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이야기지만 인류의 모든 계급사회의 보편적 특징 중 하나는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이다. 계급사회가 처음 발생한 청동기부터 오늘날까지 가부장제의 형태는 계속 바뀌어왔지만 그 본질은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 물론 세계 최초의 여성 사학자라고 할 여군자(女君子) 반소(班昭·45∼116)가 (女誡)라는 여성을 위한 훈화를 지어 “내조 잘하는 정숙한 부인”으로 모범적 여성의 이미지를 제시한 한나라와, 전문직과 관리직의 약 30%를 여성이 차지해 ‘우먼 파워’를 과시하는 오늘날 상하이는 천양지차를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에서 전통적 ‘부덕’(婦德) 담론의 파괴와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아무리 가시화됐다 해도, 정치·군사적 권력만큼은 남성이 거의 독점하는 일이 바뀌지는 않았다. 또 유교적 부인관(婦人觀)의 파괴는 ‘우먼 파워’의 성장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미인 마케팅’의 천국인 중국에서는, 남성에게 ‘눈요깃감’이 되는 발가벗긴 여성의 신체는 물품 판매를 가장 효과적으로 촉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성 억압의 형태나 정도는 바뀔 수 있어도 그 본질은 계급사회가 존재하는 이상 바뀌기 힘들 것이다. 물론 중국 영토에서도 평민 사이에서 여성이 전통적으로 가장 노릇을 해 동시에 몇 명의 남편을 거느릴 수 있는 윈난·쓰촨성의 모수족(摩梭族)과 같은 모계(母系) 중심의 ‘특이한’ 소수민족이 섞여 산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모계사회의 전형’으로 유명한 티베트계의 모수족만 해도, 귀족만큼은 부계 중심의 가통을 늘 지켜왔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계급 사이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가 고금동서 계급사회의 보편적 원칙이라면 고대 한반도는 과연 예외이겠는가. 2∼3세기에 해당되는 한반도 관련 중국 쪽 기록은 한반도에도 가부장제가 이미 고질화돼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예컨대 고구려와 계통적으로 가까웠던 부여국에서는 “질투심이 많은 여자들을 특히 싫어해 죽임에 처하게 하는데, 죽인 뒤에 그 시체를 산에 버려 썩게 한다. 만약 친정 댁에서 딸의 시체를 거두어가려면 혼인 당시에 혼납금으로 남자 쪽에서 받았던 우마(牛馬)를 다시 남자 쪽에 반환해야 한다.”( 동이전) 여성의 행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가부장이 그 여성을 죽이는 것은 오늘날 같으면 ‘잔인한 범죄’에 해당되겠지만 고대사회에선 꽤 일반적인 듯했다. 가 전해주는 김춘추(태종무열왕)의 결혼설화를 기억하는가. 지체가 그리 높지 못한 가야계 김유신(595∼673)이 신분적 제한을 뛰어넘으려고 자신의 막내 여동생 문희를 왕족 김춘추에게 시집보내려고 애썼다. 먼저 둘을 만나게끔 해주었는데, 김춘추와 ‘야합’한 문희가 임신을 하자마자 김유신이 소문부터 퍼뜨린 뒤 보란 듯이 경주 남산에서 여동생을 묶어놓고 화형시키려는 ‘쇼’를 벌였다. 결국 선덕여왕이 연기를 보고 김춘추가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두 사람을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결혼시켜주었는데(권1, ‘태종춘추공’)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여동생의 목숨이 아버지의 사망에 따라 가부장이 된 김유신의 손에 달려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그가 벌인 화형식이라는 ‘쇼’가 꼭 빈 공갈·협박만은 아니었다고 선덕여왕도 김춘추도 충분히 생각할 만했다. 잔혹한 풍습이라고? 중국인이 본 6∼7세기 말갈의 풍습은 더하면 더했다. 즉, 아내가 남과 간통한다는 사실을 제3자가 그 남편에게 알려주면 남편이 그 아내를 죽인 뒤에 간통 사실을 알린 이까지 죽임으로써 가문의 명예가 간음 소문으로 손상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말갈의 풍속이었다고 한다.(, 동이열전 말갈) 한편 백제에서는 간통한 부인을 죽이지 않고 남편 집의 노비로 삼는 등 그 노동력을 살리곤 했다.(, 이역열전 백제) 혼외정사의 경우에는 남녀 양쪽을 돌로 쳐 죽이라는 고대 유대인 사회의 법칙(구약 )과 달리, 백제에서는 간통한 남성에 대한 처벌은 명기돼 있지 않다. 그러나 부여의 경우에는 고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간음한 남녀 두 사람을 다 죽이는 것이 법이었다. 부인이 남편 집안의 소유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는 백제의 계백장군처럼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처자를 죽이는 것은 ‘영웅다운 행동’이었지만, 부인과 외간 남성 사이의 ‘간통’이란 남편의 가장 귀중한 재산에 손해를 입히는 ‘최악의 도둑질’로 여겨졌던 것이다.
야합엔 관대, 간통엔 철퇴간통은- 적어도 ‘가통’이 중요시되는 귀족사회에서는- 금기시되곤 했지만, 혼전 섹스나 부모의 동의 없는 사실혼, 이른바 ‘야합’은 고대 한반도에서는 거의 문제되지 않았다. 물론 김유신처럼 여동생의 야합과 혼전 임신을 엄하게 다루는 귀족도 있을 수 있었겠지만 한반도 국가들에서 혼전 성교와 사실혼이 동시대 중국에 비해 자유로웠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관찰했던 바다. 예컨대 고구려에 대한 7세기 초반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풍속은 음란하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노는 계집들이 많은데, 그들에게는 일정한 남편이 없다. 밤이면 남녀가 떼를 지어 모여 노는데 귀천의 구분도 없다. 혼인에 있어서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결혼시킨다. 남자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만 보낼 뿐이지 재물을 보내주는 예는 없다.”(, 열전 고구려). 결혼하기 전에 같이 놀아도 좋고, 서로 잘 어울리기만 하면 바로 결혼하고, 신랑 쪽이 결혼에 따르는 비용을 별로 많이 치르지 않는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의 결혼에 대한 아름다운 전설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남녀 간의 자유로운 야합은 고구려 못지않게 신라에서도 행해졌다. 김유신이 김춘추와 야합한 여동생을 엄히 대하는 척했지만, 김유신의 부모인 김서현과 왕족계의 만명 부인부터 야합의 전형적 사례였다. 가격(家格) 차이가 커 정상적으로는 결혼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만명 부인이 벼락 치고 비가 쏟아지는 날에 도망쳐서 애인이 있는 곳으로 간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도덕률로 봐서는 불효막심이었겠지만 신라에서는 그렇지도 않았다. 7세기 신라의 대표적인 유교학자 강수(强首)마저도 아버지의 명령을 무시하고 일찌감치 야합한 ‘미천한 대장장이’ 딸과의 사랑을 계속 키워나가지 않았는가.( 권46, 열전, 강수) 결혼이란 당사자들의 마음이 우선 중요한 문제로 여겨지다 보니 부모의 간섭을 물리쳐도 불효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섹스에는 개방적이지만 가족 안에서 가부장의 권리가 공고한 신라 사회 풍속의 독특한 측면을, 의 또 다른 이색적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김춘추의 서자인 차득공(車得公)이 660∼670년대쯤 재상에 임명돼 취임하기 전에 지방을 거사 차림으로 밀행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광주 지방에서 안길이라는 향리의 집에서 묵게 됐는데, 안길이 자신의 처첩 3명 중 한 명을 “오늘날 손님에게 몸을 바쳐주면 나와 평생 행복하게 살겠다”고 설득해 “멀리에서 온 손님”에게 숙식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내와의 하룻밤 섹스까지 제공했다는 이야기다.(권2, 문무왕 김법민) 물론 이 대목에서 안길이 자신의 처첩들에게 ‘명령’하지 않고 ‘설득’해서 외간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게 했다는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오늘날의 ‘스와핑’을 떠올리는 ‘특수한 관계’의 경우에는 여성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는 이야기다. 또는 ‘아무나’에게 자신의 부인을 ‘빌려주는’ 것도 아니었다. 안길이 “멀리에서 온 손님”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눈치채고 앞으로 자신의 관로(官路)를 더 잘 개척하기 위해 ‘희생’을 자청해 치른 셈이다. 정복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옛 백제 땅 출신인 그에게는, 어쩌면 이와 같은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이상 신라에서 그 위치를 향상시키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북미의 알류트족과 일부 이누이트(에스키모)족, 그리고 17세기 시베리아 서부의 러시아 정착민 등 세계의 일부 종족들에게 발견되는 ‘부인 빌려주기’ 풍습이 고대 한반도에서도 어느 정도 행해졌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조선시대 같았으면 역시 ‘극심한 음란’으로 치부될 일이었겠지만, 660년대 ‘통일 전쟁’으로 인한 옛 백제 지역의 사회도덕 문란상, 즉 6·25 전쟁 직후 남한 사회에서 일어난 ‘자유부인 열풍’과 같은 유의 현상이라고 이해될 수도 있다.
고려 이후 여성 지위 되레 퇴보아내의 성에 대해 가부장이 상당한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고 해서 여성에게 사회적 신분과 역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라가 배출한 3명의 여왕도 유명하지만, 경향의 귀족 여성들에게 관등이 주어질 수 있었다는 것도 중요하다. 545∼550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충북 단양의 신라 적성비(赤城碑)에는- 비록 판독이 어려운 텍스트여서 추측의 성격이 강하지만- 신라의 북방 정복 사업에 몸을 바쳐 숨진 적성인 야이차의 딸 오례혜(烏禮兮)와 사문(師文)에게 외위(外位) 5등급인 찬간(撰干)을 내리라는 진흥왕의 명령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거기에다 딸 사문이 아버지의 재산까지 상속하라는, 그리고 딸 오례혜가 모종의 예속민으로 이해되는 전사(佃舍)를 관리하라는 왕의 분부도 이 비문에서 읽어낼 수 있다. 신라는 지방 유력자의 딸이 중앙에서 하사한 관등을 가져 가문의 재산을 운영하는 등 재지사회 실력자의 역할을 할 수 있던 곳이었다. 여성에게 독립적 재산이 있었기에 승려들에게 신앙이 강한 여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후원자였다. 예를 들어 전남 담양 개선사(開仙寺)의 868년 석등기(石燈記)를 보면 석등 건립을 후원한 이는 경문왕과 그 왕후, 그리고 나중에 진성여왕이 될 공주였다. 가장인 경문왕과 함께 그 부인과 딸의 이름이 따로 명기돼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들에게 독립적 후원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보다 4년 전인 864년에 경문왕의 누이인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는, 경문왕의 귀의까지 다 받은 유명한 선승 지증대사(智證大師·824∼882)에게 자신이 소유하는 땅 안에 있는 안락사(安樂寺)라는 사찰을 통째로 선물하기도 했다. 867년 지증대사에게 땅과 노비를 또 선물한 이 ‘통 큰 시주’가 “미망인을 자처했다”고 최치원이 893년에 지은 비문에 나와 있는데, 그렇게 보면 남편이 죽은 뒤 그 재산을 미망인이 상속받아 관리하는 게 신라에서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이해된다. 와 에는 남의 집에서 품팔이를 해 자신의 아이를 간신히 먹이는 가난한 여성 이야기도 나오지만, 50만 근에 이르는 큰 범종을 만드는 대형 불사(佛事)를 후원할 정도로 재력이 넉넉한 여성들도, 특히 왕족 가운데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재산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지 않다.
가부장적 사회임에도, 고대 한반도에서 여성의 위치가 이만큼 높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종교가 차지한 시대인지라 종교적 상황의 특징부터 봐야 할 것이다. 고대의 종교 생활은 토착종교와 불교의 공존과 상호 영향으로 특징지어지지만, 토착종교도 불교도 후대 성리학만큼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낮추지 않았다. 토착종교에서 지모신(地母神)과 산신(山神)의 중차대한 역할이 바로 여신들에게 맡겨져 있었는데, 그 좋은 사례는 바로 주몽 신화에서 하백의 딸이자 주몽의 어머니로 등장하고 나중에 고구려에서 ‘부여신’의 이름으로 모셔지는 유화(柳花) 부인이다. 여신들의 위치가 중요하다 보니 시조 묘의 주관 사제가 된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의 여동생 아로(阿老)와 같은 여사제의 지위도, 그리고 이에 따라 전체 귀족 여성의 위치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불교는 비록 여성이 남자로 다시 태어나야 성불한다는 등 성차별적 내용도 담고 있지만 출가 수도자나 재가 후원자로서 여성의 역할을 인정해준다. 한계도 있지만 성리학에 비해 훨씬 여성 친화적이다. 거기에다 귀족사회인 신라 같으면 부계와 함께 모계라는 또 하나의 혈통을 중요시했다. ‘어머니 쪽 핏줄’이 중요하다 보니 어머니의 권한도 인정됐다. 이런 이유로 신라 귀족 여성들은 조선시대 양반 규수들에 비해 발언권이 셌다. 여권에 한해 이야기하자면 통일신라와 고려 이후 전통사회의 역사는 ‘진보’라기보다는 ‘퇴보’에 가까웠다.
간통한 여성을 죽이거나 노비로 삼았던 고대인들의 풍속이 오늘날 야만으로 보이듯이,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남아 있는 간통죄는 후대의 입장에서 똑같은 야만으로 보이지 않을까. 지난해 배우 옥소리에게 내려진 유죄판결은, 몇십 년이 지나면 김유신이 여동생을 화형시키려는 ‘쇼’를 벌였던 일만큼이나 여성 억압의 희한한 사례로 보일 것이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참고 문헌1.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청년사, 1998, 311∼327쪽
2. 정구복, 경인문화사, 2008, 303∼324쪽
3. 정재윤, 주류성, 2007, 221쪽
4. 周華山, 北京: 光明日報出版社,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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