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독어독문과
19세기까지만 해도 자신의 초상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지극히 한정돼 있었다. 초상으로 기능하려면 이미지가 실물과 꼭 닮아야 한다. 초상이라는 장르에 요구되는 고도의 리얼리즘은 오직 오랜 훈련을 거친 직업 화가에게만 가능한 일. 게다가 아무리 능숙한 화가라도 한 인물의 얼굴을 리얼하게 묘사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 때문에 초상은 권력자나 대부호와 같은 사회 유력 인사들의 전유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것은 물론 사진술의 발명이었다.
하지만 초창기 사진은 회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지를 은판에 직접 인화한 초창기 사진은 회화처럼 복제가 불가능한 유일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다게레오타이프 한 장의 가격은 무려 금화 30프랑, 웬만한 초상화보다 외려 비쌌다. 초상이라는 장르가 대중화되려면, 사진술의 발전을 기다려야 한다. 19세기 말 마침내 ‘명함판’ 사진이 등장하면서, 글자 그대로 누구나 자신의 초상을 소유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 명함판 사진의 가격은 당시 파리 일용 노동자 일당의 하루 반치에 해당됐다고 한다.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맥락은 카메라 자체의 대중화다. 초기 카메라는 거대한 중장비에 가까웠다. 알프스 산의 풍경을 찍으려면 장비를 당나귀 두세 마리로 날라야 할 정도였다니까. 하지만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카메라는 휴대할 수 있는 크기로 작아진다. 또 현상과 인화를 맡아주는 DP점이 등장해 가정에 암실을 설치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로써 사진술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취미활동이 된다. 사진술은 이렇게 대중을 이미지 속의 제재(subject)이자 이미지 제작의 주체(subject)로 바꿔놓았다.
회화에 비유하자면 ‘자화상’이라 할까? 셀카에서는 촬영자와 피사체가 일치한다. 찍으면서 동시에 찍혀야 하는 이 모순을 해결하는 고전적 방식은 타이머였다.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타이머를 가동한 뒤, 재빨리 미리 정한 장소로 돌아와 포즈를 취한다. 너무 서두르다가 자빠지기도 하고, ‘타이머가 왜 작동이 안 되지?’ 하는 표정으로 찍히기도 하던 것이 아날로그 시절의 풍경. 하지만 타이머 촬영으로 자기 자신만 찍는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하긴 혼자 거리에서 그 짓을 하는 건 좀 머쓱한 일이다.
진정한 의미의 ‘셀카’는 역시 디지털의 산물이다. 과거에 근접촬영을 하려면 별도의 렌즈가 필요했으나, 휴대전화 카메라의 경우 팔 길이 내에서도 촬영이 가능하다. 뷰파인더를 통해 제 모습을 볼 수 없어도 문제없다. 과거에는 촬영에 실패하면 치러야 할 비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정보가 셀룰로이드가 아니라 전자의 배열로 저장되면 촬영에 실패해도 삭제 버튼을 누르는 수고 외에 따로 비용이 들지 않는다. 또 촬영의 결과를 즉석에서 확인할 수 있어,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재촬영을 할 수도 있다.
묵직한 아날로그 카메라는 사실 휴대하고 다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학식, 수학여행,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행사에 특별히 동원되는 장비였다. 이렇듯 아날로그 시대에 카메라의 기능이 다분히 ‘집단적’이었다면, 주머니 속에 쏙 들어가는 폰카나 디카의 기능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이것이 카메라에 찍히는 제재의 성격도 규정한다. 즉 특별한 계기에 동원되는 아날로그 사진의 제재가 다분히 ‘공식적’이라면, 특별한 일 없어도 늘 휴대하고 다니는 폰카나 디카의 제재는 지극히 ‘일상적’이다.
셀카의 고전주의와 바로크 노선셀카의 미학은 메모리와 관련이 있다. 부족한 메모리는 얼굴에서 잡다한 결함을 지워버린다. 한정된 메모리가 인물의 이상화(理想化)에 필요한 추상(抽象)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셀카에 대한 열광은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물론 최근에 폰카도 화질이 엄청나게 좋아졌다. 셀카족들에게는 그저 반갑기만 한 일이 아니다. 고화질(HD) TV에서는 과거에 보이지 않던 세트의 결함들도 눈에 들어오는 법. 해상도가 높은 폰카는 그 빵빵해진 정보량을 가지고 얼굴의 현실에 관한 진리를 사정없이 폭로할 수 있다.
이어서 ‘퍼스펙티브’의 문제. 이른바 ‘얼짱 각도’라는 것이 있다. 셀카족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의 얼굴이 가장 멋있게 나오는 각도를 체득했다. 3차원 공간을 차지하는 물체를 2차원의 평면 이미지로 번역할 때, 거기에는 이론적으로 무한수의 각도가 존재하게 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웬만큼 생긴 얼굴이라도 꽤 멋있게 보이는 각도가 적어도 하나쯤은 존재할 수 있다는 것. 무한수의 각도 중에서 마음에 드는 하나를 뽑아낸다는 의미에서 얼짱 각도 역시 미적 이상화를 위한 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포토숍과 같은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이미지 프로세싱이 존재한다. 내가 보기에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노선이 있다. 하나는 형태를 변형시키는 고전주의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색채나 조명을 조작하는 바로크 노선이다.
아무튼 이런 이상화 과정들을 거치면, 이미지는 원래의 피사체와 거의 인과적 연관을 찾아보기 힘든 순수한 판타지가 된다. 언젠가 한 TV 프로그램에서 ‘인터넷의 얼짱‘으로 알려진 어느 여고생을 찾아가 그의 실제 얼굴을 보여준 적이 있다. 비교의 결과는 물론 충격적이었다.
대중이 셀카로 자신의 이미지를 미적으로 이상화할 때, 그 모범이 되는 ‘미의 이데아’는 당연히 대중문화의 스타들이다. 오늘날의 문화산업은 현대인의 종교다. 자신의 삶을 미학적으로 조직했던 그리스는 다신교 사회였다. 그들은 삶의 가치와 이상들을 모두 신으로 의인화해, 그것들을 조각상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했다. 그리스인들이 신을 닮으려 했다면, 현대의 대중은 스타를 닮으려 한다. 셀카는 불완전한 현실의 여체들로부터 완전한 아프로디테의 형상을 추출하던 피디아스의 조각칼이다.
자본주의 방식으로 재현되는 ‘자기 연출 대중’제 블로그에 올린 사진 속의 얼굴, 그리고 아침 세면대의 거울에 비친 얼굴. 전자는 이상이요, 후자는 현실이다. 전자는 환상이요, 후자는 진실이다.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테크놀로지는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라캉의 거울처럼, 셀카 속에서 대중은 완전해진 자신을 본다. 그리스인들은 삶을 아름답게, 더 아름답게 만들어 그 극한에서 신이 되기를 꿈꾸었다. 디지털 시대의 자본주의적 대중은 제 얼굴을 아름답게, 더 아름답게 만들어 그 극한에서 스스로 스타가 된다.
현실을 보지 못하고 이상에 매달리고, 진실을 거부하고 환상에 집착하는 것을 혹자는 허위의식이라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디지털 대중의 태도는 단호하게 유미적이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플라톤의 집착보다 예술에 대한 니체의 열정을 선호한다. 니체의 말대로 “진리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이 아니던가. 이 디지털 유미주의의 기술적 전제 중 하나가 바로 셀카. 미학적 환상은 오늘날 그저 허구를 넘어, 디지털 경제를 움직이는 물질적 현실이 되었다.
그의 유명한 논문에서 발터 베냐민은 ‘자기를 연출하는 소비에트의 대중’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사진과 영화라는 복제기술이 인민대중으로 하여금 예술작품의 영웅(=주인공)이 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대중매체에서 신분제를 깨뜨리는 사회주의적 평등주의의 가능성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반대로 그의 꿈은 외려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실현된 듯하다. 영화로 자기를 연출하던 사회주의적 대중은 오늘날 셀카로 자신을 연출하는 자본주의적 대중이 되었다.
<hr>셀카에는 배경이 없다‘기술이 인간을 바꾼다’는 테제의 유용한 예, 그러나 셀카가 ‘정직한 삶의 기록’이 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
■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과
21세기 대한민국은 ‘외로움’이 일상화된 시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의 35%는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며, 여행을 떠나는 관광객의 41%는 친구 없이 홀로 길을 나선 이들이다. 이같은 추세라면 2030년에는 도시에 사는 젊은이의 60%가 형제 없이 자라고, 20대의 55%는 부모와 떨어져 혼자 생활을 하게 될 전망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선 ‘혼자서도 재미있게 노는 법’이 인기다. 인터넷에 올라온 온갖 종류의 ‘혼자 노는 법’에 놀라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셀카는 ‘혼자 놀기의 진수’! 인터넷 서핑과 컴퓨터게임, 웹툰과 더불어, 아인슈타인의 ‘일상적 상대성이론’(시간의 속도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을 체험할 수 있는 대표적인 ‘시간 죽이기’ 문화다.
셀카란 카메라로 자신의 모습을 직접 찍는 행위를 말한다.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직접 담는 것은 사진의 역사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셀프 포트레이트’(self-portrait)라는 장르로 익숙한 문화다. 처음 사진 기술이 발명되면서 가장 먼저 등장한 장르 중 하나도 바로 ‘초상 사진’이었다. 왕실과 영주들에게 억압과 착취만 당했던, 그때까지 자신의 초상화를 갖지 못했던 소시민들에게 카메라를 이용해 초상화를 선사하게 된 것은 사진 기술의 문화사적 의미이기도 하다.
1970년대 후반, 미국의 여성 사진작가 신디 셔먼은 ‘무제 영화 스틸’(Untitled Film Stills·1977)이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기존의 작가들처럼 사진 속에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지 않고 평범한 포즈로 새롭게 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아 당시 사진계에 충격을 주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셀카를 찍는 것 역시 ‘개인사적 순간의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자연스런 자신의 일상을 매 순간 담아내려는 소박한 노력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신디 셔먼’이다.
셀카가 이처럼 자연스런 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생활필수품이 돼버린 ‘디카’(디지털카메라)와 ‘폰카’(휴대전화 카메라) 덕분이다. 특히나 ‘휴대전화와 디지털카메라가 만나면서’ 생긴 문화라는 점에서, 과학자들은 21세기 셀카 문화를 ‘기술이 인간의 문화를 바꾼다’는 테제의 유용한 예로 간주한다. MP3가 음악감상 문화를 바꾸고, 포토숍이 대통령 선거 풍토를 바꿨듯이 말이다. (2004년에는 28%의 휴대전화에만 카메라가 내장돼 있었으나, 2009년에는 출시된 휴대전화의 89%에 카메라가 내장돼 있다.)
삶을 자동으로 기록하는 ‘라이프로그’기술적으로 휴대전화 안에 디지털카메라가 들어가는 게 쉽지 않았던 이유는 고화소(megapixel)의 전하결합소자(CCD) 카메라 모듈과 대물렌즈의 사이즈를 줄이는 데 한계가 있어서였다. 그러나 수요가 있으면 과학기술자들은 밤을 새우도록 강요받는 법. 그들이 밤을 새우면, 스티븐 킹의 소설 제목처럼 ‘결국 모든 일은 벌어진다’. 놀랍도록 크기가 줄어들고 있는 디지털카메라 덕분에, 셀카 문화는 앞으로도 한동안 융성하리라 짐작된다.
과학자들이 자신이 이끌어낸 셀카 문화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일상적 삶을 기록하는 것의 소중함’이었다. 사람들은 마치 일기를 쓰듯 자신의 소소한 삶을 기록해줄 무언가를 오랫동안 찾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요즘 문화기술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삶을 자동적으로 기록해주는 일명 ‘라이프로그’(life log)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다. 블로그처럼 자신이 글을 써서 올리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설치된 (혹은 내가 들고 다니는) 장치가 내 모습과 목소리, 심지어는 내 생각과 감정을 읽고 기록하는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야후(Yahoo!)에서 하고 있는 거대한 라이프로그 프로젝트도 그중 하나다. 나의 일상이 낱낱이 블로그에 사진과 함께 자동적으로 올라가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쉽진 않지만 언젠가 성공한다면 ‘대박’이 아니겠는가! (이 경우에도 스티븐 킹의 예언이 들어맞을까?)
일본의 과학자들도 라이프로그 시스템에 관심이 큰데, 그들의 접근은 더욱 엽기적이다. 집에 카메라 24대를 설치해놓고, 나와 내 가족의 삶을 24시간, 365일, 70년간 찍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쌓이게 될 동영상 데이터의 양은 ‘2층짜리 건물 한 채’ 크기. 문제는 이 거대한 데이터 더미에서 다시 보고 싶은 순간을 찾을 때 난감하다는 것이다. 원하는 데이터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 (일상이 데이터화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고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젊은이들이 집이나 카페에서 셀카를 찍는 정도는 ‘애교’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주머니에서 쉽게 꺼내 가장 가까운 거리(카메라와 나 사이의 거리는 70cm)에서 내 모습을 담는 셀카는 점점 ‘정직한 삶의 기록’에서 멀어지고 있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현재 휴대전화에 들어 있는 카메라, 즉 폰카가 피사체와의 거리와 각도, 조명 등에 따라 크게 변형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기술적 한계 때문이다. 포토 집적회로기기의 발달로, 회전식 액정표시장치(LCD)와 회전식 렌즈가 디카에 장착되면서 카메라의 크기는 매우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사진의 질’에는 한계가 있다. 과학자의 눈에는 인터넷과 싸이월드에 올라와 있는 수많은 셀카 이미지들이야말로 ‘과학기술에 의한 정보의 왜곡 현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로 보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실제로 셀카족들은 정확한 자신의 모습을 찍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셀카만의 이미지’를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확한 삶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모습을 가장 예쁘게 변형해서 담고 싶은 ‘나르시시즘적 욕망의 구현’이다. 그들은 이미 테크놀로지 위에 올라탄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시행착오로 폰카의 단점을 파악하고 때론 그 변형을 극대화한다.
이른바 ‘얼짱 각도’가 바로 그것 아닌가! 45-15도(팔을 쭉 뻗어 옆으로 45도, 위로 15도 정도 위치)로 사진을 찍으면, 눈은 크게, 얼굴은 갸름하게 나온다는 셀카 촬영의 이 고전 기법은 셀카족들이 오랜 경험을 공유해 터득한 ‘폰카 왜곡기술 활용법’이다. 여기에 고수는 ‘조명발’까지 활용한다.
가장 왜곡된 ‘욕망의 기록’내가 찍음에도(혹은 내 가장 가까이에서 찍음에도),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가장 왜곡된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셀카는 ‘삶의 기록’이 아니라 ‘욕망의 기록’이다. 우리는 셀카 안에서만큼은 눈이 사탕만큼 크고, 턱이 송곳처럼 가늘며, 얼굴이 핏기 없이 뽀얀 ‘일본 망가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그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고 보여주며, 그것이 내 진짜 모습인 양 ‘얼짱 대회’를 치른다.
우리들의 낡은 앨범에 담긴 어린 시절 사진들과 달리, 셀카에는 배경이 없다. 내 삶의 중요한 순간임을 알아챌 어떠한 실마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나’, 그리고 내 옆에서 나와 얼굴을 같이 비비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만이 포착된다. 과학자들이 휴대전화에 와이드 앵글 렌즈를 담아주면, 셀카족들이 ‘배경’도 함께 담으려고 노력할까? 아마도 그들은 카메라를 더욱 가까이 당겨 클로즈업된 자신을 담을 것이다. 21세기 ‘폰카’ 과학자들은 지금 ‘욕망을 찍는 사진관’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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