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서울에서 한국학을 전공한 러시아 후배를 만나 한·러 양국의 시국을 논한 일이 있었다. 한국에서 박정희 정권이 이미 1960년대 중반부터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상당 부분 잃어 학생 등의 가열찬 저항에 부딪친 데 반해, 박정희와 그 행태가 비슷한 푸틴 정권이 왜 그토록 대중적 신망이 두터운지가 토론의 핵심이었다. 결론은, 푸틴 정권이 민족주의적 명분을 더 강력하게 지니는 등 여러 차이점에서 이런 현상이 비롯되지만 1960∼70년대 한국과 같은 ‘재야 지식인’이라는 여론 주도층이 러시아에서 발견되지 않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러시아에서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정권에 비판적인 ‘재야’는 있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언론계의 일각이나 문단, 인권단체 등 몇몇 직업적 영역으로 국한돼 대중적 호소력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푸틴과 박정희 시대, 지식인의 차이
장준하(1918∼75)의 를 애독해온 학생들이 4·19 혁명을 일으키고, 함석헌(1901∼89)의 를 즐겨 보는 젊은 지식인들이 노동현장에 들어가 독재를 뒤집어엎을 노학 연대를 꾸리는 양상은, 러시아에서도 구미 문화권의 어떤 나라에서도 지금 볼 수 없는, ‘한국적’ 내지 ‘동아시아적’ 모습이라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러시아를 보면 ‘글의 힘’은 훨씬 셌다. 식민지 조선에도 희망의 등불이 된 1917년 10월혁명을 일으킨 이들은 네크라소프(1821∼77)의 시와 체르니솁스키(1828∼89)의 소설 를 마음에 새긴 이들이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비교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고등교육 수혜자 사이에서 ‘양심적 재야’의 영향력은 1970∼80년대의 한국이 100년 전의 러시아보다 더 컸다. 예컨대 1917년 10월혁명 당시 러시아 대학생들 중에서는 볼셰비키 편에 선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대다수는 대(大)러시아 민족주의와 유식층의 특권에 여전히 집착했다. ‘운동권’이 장악했다 싶은 1980년대 말의 한국 대학가를, 러시아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글 보는 선비’를 ‘만백성의 스승’으로 보고, 그에게 ‘세상의 폐단을 고쳐 나라를 바로잡을 도덕적 의무’를 부과하는 한국형 ‘지식인관’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물론 직접적 뿌리야 사대부에게 ‘나라를 걱정하고 시폐(時弊)를 바로잡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무거운 책임을 부여한 조선시대에 있지만, 더 깊이 캐보면 ‘한국형 지식인’의 탄생은 이미 삼국시대에 이뤄졌다. 이들의 특징이란 직업적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넓게는 우주적 문제를 고심하고 좁게는 사회문제에 뚜렷한 태도를 취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목숨을 던질 각오로 정부에도 대들 수 있는 것은 바로 지식 기술자와 ‘비판적 지식인’(인텔리겐치아)의 차이인데, 삼국시대에 이미 비판적 지식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컨대 원효와 의상 등 신라 고승들의 스승으로 받들어지는 고구려 출신의 보덕(普德)이란 승려를 보자. 그는 650년(다른 자료에 의하면 667년) 중앙집권적 권력을 강화해 불교가 자율적으로 설 자리를 없애는 연개소문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 고국 고구려를 떠나 백제의 고달산으로 이주한 것으로 유명한 지방민 출신의 승려였다. 고구려에서도 권력에 대한 정치적 반대파에 속했지만, 고구려를 떠난 뒤에도 그는 승자인 통일신라의 중앙승단 진출을 포기하고 망국 유민인 옛 백제인들을 중심으로 교화 활동을 폈다. 신라의 원효나 의상도 그의 명성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됐지만, 그의 백제계 주요 제자들이 세운 사찰들의 위치를 보면 거의 전부가 오늘날 전라북도에 해당하는 통일신라의 ‘변방’이었다.
그는 과연 정치적으로만 ‘비판자’의 위치에 있었던가? 그가 강설했던 등 대승경전들의 사상을 해석자의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었다. 예컨대 전 우주에 편재돼 있는 부처의 영적 몸인 법신(法身)에 대한 그 경전들의 교설은, 전지전능한 중앙집권적 권력의 사회 장악을 합리화할 근거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과 같은 경전들은 동아시아에 ‘평등’이라는 개념을 처음 소개하기도 했다. 부처를 죽이려 했던 죄인들까지도 ‘자신의 자식처럼’ 자비롭게 봐주고 도와주려는 부처와 보살의 평등한 중생관, 아무리 미천하고 못 배우고 악해도 남과 똑같은 불성(佛性·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모든 중생들의 형이상학적 평등…. 현실 사회까지도 평등하게 만들겠다는 사회적 평등론이 아닌 종교적 평등론이었지만, 정복당한 백제 출신들이 이 사상을 특히 좋아했던 것은 과연 단순히 우연이었을까. 어쨌든 의천(1055∼1101)과 이규보(1168∼1241) 등 고려 저술가들도 전주 지역에서 전해지는 보덕에 대한 구비전승을 들었던 것으로 봐서는, ‘평등’을 강설했던 고구려 망명 승려가 현지 주민 사이에서 지닌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한때 보덕 아래에서 수학했던 해동 화엄종의 원조인 의상(625∼702)은, 보덕과 정반대로 변방이 아닌 ‘중앙’ 소속이었다. 진골귀족이라는 태생도 그랬고, 당나라에서 유학하며 동아시아 전체에서 추앙받은 지엄(602∼668)의 제자가 되는 등 화려한 학력도 그랬고, 문무왕(재위 661∼681)의 고문이랄 수 있는 정치적 위치도 그랬다. 676년 왕실이 대준 재정으로 부석사를 창건하는 등 수많은 사찰을 세우고, 각계각층 출신의 제자 3천 명을 키운 의상의 사회적 입장이란 ‘불교계의 지도자’에 가까웠다.
그러면 그가 과연 권력과의 유착을 당연시하는 ‘지식 기술자’에 불과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권력자로부터 보시를 받으면서도, 그는 동시에 권력자들에게 ‘노’라고 말할 줄 알았다. 681년 수도의 성곽을 다시 짓느라고 많은 백성을 동원하려는 문무왕에게 “정도(正道)를 행하지 않는 이상 백성을 괴롭혀봐야 이익이 없다”라고 대담하게 간언해 무리한 토목공사를 중지시키고, 그전에도 그에게 땅과 노비를 선물로 주려는 문무왕에게 “우리 불교에서는 높고 낮은 이들이 다 평등하다”라고 말해 이를 뿌리친 이가 바로 의상이었다( ).
의상 본인이야 귀족 출신이지만 그가 사랑했던 10명의 핵심 제자 중에는 진정(眞定)이라는 이름의 가난뱅이 평민 출신과 노비 출신의 지통(智通) 등 피착취 계급 성원들도 있었다. 늘 목각 불상에게 정성껏 예배하면서 극진한 불심을 보여온 노비 출신의 지통에게 의상이 화엄 사상 강의를 정리해 (錐洞記)라는 강의록을 만들 과업을 준 것으로 보아, 미천한 집안의 출신이라고 해도 의상의 문하에서 차별받을 일은 없었다. 의상의 말대로 그가 세운 화엄종에서는 처음에 ‘높고 낮은 이’들이 두루 평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시적 정치에서 중앙집권적 왕실의 권력을 지지하는 것은 의상의 태도였지만, 적어도 교계라는 미시적 차원에서 그는 참다운 지식인답게 ‘평등’의 실천을 시도했다.
권력자에 대한 대담한 ‘딴지 걸기’를, 의상의 수제자라고 할 표훈(表訓)도 계속 했다. 가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아들이 없어 고민이 많았던 경덕왕(재위 742∼765)이 표훈에게 천제(天帝)에 가서 아들 낳기를 빌어달라고 청하자 표훈이 천제의 말을 전했는데, “왕에게 딸만이 있게 돼 있는데, 무리하게 딸을 아들로 태어나게 해달라 하면 결국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딸로 태어났어야 할 경덕왕의 아이가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성격은 여자와 같았고, 그가 즉위해 혜공왕(재위 765-780)이 됐을 때 나라가 전례 없는 정치적 변란을 맞이하는 등 표훈이 전한 천제의 말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이 이 설화의 알맹이였다. 표훈과 같은 저명한 학승(學僧)마저도 왕의 요구에 따라 무당과 다를 것 없는 기자(祈子) 기도와 천제로부터의 ‘공수’(신의 말) 받기를 해야 했다는 것은 왕권의 관리하에서 불교와 토착신앙이 철저하게 결합됐던 통일신라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지만, 흥미로운 부분은 표훈이 천제의 권위를 빌려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경계하고 경덕왕의 무리한 기자 기도를 중지하려 노력했던 모습이다. 왕에게 반대할 만한 용기가 있어서 그런지 신라인들은 표훈을 ‘성인’(聖人)으로 불렀다 한다.
고대판 ‘삐라’ 살포자 왕거인혜공왕이 780년 시해를 당한 뒤에 진골귀족들의 권력쟁탈전이 끝없이 이어지는 ‘하대’(下代)가 시작됐다. 이때 특히 육두품 지식인이라는, 유교적 교양으로 무장된 새로운 ‘중간 계층’을 중심으로 이 극도로 불안한 정치를 유교적 합리주의, 업적주의를 통해 안정화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데, 그 전개에서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난다.
첫째, 정치 정상화를 기대라도 할 수 있던 880년대 이전까지는 육두품 지식인들이 결정권이 있는 진골귀족들에게 정치를 유교화해야 한다는 설득 작전을 전개했다. 대표적으로는, (권45 ‘열전’)에서 언급된 집사시랑(執事侍郞) 녹진(祿眞)이라는 9세기 초반의 유학자가 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상대등(上大等)을 찾아가 “사람을 쓸 때 개인 관계가 아닌 능력과 청렴도에 따라서만 벼슬을 주고 빼앗아야 한다”고 간언한 일을 기억해볼 수 있다. 유교의 원리·원칙을 그대로 담은 그 말에는 상대등도 당시 임금인 헌덕왕(재위 809∼826)도 말로는 다 찬성했지만 능력이 아닌 ‘골품’이 관료 등용의 최종 기준이 되던 사회에서 그 실천이 불가능했으므로 녹진은 끝에 가서 관계(官界)를 떠나고 말았다.
둘째, 신라가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로 접어든 880년대 중반 이후로 최치원 등 일부 유교적 지식인들이 녹진과 같은 방식으로 제도권 안에서의 비판도 계속 제기했지만, 또 일부는 제도권 범위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예컨대 진성여왕(재위 887∼897)의 실정(失政)이 뚜렷해졌을 때 서라벌 길거리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익명의 글, 즉 고대판 ‘삐라’들이 뿌려졌는데, 정부가 이를 대야주(합천)에 거주하는 문인 왕거인(王巨人)의 소행으로 보고 그를 구금했다는 것이다( 권11). 왕거인이라는 ‘지방 글쟁이’가 ‘삐라 작성과 선포’의 주역으로 당장에 지목된 걸로 봐서, 정권과 골품제도에 대한 그의 비판이 이미 인구에 회자됐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설화를 그대로 믿는다면, 의분에 찬 왕거인의 옥중 시가 하늘을 감동시켜 천둥이 일어나고 우박이 떨어지자 공포에 빠진 여왕이 그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천둥’과 ‘우박’이란 여기에서 정권에 대한 불만을 독하게 품은 민중의 분노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회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재야 지식인’이란, 이렇게 이미 9세기에 태어난 것이었다. 물론- 특히 진성여왕 즉위로 나라가 극도로 문란해지기 전까지는- 왕거인만큼 비판 정신과 용기가 강한 지식인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신흥 선종(禪宗) 안에서는 대중의 지지를 점차 잃어가는 왕실을 적당히 멀리하는 것이 덕목이라는 의견이 조금씩 우세해졌던 듯하다. 그리고 진성여왕의 아버지인 경문왕(재위 861∼875)이 도적을 교화할 만큼 대민(對民) 영향력이 강한 저명한 선승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824∼882)을 서라벌로 초빙했으나 “새가 나무를 가려 앉을 수 있다는 말씀은 고맙지만, 전하의 부름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게끔 그냥 이 진흙 속에 저를 내버려두십시오”라는 답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도헌은 부유한 진골 가문 출신의 고승이었지만 사회적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중앙권력과 적당한 거리 유지를 해야 한다는 법칙을 나름대로 터득한 셈이었다.
또 다른 ‘재야 지식인’을 기다린다더 나은 사회를 향해 백성을 이끌어가는 비판적 지성인, 즉 인텔리겐치아란 6∼7세기에 유교·불교의 도입과 함께 탄생된 한국 지성사의 하나의 ‘원형’이다. 때로는 이들의 지나친 선민의식과 엘리트주의가 민중운동의 발전에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계속 작동되기도 한다. 그러나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인간형의 문화적 뿌리가 이 땅에서 깊은 만큼 이들의 활약을 원천봉쇄하려는 지배자들의 노력도 집요하다. 분리통치 정책의 일종으로 ‘명문’ 대학들의 일부 정규직 교수들이 높은 연봉과 각종 정부 프로젝트, 방송 출연과 보수매체 기고의 기회로 포섭되는가 하면, 연구교수나 시간강사 등 지식계의 비정규직들은 생계 유지와 논문 쓰기로 바빠 대중적 활동을 하기가 물리적으로 힘들 정도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아무리 비판적 지식인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될 리가 만무하다. 이번 세계 대공황이 계기가 돼 민중의 생존투쟁의 선두에 다시 한번 장준하·함석헌과 같은 ‘재야’가 서게 되지 않을까 싶다.
참고 문헌 김상현, 민족사, 1991, 286∼287쪽
노용필, 한국사학, 2007, 134∼202쪽
조범환, 문왕, 푸른역사, 2004, 101∼109쪽
한국고대사연구회 엮음, 신서원, 1994, 11∼1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