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를 싫어하는 이들이 자주 공격하는 마르크스의 명제는 바로 ‘역사 발전 원동력으로서의 계급투쟁’이다. 첫째, 그들이 피지배계층이라 해도 지배계급에 대한 적개심보다는 지역공동체·민족·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더 강하게 느끼며 ‘수직적 갈등’(지배자들과의 갈등)보다 ‘수평적 갈등’(다른 지역·민족·국가와의 갈등)에 더 쉽게 동원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둘째, ‘파괴적 계급투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과연 무슨 생산적인 역할을 하느냐고 묻는다.
물론 얼핏 이 논리는 근사해 보인다. 예컨대 독도와 같은 민감한 문제가 터질 때 원청의 단가 내리기 압력과 기업주의 탐욕으로 100만원도 받지 못하는 하청기업의 비정규직에게 “독도가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일본인이 더 미우냐, 당신을 쥐어짜는 한국 기업인들이 더 미우냐”고 물어보기를 바란다. ‘의식화’ 정도가 높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답은 불문가지다. 그리고 계급투쟁이 내전으로 비화될 경우에는 대단한 파괴를 수반한다는 것도 꼭 틀린 말이 아니다. 1921년, 러시아에서 내전이 종식되고 나서 총공업생산량은 1913년의 18%에 미칠까 말까 했다. 한때 ‘열강’이라고 불렸던 나라에서 대량 아사 사태가 발생하고, 일부 지방에서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의 인육을 먹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 그런 가능성을 각오하고도 혁명을 지향할 것이냐 따지면 머뭇거리고 마음의 동요를 느낄 진보파들은 한두 명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매일 언론의 세뇌에 노출돼 있는 선남선녀의 머릿속이 ‘독도 문제’와 ‘동북공정’, 그리고 어떤 연예인의 파격적인 노출 장면 등으로 가득 차 있다 해도, 장기적 시각으로 본다면 계급투쟁이야말로 역사를 이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이 아니었다면 과연 지금 대한민국이 고임금 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 지배자들이 노동자의 기세에 놀라지 않았다면 과연 의료보험의 전 국민적 보급 등 기초적 복지정책을 취하기라도 했을까. 갑오농민투쟁에 지배자들이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았다면 스스로 노비를 거느리기도 했던 갑오 내각의 각료들이 과연 노비제 혁파, 백정 면천(免賤) 등 급진적 개혁으로 나아갔을까. 1862년의 전국적 민란 사태가 아니었다면 대원군이 관료들의 가렴주구를 제한하고 양반에게까지 호포(戶布)를 거두는 개혁을 단행했을까. 계급투쟁을 제외하고서는 근·현대사 전개의 심층적 논리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계급투쟁 과정을 미화할 필요는 없다. 마오쩌둥 자신도 1949~53년 토지개혁 등의 와중에 70만 명의 ‘지주와 반동’들이 타살당했다고 자백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마오쩌둥 방식의 토지개혁이 아무리 잔혹했다 해도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 어느 정도 지켜지는 중공이 토지개혁이 제대로 실행된 적이 없는 인도에 비해 훨씬 더 효율적으로 발전돼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근·현대사의 전개가 계급투쟁을 원동력으로 했다고 해서 전근대 역사도 그랬던가? 물론 여기에서 정도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수직적 권력 네트워크(국가적 지배 등)와 함께 여전히 강력한 국지적 권력 네트워크(부호, 지역 유력자 등이 이끄는 마을 공동체)가 공존하는 전근대 사회에서는 ‘어질지 못한’ 국가 권력과 그 지역적 앞잡이들이 타도 대상이 될지라도 공동체와 가족 안에서의 권력관계는 잘 문제시되지 않는다.
농민 출신으로 나라 세운 유방과 주원장예컨대 홍경래의 유명한 반란(1812년)의 경우 그 주도층은 거의 전부가 투쟁 자금으로 500~1천냥씩이나 갹출할 수 있는 지주, 향임(鄕任), 상인 등 지방 세력가들이나 그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홍경래 자신과 같은 풍수지리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이 제시한 임금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 평소 탐관오리와 무능한 정부를 미워하기도 한 수많은 가난뱅이들이 그들의 모집에 응해 거사에 가담했고 정부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반란군이 지배한 지역에서 기존의 계급적 질서는 그대로 유지됐다. 즉, 대국가 투쟁이 꼭 ‘우리와 한 집단’인 재지 세력을 향한 투쟁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이다. 또 ‘천명(天命)만 득하면 누구나 치국(治國)할 수 있다’는 유교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던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크게 성공한 농민투쟁 지도자가 임금이 되고,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둔 지도자가 투항해 관직에 들어가는 일, 즉 투쟁세력 안에서의 ‘계급질서 창출’은 보통 일어나는 일이었다. 물론 한나라의 창업주 유방(劉邦)이나 명나라의 건국 군주 주원장(朱元璋)이 모두 농민 반란군 지도자로 출발한 중국과 달리, 한국사에서는 고려왕조도 조선왕조도 특정 지역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해온 호족세력에 의해 창업됐다. 그러나 예컨대 1232년 몽골군의 침략에 직면한 최씨 정권은 백악산(관악산) 일대의 초적(草賊) 지도자 20여 명에게 사절을 보내어 그들을 대접하면서 몽골 세력과의 항쟁에서 고려군의 우군이 되기를 요청했다. 교통의 요충지인 경기 광주·관악산 일대에서 혼란의 시기인 1230년대에 초적 집단들이 거의 권력자가 되다시피 했는데, 관에서도 이를 인정해 그들을 파트너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특정한 상황에서 반란자도 바로 권력자가 되어 기존 지배체제 속에 포획되는 것은, 융통성과 역동성이 강한 유교적 지배 메커니즘 안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한 부분까지 감안하면 기원전 73년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처럼 ‘순수한’, 즉 체제와의 타협의 여지가 없는 계급투쟁은 동아시아 전통시대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최씨 정권도 감히 무시할 수 없었던, 고려의 일부 지역을 아예 장악해 다스리는 듯했던 초적들의 기원은 과연 무엇인가? 초적, “가시덤불 속에 숨어 있는 반란자”들은 대체로 9세기부터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그들이 계급 없는 대동(大同) 사회를 만들려는 꿈을 과연 품었는지 우리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제명을 다한 신라 왕조의 몰락을 재촉했음이 틀림없다. 그들은 국가뿐만 아니고 촌주(村主·지역 실력자)나 사찰 등 광범위한 의미의 지배세력을 공격했다. 사실, 9세기에 들어 그때까지 잠재돼 있던 계급갈등이 한국 사상 최초로 수면 위로 오른 것이었다.
고대사회라고 해서 계급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9세기까지만 해도 특히 신라 지배자들은 각종 포섭 정책을 이용해 그 갈등을 효과적으로 잠재웠다. 예컨대 7세기의 전쟁들은 삼국의 백성들에게 재앙이기도 했지만 신라군에 징집된 많은 평민들에게는 전공을 세워 전리품과 군직, 그리고 가족 전체의 신분상승을 얻을 기회이기도 했다. 열전 제7권에 모아놓은 7세기 신라 군인들의 전기를 보면 해론과 심나, 소나, 열기, 비녕자 등 힘을 다해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몇 명의 평민 출신 영웅들을 찾아낼 수 있는데, 이들의 유족은 대개 후한 상을 받고 신분을 높일 수 있었다. 이외에도 신라 군주들은 특히 7~8세기에 수많은 민심 수습책들을 쓰곤 했다. 문무왕이 681년에 죽으면서 그 유서에서 “백성의 세금과 요역(徭役)을 가볍게 했다”고 자랑했으며( 제7권), 그의 손자인 성덕왕(재위 702~737)은 나라에 기근이 들어 아사자가 생긴 707년 일정 기간 내에 배급제를 운영해 배고픈 이들에게 곡식 3되씩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제8권). 786년 경주의 기아 사태 때도 같은 배급제를 운영한 적이 있다( 제10권). 나름의 복지정책을 실시하지 않고서는 체제가 위태로워진다는, 지금의 이명박 정권이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는 진리를 신라 전성기의 군주들은 똑똑히 잘 알았다.
그러나 9세기에 들어 중앙귀족 사이의 권력 투쟁과 전체적인 관료체제 문란으로 정부의 재정이 위기에 처하자 더 이상 시혜적 정책으로 계급갈등을 봉합할 수 없었다. 즉, 815~817년과 820~821년에 다시 혹독한 기근이 들었을 때 정부는 곡식을 한 번만 나누어주고 말았으며, 배고파 죽을 지경이 되는 백성들이 중국으로 도망가거나 반란자(도적)가 되곤 했다. 그 뒤로는 중앙귀족 사이의 왕위 다툼과 호족세력의 강화로 정부의 구휼 능력이 떨어지고 아직도 중앙정부에 납세를 하는 지방의 백성에 대한 세금 부담이 더욱더 무거워지니 88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백성의 인내는 한계에 도달했다. 즉, 889년에 진성여왕(재위 887~897)이 그렇지 않아도 빼앗길 것을 다 빼앗긴 농민들에게 세금 납부를 또 독촉하자 신라 전국이 농민 반란에 휩싸였다. 2년 뒤 새로이 몸을 일으킨 초적 집단의 지도자 양길의 부하인 궁예가 신라 북쪽을 공략하고, 3년 뒤에 후백제 정권이 세워진다. 성난 농민들로부터 치명타를 입은 신라 왕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쟁 정권들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초적’ 지도자 양길의 부하 궁예
신라 말기나 고려시대의 각종 농민 봉기들에 대해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남한 교과서와 달리 북한 교과서들은 농민투쟁을 ‘반봉건 투쟁’이라고 하여 큰 의미를 부여한다. ‘반봉건’은 과연 어디까지 사실인가? 도적, 초적, 적라적(赤裸賊·빨간 바지를 입은 반란 집단) 등 9세기 농민투쟁 집단들의 일선 구성원들이 지역 실력가부터 중앙정부까지 일체의 착취자들을 없애버려 백성들이 세금을 바치지 않고 살 수 있는 ‘좋은 세상’ 만들기를 꿈꾸었을 가능성은 크다. 889년 전국적 농민투쟁 때 관군보다 진압에 더 헌신적으로 나서 더 많은 희생을 치른 것이 촌주, 즉 현지 실력가들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으로 봐서는 농민의 반항이 계급사회 각층의 지배자들을 다 위협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풀뿌리 차원의 지배·피지배 관계가 대개 문제시되지 않는 상황에서 반란 집단 우두머리들이 그 스스로 지배자가 되려고 하거나 기존 지배자들과 손을 잡는 움직임도 얼마든지 있었다. 예컨대 828년 호족 김범문이 오늘날의 경기도 지역에서 독립해 새로운 국가를 세우겠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우군이 돼준 것은 고달산(경기 양평군 고래산)의 ‘산적’ 수신이 이끄는 100여 명의 도적이었다( 제10권). 신라 정권을 극도로 미워하는 것을 유일한 공통분모로 하는 지방 호족과 지방 반란자 집단의 지도자가, 새로운 계급사회를 만들겠다고 손을 잡은 격이었다. 김범문과 수신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초적 지도자 양길의 부하로 출발한 또 한 명의 농민 반란 지도자인 궁예가 나중에 태봉이라는 신흥국가를 만들지 않았던가.
이와 같은 한계가 있었음에도 신라 사회의 계급질서에 대한 초적의 도전은 대담했다. 불교가 국교였던 신라의 백성으로서 차마 범할 생각조차 가질 수도 없었던 사원까지도 그들은 용감하게 공격했다. 예컨대 802년 왕명으로 창건돼 약 2500결, 즉 거의 30개 마을이 보유할 수 있는 면적의 토지를 소유했던 ‘재벌 사찰’ 해인사는, 889년과 895년 사이에 초적의 공격을 받아 아예 치군(緇軍·승군)이라는 이름의 민병대를 조직해 적극적인 방어 작전까지 펼쳐야 했다. 해인사의 논밭과 재물을 지키다 몇 년 사이에 56명의 승군이 싸움에서 죽은 것으로 봐서는 그때 합천에서 소규모 전투들이 치러졌으리라고 짐작된다. 승려 집단의 처지에서 공격자들은 “이리와 들개 같은 도적”( )이었지만 석가모니의 무소유 정신과 불살생계를 아랑곳하지 않고 광활한 토지를 지배해 노비와 소작인들을 마구 부리고 사병(私兵) 조직까지 거느렸던 해인사는 과연 배고파 죽을 지경이 되는 농민의 눈에 무엇으로 보였을까? 지배자들이 계급투쟁의 잔혹함을 탓하기 전에 자신들의 행동을 피해자 처지에서 한번 객관적으로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진일보한 고려왕조가 열린 원동력신라를 몰락시킨 봉기 농민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미륵보살이 하생하여 뭇 중생들이 평등하고 화목하게 사는 세상’은 비록 오지 않았지만 신라의 폐허에서 일어선 새로운 고려왕조는 더 많은 신분상승의 기회를 일체 양민들에게 주는 등 진일보한 모습을 보였다. 계급투쟁에 나선 민초들의 모든 희망이 다 실현되지는 않아도, 과연 그런 투쟁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약간이라도 나아진 세상은 오겠는가? 촛불집회나 파업 등은 수많은 개인들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지만, 결국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물의 흐름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봐야 한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참고 문헌1.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지음, 푸른역사, 2003, 346~368쪽
2. ‘후삼국의 분열과 왕건에 의한 통일’ 제5집, 홍승기, 1989, 58~82쪽
3. ‘항몽전에 참가한 초적에 대하여’ 상권, 김윤곤, 풀빛, 1981, 44~65쪽
4. ‘농민 반란의 사회학’ 제11집, 방경민, 1985, 30~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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