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중권 자유기고가
언젠가 독일 카를스루에의 ‘미디어와 예술센터’(ZKM)에 갔다가 미술사책에서 사진으로나 보던 제프리 쇼의 (Legible City·1988)를 직접 보았다. 미술사책에서 본 작품을 미술관에서 다시 보는 것은 오늘날 그리 대단치 않은 경험으로, 여행자의 일상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대하는 체험은 그것과는 양상이 사뭇 달랐다. 왜냐하면 관객이 작품을 직접 만지는 것은 물론이고 직접 그 위에 올라타도 되기 때문이다.
스크린은 관객 앞에 가로세로 15km에 달하는 암스테르담 시내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펼쳐주고, 관객은 자전거를 타고 그 안으로 들어가 도시의 구석구석을 탐험하게 된다. 도시 풍경을 리얼리스틱하게 묘사하기에는 아직 메모리와 폴리곤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도시의 건물들은 그것들과 연관된 문자 텍스트로 대체돼 있다. 하지만 바로 그 덕분에 관객은 자전거로 도시를 탐험하면서 동시에 그 도시와 관련된 정보의 바다를 탐색하게 된다.
자전거는 아주 매력적인 인터페이스였다. 페달을 빨리 밟으면 자전거의 속도도 빨라지고, 핸들을 꺾으면 자전거의 방향이 달라진다.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암스테르담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문득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건물들로 돌진하면 어떻게 될까? 바로 핸들을 꺾어 힘차게 옆의 건물로 돌진했더니, 몸이 건물의 벽을 통과해버리고 만다. 순간 내가 육체에서 벗어나 유령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육체로 페달을 밟고 손으로 핸들을 움직이다가 갑자기 신체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인상적인 체험이었다. 제프리 쇼를 직접 만난 자리에서 그에게 이 체험을 들려주었더니, “그거야말로 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한 것”이라고 말했다. 자기의 관심사는 가상현실 자체를 만드는 데 있기보다는 관객으로 하여금 가상과 현실을 오가면서 자신의 신체성을 다시금 의식하게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이다.
제프리 쇼는 이미 디지털 시대 이전부터 가상현실의 체험을 연출해왔다. 가령 (Water Walk·1970)이라는 작품을 생각해보자. 이 작품에서 관객은 거대한 고리 모양의 투명비닐 터널 속을 걷게 된다. 물 위에 설치돼 있기에 그 투명한 비닐 터널 속에서 관객은 굳이 발을 물에 적시지 않고도 물 위를 산책하게 된다. 이렇게 그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오늘날의 가상현실과 비슷한 체험을 연출했던 것이다.
이어서 등장한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그를 마침내 미디어 아트의 전설로 만들어준다. 그것을 이용하면 굳이 거대한 아날로그 장치를 설치하지 않고도 다양한 가상의 환경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물질성이 없는 가상을 만들어내면서도 그가 관객의 신체 체험을 특별히 강조한다는 점이다. 가상현실을 이용한 것이든, 증강현실을 이용한 것이든, 그가 창조한 세계로 들어가려면 관객은 신체를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신체에서 벗어나는 체험’(disembodiment)을 넘어 ‘다시 신체로 들어오는 체험’(reembodiment)을 지향한다고 할까. 이 두 가지 체험 사이의 차이는, 아마도 모니터 앞에서 그저 자판을 두드리는 오락기와 기계 앞에서 온몸을 흔들어야 하는 DDR의 차이에 가까울 것이다. 가령 손가락의 움직임만으로 물질성이 없는 디지털 유령(아바타)이 되는 ‘세컨드 라이프’와 달리, 의 관객은 발로는 페달을 밟고 손으로는 핸들을 꺾어야 한다.
‘체현된’ 인터페이스
제프리 쇼가 이제까지 해온 작업은 한마디로 ‘체현된’ 인터페이스의 구축을 위한 예술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닌텐도 위(wii)’에 열광하는 것은 당연한 일. 닌텐도 위는 유저를 디지털 가상에 입장시키는 새로운 방식, 즉 체현된 인터페이스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쇼에게 닌텐도 위는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이제까지 해온 예술적 실험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 최초의 예”다.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꿈꾸던 세계는 이렇게 점점 일상이 되고 있다.
이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미학적 측면을 적절히 기술해주는 것은, 아마도 쇼가 뒤샹에게서 빌려온 ‘초박막’(infra-mince)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쇼는 초박막을 가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제3의 공간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가상과 현실 사이에 또 다른 공간이 있을 리는 없으므로, 그것은 일종의 관념적 공간으로 볼 수 있다. 가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그 ‘극도로 얇은 막’ 위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이 제프리 쇼가 다양한 작품을 통해 묻고 답하려는 물음이다.
앞에서 얘기했던 의 자전거 타기 체험으로 돌아가보자. 관객은 자전거 위에서 발로 페달을 밟고 손으로 핸들을 꺾는 수고를 통해 자신의 신체성을 의식하나, 자전거를 몰고 건물의 벽으로 돌진하는 순간 갑자기 신체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가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초박막 위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쇼의 작업은 가상과 현실을 나누는 초박막 위에서 다양한 신체의 체험을 발생시키는 실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상과 현실을 오가며 사는 현대인은 쇼의 말대로 ‘파타피지컬한 종’(pataphysical species)이 될 것이다. ‘파타피직’(pataphysic)은 프랑스의 저자 알프레드 자리의 신조어로, 거칠게 우리말로 옮기면 ‘사이비 물리학’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은 현실과 가상이 어지럽게 뒤섞인 세계의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고, 과학과 은유가 어지럽게 뒤섞인 의식의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는 어차피 공상과학이 된 현실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파타피직은 ‘은유’(metaphor) 대신에 ‘파타포’(pataphor)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가 물리적 현실이고, 장기판이 그 물리적 현실의 시뮬레이션, 즉 전쟁터의 은유라면, 파타피지컬한 상태는 장기판 위에서 말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정말로 인간 병사들이 움직이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에서 해리 포터 일행이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움직이는 말들과 일전을 치르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사이비 물리학을 현실 세계로루이스 캐럴의 도 파타피지컬하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겪는 모든 체험을 루이스 캐럴은 체스판 위의 사건으로 묘사했다. 거기서 앨리스는 문득 자기 눈앞에 펼쳐진 들판이 체스판처럼 흑과 백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구획돼 있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가상과 현실, 혹은 은유와 현실이 어지럽게 뒤섞인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가 오늘날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힘입어 점점 실현되고 있다.
미디어 아티스트는 그런 파타피지컬한 세계를 구상하는 이들이다. 인터페이스 디자이너들은 예술가들이 앞서 내놓은 구상을 실현해 대중의 일상으로 바꿔놓는다. 테크놀로지는 세계의 존재를 변화시키고, 그것의 상관자인 인간의 신체를 변형시킨다. 세계에서는 가상현실·증강현실·혼합현실이 중첩되고, 인간의 신체에는 탈신체화와 재신체화의 체험이 중첩된다. 제프리 쇼는 그 얇은 박막 위에서 다양한 사건들을 일으킴으로써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신체의 디자이너가 되려 한다.
<hr>과학자는 미디어 아티스트?몹쓸 도취감에 사로잡혔다가, 과학자가 예술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들이 과학자가 돼간다는 사실을 깨닫다
■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과
1999년 겨울 무렵,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젊은 미디어 아티스트의 작품을 본 적이 있다. 작품 제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눈 내리는 겨울에 잘 어울릴 법한 ‘크리스마스트리’나 혹은 그 비슷한 제목이었던 것 같다. 거대한 나무 한 그루에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 불빛들이 반짝이는 단순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크리스마스 불빛이 항상 켜져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그 앞에서 발을 쿵쿵 굴러야만 불빛이 조금씩 반짝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여러 관객이 힘껏 발을 구를수록 불빛은 더욱 반짝였다. 당시 이 작품은 내게 너무 충격적이어서 한동안 이 작품에 대한 생각이 뇌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만나는 친구들마다 이 작품에 대해 얘기해주면서, 새로운 밀레니엄에는 예술이 많이 바뀔 것 같다는 얘기를 나눴다.
그런데 내가 정말 신기했던 것은 작품을 감상하러 온 관객이 모두 나무 앞에서 발을 구르며 떠날 생각을 하지 않더라는 사실이었다. 어린이들은 미친 듯이 발을 구르기도 하고 두 손을 바닥에 짚기도 하면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더욱 반짝거리게 만들기 위해 경쟁하곤 했다. 작품 하나가 관객을 발을 구르며 날뛰게 만드는 광경이 매우 신기했던 것이다.
서로 낄낄거리며 발을 구르는 관객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 이 작품 밑바닥 아래에 압전소자(압력을 가하면 그것을 전기에너지로 바꿔주는 소자)를 깔아놓으면 크리스마스트리에 불빛을 켜는 데 드는 전기보다 더 많은 전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걸 실내 놀이동산 중앙에 하나 마련해놓으면 애들이 미친 듯이 발을 굴러 전기료가 꽤나 절약되지 않을까 하는 공상을 했다. 이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급기야는 세상 모든 군인들의 군화 밑바닥에 압전소자를 넣어두거나 농구장 바닥을 압전소자로 깔면 에너지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겠다는 과대망상에까지 이르게 됐다. 아, 이런 과학자의 ‘영구기관에 대한 집착’이여!
이렇게 20세기의 끝자락에서 미디어 아트를 처음 접한 뒤로, 미디어 아트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연구가 예술가가 보기에는 미디어 아트(혹은 디지털 아트)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자아도취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나처럼 복잡계 과학을 연구하는 ‘떠오르는 대가’ 중에 ‘토머스 레이’라는 과학자가 있다. 그의 전공은 인공생명(Artificial Life). 그가 컴퓨터상에 구축한 프로그램인 티에라(Tierra)는 그야말로 하나의 생태계다. 이 공간 안에 존재하는 개체는 (모니터의 픽셀로 표현되긴 하지만) 생존 욕구가 있으며, 스스로 복제도 하고, 다음 세대에 돌연변이를 만들어내기도 하며, 세대를 거듭하며 진화도 하며, 다른 개체와 만나 잡종처럼 뒤섞이기도 하는 생명체들의 서식지다.
다시 말해, 모니터상에서 이들이 보이는 패턴이 전형적인 생태계의 특징을 따른다는 것인데, 흥미롭게도 예술가들은 그의 연구 활동을 미디어 아트 작품 활동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연구실에서 작업한 내용을 그대로 미술관에 전시하기도 했다. (실제로 토머스 레이는 나도 회원으로 있었던 복잡계의학 연구회에서 초청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가 카이스트에서 초청강연을 했을 때 내가 그를 서울에서 대전으로 데리러 왔다 갔다 하는 일을 맡게 됐다. 당시 어린 박사과정 학생에게 이런 경험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그때 너무 떨려서 내가 실수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식혜를 주면서 ‘한국의 전통음료’라고 억지로 먹였다!)
연구실 시뮬레이션과 다르지 않네그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작품이 내가 평소 연구실에서 하던 시뮬레이션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갑자기 건방진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박사과정 내내 하던 인공생명 연구가, 내가 만든 ‘인 실리코’(in silico) 신경세포들이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 엉켜 죽기도 하는 시뮬레이션 상황도 인공생명의 한 형태, 더 나아가 ‘미디어 아트’의 한 작품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나르시시스틱한 공상에 빠져 한때 내 시뮬레이션 결과를 컬러로 프린트해 책상 앞에 붙여두며 친구들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이렇게 ‘얼치기 미디어 아티스트’는 조금씩 21세기 예술을 배워나갔다.
그런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준 진정한 예술가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제프리 쇼’다. 지금은 충격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는 이것이야말로 ‘21세기 예술의 미래’를 힐끗 엿본 듯싶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Legible city)를 처음 봤을 때 얘기다.
제프리 쇼는 가상의 도시 공간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관객은 자전거를 타고 페달을 밟으면서 자기가 선택한 이미지 공간을 활주하고 이동한다. 내가 핸들을 돌릴 때마다 내 앞에 펼쳐지는 이미지 세계도 따라 회전하고 이동한다. 관객이 향하는 시선으로 이미지 공간은 매순간 재배치되고 다시 정렬된다.
인터랙티브 아트가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놀란 것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이미지에 대한 몰입감이 엄청나게 높아져 ‘인식 확장’ 수준이 됐다는 데 있었다. 그는 정말 제대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아는 예술가였다. 그것도 모자라, 제프리 쇼 이후에는 인터랙티브 아티스트들이 3차원 고글, 카메라가 달린 모자, 데이터 글러브까지 관객에게 씌우면서 확장된 지각의 지평을 더욱 넓혀갔다. 물론 관객의 몰입도도 덩달아 올라갔다.
관객이 참여하고 예술작품과 상호작용을 하는 것은 그저 트렌드가 아니라, 인식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또 즉흥성을 극대화하고 반복재현성을 부정하면서 21세기 예술의 본질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제프리 쇼가 ‘21세기의 피카소’로 추앙받을 것이라 믿는다.
예술가들이여, 과학기술을 마음껏 가지고 노시라!요즘 나는 인간의 의사결정을 탐구해 컴퓨터에 전달해주면서 뇌와 컴퓨터가 서로 상호작용을 연구하게 하는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rain-computer interface)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실험실에서 만날 하는 일이 바로 이런 거다. 고글을 씌우고, 손에 글러브를 채우고, 인간의 인식을 확장하는 것. 그것이 예술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배우게 된 것이다.
나는 20세기에는 물리학을 연구했고, 21세기에는 신경과학을 연구하고 있다. 20세기가 ‘물리학의 시대’라면 21세기는 ‘생물학의 시대’. 그중에서도 가장 각광받는 분야는 단연 신경과학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운이 좋게도 트렌디한 학문을 하고 있는 셈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예술과 가까운 분야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뿌듯하다(아, 이 몹쓸 자아도취감이여!).
그런데 뒤늦게 깨달은 것은 과학자가 예술가가 돼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과학자가 돼가고 있다는 사실. 그들은 컴퓨터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로봇과 기계를 마음대로 다루면서 세상을 바꾸고 인간을 변화시키고 있다(예술가들이여, 과학기술을 마음껏 가지고 노시라!).
디지털은 캔버스와 물감을 비물질화하면서 마음대로 조작 가능한 데이터로 만들고, 예술가의 등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그 날개를 제일 먼저 펴고 훨훨 날아가 ‘창작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활공하는 제프리 쇼. 과학자가 예술가가 되고, 예술가가 과학자가 되는 ‘21세기 예술의 출발점’에 제프리 쇼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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