소파에 단둘이 앉은 채 실험실에 남게 된다. 하필 또 다른 참가자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낯선 이성. 5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이 피험자는 과연 어떤 행동을 취할까?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하나, 아니면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려야 하나?’ ‘아무 말도 하지 않기도 마음먹었다면, 눈맞춤도 피해야 하나?’ ‘눈을 맞추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 무례하게 느껴질 텐데….’ 그도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고 싶진 않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아주 매력적인 이성이니까(물론 매력적인 이성은 미리 실험자와 짜고 정해진 대로 행동하는 ‘내부자’다!).

일상을 생중계하는 나르시시즘적 욕망

윌리엄 이케스는 ‘몰래카메라 실험’이 아니면 도저히 관찰할 수 없는 피험자들의 말과 행동(웃음, 몸동작, 눈맞춤 같은 비언어적인 소통들)을 관찰함으로써, 마음 읽기 과정과 공감 정도를 측정했다. 그의 실험은 피험자의 인권과 사생활 침해 문제, 실험 과정의 자발성과 실험자의 상황 조작 가능성 등 다양한 문제제기가 뒤따랐지만, 실험심리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획기적인 실험디자인으로 평가받았다(물론 지금은 ‘심리학 실험의 전형적인 방법’ 중 하나로 애용되고 있다).

몰래카메라의 등장은 과학자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행동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인간공학, 인간과 로봇·컴퓨터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로보틱스(HCI·Human-Computer Interface), 시선추적장치(eyetracking techniques)를 이용해 인간의 시각주의집중을 탐구하는 인지신경과학,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는 문화기술학 등에서 중요한 연구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웹캠’이란 것도 과학자들이 몰래카메라를 방불케 하는 ‘라이브쇼’를 보기 위해 자신들의 지적 능력을 사용하면서 발명됐다. 1991년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한 연구소에는 복도 끝에 맛있는 커피가 담긴 포트가 하나 있었다. 맛이 좋다 보니 금세 사라지는 일쑤였다는데, 복도 끝까지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여기에 심술이 난 한 과학자가 커피포트 앞에 작은 카메라를 설치하고, 모든 연구원들이 웹상에서 ‘커피포트에 커피가 현재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웹캠의 시초였다(‘몸이 무겁고 머리가 뛰어난’ 세상의 모든 과학자들에게 경배를!).

요즘 ‘몰래카메라’를 사용하는 과학자들의 최대 화두는 ‘카메라에 담긴 영상’을 통해 인간의 행동, 언어적·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자동적으로 정량화할까 하는 것이다. 워낙 데이터가 많다 보니, 일일이 눈으로 보면서 확인하는 과정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메라가 노출돼 있으면 자꾸 카메라에 시선이 가거나 행동이 제약을 받고 자기검열을 하기 때문에, 카메라를 교묘히 숨기는 기술 또한 고도로 발달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몰래카메라를 자신의 공간에 스스로 설치한 뒤(이쯤 되면 더 이상 몰래카메라가 아니지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기록하는 ‘라이프로그 시스템’(Life-log system·일상생활기록장치)을 연구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웹캠과 싸이월드, 블로그 등을 통해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고 생중계하려는 나르시시즘적 욕망이 하루 24시간, 1년 365일, 80년 평생을 기록하는 대용량 프로젝트로 탈바꿈해 과학자들을 몰두하게 만들고 있다(이 프로젝트에 기꺼이 참가하기를 기다리는 피험자들이 무척 많다!).

이 연구의 최대 난제는 역시나 ‘수많은 일상 데이터에서 의미 있는 데이터를 빠르게 찾는 방법을 개발하는 일’이다. 한 인간의 삶을 ‘200GB 하드디스크 4천 개’로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IBM을 포함해 전세계 ‘가장 뛰어난 컴퓨터 사이언티스트들’이 이 연구를 위해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과학자 앞에 나타난 외계인

개인적으로, 문화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에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천문학을 전공한 한 과학자가 ‘외계인이 지구에 내려오는 가상 설정’에서 과학자로서의 이성을 잃고 흥분하고 허둥대다가 무참히 속아넘어간 장면이었다. 인간 본성을 엿보고 싶은 관음증적 탐구를 위해 몰래카메라를 들고 ‘신의 지위’를 차지하려 했던 과학자들. 그러나 막상 그들을 향해 몰래카메라를 들이댔을 때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과학자의 모습 속에서 ‘과학의 권위’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날의 몰래카메라가 각별히 가슴 아픈 이유는 날마다 연구실에서 실험 데이터를 억지 해석하며, 자연이 파놓은 함정에 매번 빠지는 ‘세상 모든 과학자들의 자화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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