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이전의 구술문학처럼 공동 작업의 산물, 계몽주의가 목표로 삼았던 민주주의의 궁극적 완성
■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독어독문과
백과사전은 계몽의 산물이다. ‘백과전서파’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백과사전은 계몽주의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추진했던 사업이다. 계몽의 본질은 말할 필요도 없이 모든 시민들에게 문자를 읽고 쓰는 능력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이 ‘문맹 퇴치’의 프로젝트는 물론 근대 민주주의의 성립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권력은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매체를 독점한 자들의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자기가 자기를 통치하는 제도. 따라서 민주주의가 가능하려면, 모든 국민이 정보의 저장 및 전달 수단인 문자를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
네트워크가 깔리면 그 위로 콘텐츠가 흘러야 하듯이, 문자능력을 갖추게 되면 뭔가 그것으로 읽을거리가 필요해진다. 계몽주의자들이 백과사전 편찬에 그토록 열을 올렸던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그들은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를 문자로 옮겨 기록해두려 했다. 이 거대한 ‘세계의 책’을 편찬함으로써 그들은 민중에게 자연을 지배하고 사회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빠짐없이 제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과사전’은 문자문화의 총아로, 인민권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오래된 격언을 푸코가 재해석한 대로, 아는 것(=지식)은 힘(=권력)이 아닌가?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웬만한 집안에는 책장수들의 성화와 설득에 넘어가 월부로 구입한 백과사전이 있었다. 우리 집안에도 한 질이 있었고,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호기심 많은 소년의 궁금증을 풀어줄 정도는 됐다. 사전에 모르는 낱말이 나오면 또 다시 사전을 찾으며 지식의 미로 속을 헤매다 보면,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는 제법 똑똑한 축에 속하게 된다. 몸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사춘기 때는 성적 호기심에 끌려 남녀의 특정 신체기관을 가리키는 야한(?) 단어들을 찾아 읽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 많던 백과사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제 백과사전은 도서관에나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것이 돼버렸다. 왜 그렇게 됐을까? 그것은 정보 전달의 주요한 수단이 텍스트에서 이미지와 사운드로 바뀐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글을 써서 먹고살아야 하는 먹물에게는 여전히 백과사전이 필요하다. 특히 세상의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 칼럼니스트에게는 더욱더. 게다가 요즘은 전문 영역에서조차 ‘지식의 통섭’이니 뭐니 해서 전공 외의 많은 것을 넓게 아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그때 등장한 것이 ‘위키피디아’다.
위키피디아의 성공은 놀라운 일이다. 누가 이름 없이 남들을 위해 자신의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 글은 다른 사람의 손에 수정되거나 삭제될 수도 있지 않은가? 위키피디아는 디지털 시대의 백과사전이다. 어떤 의미에서 위키피디아는 문자 이전의 구술문학에 가깝다. 가령 는 호메로스라는 한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대대로 그 시를 음송해 후대에 전달해준 수많은 시인들의 공동 작업의 산물이 아니던가. 디지털과 더불어 찾아온 새로운 구술문화에서도 개인으로서 저자성(authorship)은 포기된다.
영국의 어느 교수는 요즘 학생들이 보고서를 쓸 때 옥스퍼드 사전 대신에 위키피디아를 참조한다고 한탄한다. 물론 위키피디아는 검증된 저자들이 집필한 사전에 비해 깊이나 정확성, 혹은 신뢰도가 떨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한계의 이면에는 백과사전이 갖지 못한 장점들도 있다. 가령 인쇄된 백과사전의 지식이 다소간 과거의 것이라면, 전자의 형태로 존재하는 위키피디아의 지식에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생생함이 있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으로 개인적 저자의 한계를 뛰어넘는 ‘집단지성’을 구현할 수도 있다.
논리보다 ‘포스’가 더 중요한 구술성 사회하지만 위키피디아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다른 데 있다. 과거의 백과사전은 필자와 독자의 신분적 구별 위에 서 있었다. 이 관계에서는 유식한 지식인이 무식한 민중을 깨우치는 일방적 ‘계몽’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위키피디아는 필자와 독자의 이 신분제를 무너뜨렸다. 거기서는 독자가 필자가 된다. 계몽주의가 민주주의 프로젝트의 일환이었고, 민주주의가 자기가 자신을 다스리는 ‘자치’의 이념이라면, 위키피디아는 이 계몽주의가 목표로 삼았던 민주주의의 궁극적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민중은 스스로 가르치고, 스스로 배운다.
우리나라에서는 위키피디아가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한국 사회에 강하게 남아 있는 구술문화의 습속 때문일 것이다. 서구의 경우 16세기 구텐베르크 인쇄술, 17세기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18~19세기의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탄탄한 문자문화의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또다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구술적 상황에서도 문자문화의 합리성이 그대로 살아남아, 디지털 구술성과 성공적으로 융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키피디아는, 한마디로, 문자문화의 총아(백과사전)가 디지털 구술문화의 옷을 입고 새로 탄생한 것이다.
한국은 경우가 다르다. 대다수 사회 성원이 문자를 읽고 쓰는 시대로 접어든 지 불과 몇십 년밖에 안 됐다, 이렇게 문자문화의 전통이 짧다 보니, 구술문화의 습속이 사회에 강하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에서 인터넷의 사용은 정보적이라기보다는 친교적이다. 정보 대신에 반감이나 교감이 흐르고, 논리보다는 ‘포스’가 더 중시되는 것은 구술성이 강한 사회의 특성이다. 한마디로 한국 사회는 문자문화 이전의 구술적 습속이 디지털 구술매체를 만나 그대로 굳어버린 경우에 속한다. 서구와 한국의 이 차이는 지식 검색에도 반영된다.
가령 위키피디아를 보자, 그것은 1인칭(필자)-3인칭(주제)의 고독한 기록의 관계 위에 서 있다. 반면 네이버 지식iN을 보자. 그것은 철저히 1-2인칭의 대화 패러다임 위에 구축된다. 누군가 “이것 좀 가르쳐주세요. 가르쳐주시는 분, 내공 드립니다”라고 올리면, 누군가 거기에 답글을 단다. 그중에는 “어쩌고저쩌고…” 한참 늘어놓고는 “근데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라고 글을 맺는 이들도 있다. 그래도 당신을 돕고는 싶었다는 친교적 제스처다. 오가는 정보 역시 생활밀착적인 것들이다. “동교동 근처의 맛집 좀 가르쳐주세요.”
가 일본에서 잘 안 되고, ‘싸이월드’가 미국에서 잘 안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 잘되는 게임이 미국에서는 잘 안 되고, 미국에서 잘되는 세컨드라이프가 한국에서 잘 안 되는 데도 다 이유가 있다. ‘컬처 코드’라고 하던가? 디지털 테크놀로지에서도 기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그 기술을 사용하는 사회의 문화적 습속의 층위다. 사실 한국의 인터넷 인프라가 이렇게 발달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그 구술적 습속 덕분이었다. 강한 구술문화의 습속이 첨단기술이 제공하는 디지털 구술문화의 상황을 만났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행운의 이면, 치러야 할 대가하지만 이 행운의 이면에는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문자문화의 합리성을 강화해야 할 시기에 인터넷이라는 막강한 구술매체가 등장함으로써, 감성과 정서가 과잉한 상태가 그대로 지속되는 상황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한국에서 위키피디아가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위키피디아가 21세기를 이끌어갈 대중지성의 가장 강력한 발현 형태라고 할 때, 위키피디아의 부진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학자들, 집단지성 광장에 내몰리다
혁신에 굶주린 기업에게 단비 같은 위키식 기술시장, 기초과학 연구지원은 줄어들고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는 건 아닌가
■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과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세계만국박람회 때 있었던 일이다. 날마다 수만 명의 인파가 몰리다 보니, 박람회장 안에선 전시관뿐만 아니라 카페테리아와 길거리 노점상까지도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러다 보니 아이스크림을 담을 콘과자와 컵이 금세 동이 나 아이스크림을 더 이상 팔지 못하는 아이스크림 가게들이 종종 생겨났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옆집 와플가게 주인이 아이스크림가게 주인에게 제안을 하나 한다. 우리 집 와플을 원추형으로 둥글게 말아 아이스크림을 담을 수 있도록 해줄 테니, ‘와플콘 아이스크림’을 같이 팔자고! 이렇게 해서 ‘와플콘 아이스크림’은 1904년 세인트루이스 세계만국박람회가 인류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이 되었다.
2001년 31개, 2009년 1천만 개여러 사람들이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서로 의견을 공유하며, 각자 자신이 가진 것을 기여하며 참여하고, 서로 보완하는 정신. 이것이 바로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의 핵심이다.
우리가 구글에 정보를 찾아달라고 키워드를 입력하면, 구글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은 웹사이트들을 검색해 ‘가장 유용한 정보’라고 알려주고, 리누스 토발즈(Linus Torvalds)가 마이크로소프트에 대적할 만한 OS인 ‘리눅스’(LINUX)의 프로그램 초판을 공개해 수많은 소프트웨어 마니아들이 수정하고 개선하게 해 믿을 만한 프로그램으로 진화시킨 것, ‘미디어몽구’ 같은 개인 미디어가 역사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고 대중매체가 포착하지 못한 ‘역사의 이면’을 동영상으로 담아내는 것, ‘크레이그스리스트’(Craigslist)나 ‘아이러브스쿨’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한 개인 정보를 공유하거나 인간관계를 돈독히 해주는 사이트들, 이것이 바로 집단지성의 예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으로 집단지성의 힘을 보여준 사례는 단연 ‘위키피디아’(Wikipedia)다. 위키피디아의 기원은 지미 웨일스와 래리 생어가 무료 온라인 백과사전 뉴피디아(Nupedia)를 만들었던 20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만 해도 뉴피디아는 누구나 특정 항목에 대한 내용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하되, 전문 편집자들이 내용을 검토해 최종 결정을 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그러다가 누구나 웹페이지에 접속하면 편집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위키’와 접목해 위키피디아가 탄생한 것은 2001년 1월15일.
그때부터 위키피디아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속성장을 거듭한다. 2001년 1월 위키피디아가 처음 시작됐을 때만 해도 이 무료 백과사전에 들어 있는 단어는 겨우 31개. 그러나 그 뒤 인터넷 사용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각종 언어로 표현된 항목의 합계는 2007년 600만 개를 넘어섰고, 2009년 현재 1천만 단어를 돌파했다. 위키피디아는 ‘자발적인 참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위키피디아의 사용률 또한 브리태니커를 크게 앞지른다. 사이트 이용자 수 비율을 추적 계산한 결과에 따르면, 2007년 3월 브리태니커 온라인 백과사전의 이용자 비율은 0.03%인 데 반해, 위키피디아는 5.87%로 무려 195배나 더 높다. 방문자 수를 기준으로 한 웹사이트 순위에서도 위키피디아가 11위에 오른 데 반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4449위에 머물렀다. (누구나 한 번쯤 위키피디아를 사용한 경험이 있겠지만, ‘위키’가 무슨 뜻인지는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위키(Wiki)란 하와이 원주민어로 ‘빠르다’라는 뜻이며, ‘What I know of it’(이것에 관해 내가 아는 것)의 앞글자를 딴 말이다.)
위키피디아에 대한 인터넷 사용자들의 애정 또한 유달리 깊다. 지미 웨일스가 위키피디아 프로젝트에 투자한 금액은 대략 5억원 정도. 하지만 (21세기북스·2009)의 저자 찰스 리드비터에 따르면, 일반인들이 위키피디아 재단에 기부하는 금액은 갈수록 늘어나 현재 20억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그러나 위키피디아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무료 백과사전에 쏟아지는 칭찬과 비난은 얼핏 엇비슷한 수준으로 보인다. ‘협업을 통한 창조성과 집단지성이 이룬 기적’이라며 상찬을 아끼지 않는 예찬론자들도 많지만, 누구나 제멋대로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해 ‘지식의 권위’를 떨어뜨렸다는 비판론자들도 만만치 않다. 비판론자들에 따르면, 위키피디아는 ‘아마추어들이 전문가들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발급한 무료 승차권’이라는 얘기다.
위키피디아가 가장 공격받고 있는 대목은 ‘검증되지 못한 품질’이다. 비판론자들은 비전문가들이 작성했고 쉽게 수정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는 정확도가 많이 낮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정말 위키피디아는 양적으론 크게 성장했지만 ‘품질’ 면에서는 문제가 많을까?
영국의 저명한 과학저널 는 전문적인 검토자들에게 똑같은 42개 항목에 대해 위키피디아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설명을 비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검토자들은 사실 기록 오류와 누락, 그리고 잘못된 설명에 대해 위키피디아에서는 162건, 브리태니커에서는 123건을 찾아냈다. 이처럼 위키피디아는 완벽하지 않다. 출판사들이 실수를 하듯, 위키피디아도 실수를 한다. 그러나 는 위키피디아와 브리태니커의 정확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웹 2.0 시대, 위키피디아의 미래는 밝게만 보인다. 더 크게 성장할 것이며, 더 많은 사용자들이 위키피디아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위키피디아가 소중한 이유는 다음 세대에게 “공유할수록 서로 부유해진다”는 인생의 놀라운 진실을 가르쳐주었다는 데 있다. 위키피디아는 우리에게 지식을 운반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참여와 공유의 습관을 가르치고, 그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위키피디아를 바라보는 과학자의 마음이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다. 벌써부터 집단지성이 상업적으로 물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컨설팅 전문가이자 (21세기북스·2007)의 저자 돈 탭스코트와 앤서니 윌리엄스는 기업들이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능한 인재를 찾아내 난해한 문제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하는 혁명적인 시장에 주목했다. 그들은 이러한 시장을 ‘이데아고라’(Ideagoras)라고 부른다. 이 현대판 아고라는 혁신에 굶주린 회사들을 위해 전세계로부터 아이디어와 발명품, 그리고 과학적인 전문지식을 끌어모으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가 만든 퇴직과학기술자의 벤처기업 자문 시스템이 20세기 정부 주도형 방식이라면, 이데아고라는 21세기형 자발적 네트워크 방식의 짝짓기 시스템인 셈이다.
기업에서 제시한 연구 과제와 과학자를 연결해주는 이 혁명적인 시장을 통해 기업들은 앞으로 내부적으로는 핵심 인재를 키우면서 동시에 외부적으로 보완적인 아이디어를 구할 수 있다. 이제 기업들은 세계가 곧 자신들의 연구·개발 부서가 될 것이다. 이제 폐쇄적이고 단선적인 회사 내 연구·개발 풍토는 이데아고라로 인해 큰 변화를 겪을 것이다.
과학자들이 광산의 카나리아가 된다면그러나 개인적으로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점점 과학자들은 안정적인 연구 터전을 잃고 이데아고라라는 ‘외로운 경쟁의 광장’에 내몰리게 되는 건 아닌가 하여 염려스럽다. 게다가 과학기술은 너무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어 대기업조차도 더 이상 제품에 관련된 기초 분야들을 모두 연구할 수 없다. 이제 대기업들은 기초과학 연구지원을 줄이고 이데아고라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하진 않을까?
‘광산의 카나리아’라는 표현이 있다. 예전 광부들이 갱도에 들어갈 때 유독가스에 민감한 카나리아를 함께 데리고 들어갔다는 데에서 유래한 이 표현은 ‘산업 전반에 불어닥친 혁명의 첫 번째 희생자’를 의미한다. 아마도 과학자들이 광산의 카나리아가 된다면, 이후에는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뒤를 이을 것이다. 위키피디아 시대에 ‘광산의 카나리아’는 웹 2.0과 집단지성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업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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