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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계 한-일전 ‘임나일본부설’


한국 쪽 기록은 태부족, 일본쪽 기록은 창작물 수준… 민족주의 바탕한 자존심 싸움만 진행돼
등록 2009-04-10 16:18 수정 2020-05-03 04:25

역사의 복수라고나 할까? 통일신라 이후의 사서에서 가야 지역은 이렇다 할 독립적 위치를 점하지 못했다. 가락국(남가야·김해) 왕실의 후예인 김유신(595~673)은 신라 통일의 한 주인공으로 부상해 그 가문이 진골귀족 수준의 위치를 얻고, 대가야(고령) 계통의 강수 등은 통일전쟁 시기에 외교관 등 전문직으로 맹활약을 보이니, 신라인들에게 가야사는 자연스럽게 ‘자국 변경 지역의 역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통일신라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 김부식(1075~1151)은 에서 가야사를 따로 정리하지도 않은 채 ‘백제본기’에는 가야 관련 언급을 일절 넣지 않고 가야에 대한 얼마 안 되는 기록을 주로 ‘신라본기’에 몰아넣음으로써 ‘신라의 일부로서 가야’의 위상을 공고화했다. 이렇게 해서 고대 한반도 국가들은 ‘삼국’이라는 등식으로 정리되고, 부여가 고구려의 부속품이 되고 마한의 소국들이 백제의 부속품이 됐듯이 가야는 신라의 부속품이 돼 역사학자들의 일차적 관심 대상에서 사라졌다.

가야는 우리 역사의 대표적인 ‘회색지대’이다. 높은 문화적 수준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부속품으로만 다뤄졌을 뿐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진은 경남 함안군 가야읍 묘사리의 아라가야 가마터(위)와 가야읍 도항리에서 출토된 말의 갑옷(馬甲). 사진 위부터 연합‥한겨레 자료

가야는 우리 역사의 대표적인 ‘회색지대’이다. 높은 문화적 수준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부속품으로만 다뤄졌을 뿐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진은 경남 함안군 가야읍 묘사리의 아라가야 가마터(위)와 가야읍 도항리에서 출토된 말의 갑옷(馬甲). 사진 위부터 연합‥한겨레 자료

신라의 부속물로 윤색된 가야의 역사

한반도 사학이 이만큼 가야에 대해 비교적 무관심한 반면, 일본의 최초 정사인 (720)는 특히 한반도에서 거의 남지 않은 백제 계통의 가야 관계 자료를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어 일찍부터 가야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 꼽히게 됐다. 자국 일본에서도 당연히 그래왔지만 18세기 후반 이후로는 조선에서도 가야사에 대한 의 자료가 점차 인정을 받게 됐다. 예를 들어 대표적 실학자인 한치윤(1765~1814)의 (海東繹史)에는 의 가야 관계 이야기가 장황하게 인용된다. 결국 한반도 고대·중세 사서들의 가야사 괄시가 끝내 일본 자료에 대한 불가피한 의존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물론 외국 자료에 대한 의존 그 자체야 나쁠 것도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속에서 가야(임나·가라 등)가 언급되는 문서들의 상당 부분은 백제 계통 사료이거나 한반도 출신 씨족들의 구비 전승을 바탕으로 한 자료이기에 더욱더 그렇다. 문제는 자료의 ‘국적’보다는 그 자료에 내재돼 있는 ‘시각’이다.

는 신라 중심주의적 관점에서 가야사 전체를 대략 신라사의 부속품으로 인식했다면, 는 고대 한반도 국가들, 그중에서는 특히 백제와 신라, 가야를 일본의 ‘조공 국가’로 인식했다. 한반도 사람들의 생각이야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당나라를 모방한 ‘소제국’을 건설하려는 8세기 초의 일본 정권은 특히 당나라 당국자들에게 ‘한반도 국가들의 조공’을 들어 권세를 과시하려 했다. 그래서 대외용 문서인 는 중국 제도를 의식한 윤색과 가필이 심했다. 아직 ‘일본’이란 명칭도 ‘부’(府)라는 제도도 없던 흠명천황(欽明天皇) 재위 기간(539~571)에 아라가야(안라국·함안)에 있던 가야와 왜의 외교·무역관리 기관에 ‘임나일본부’라는 가상의 명칭을 자의적으로 부여하는 등 수많은 ‘창작된 역사’가 곳곳에서 보인다. 거기에다 71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갈등 관계에 있던 통일신라에 대한 편찬자들의 적대심은, 6세기 왜 정권에 ‘악한 신라로부터 백제·가야를 구원하는 자’라는 역할을 자의적으로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객관적 사서란 아마도 애당초 존재하지 않지만, 의 주관성은 와 그 본질상 달라 ‘역사의 창작’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일본에 유리한 방향의 ‘역사 창작’인지라 에도시대의 사학자까지도 에 담겨 있는 신공황후(神功皇后·본래 연도 170~269, 조정 연도 290~389)의 ‘삼한 정벌’ 설화를 그대로 인정했다.

가야에 대한 핵심 자료인 의 이와 같은 비뚤어진 시각을 접한 조선 후기의 사학자들은 과연 어떻게 대응했을까? 임나일본부설을 철저하게 부인해야 민족 자존심이 세워지는 오늘날 처지에서야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한치윤처럼 일본 자료를 통해 태부족한 가야의 고대사 자료를 보충하려던 후기 실학자들은 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으려는 경향이 강했다. 실제 는 “김해의 가락국 등은 다 왜에 속했다”고 못박는 것은 물론,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 신화도 비판 없이 그대로 전재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이러한 자세는 왜 가능했을까? 일차적으로 한반도 쪽 기록의 태부족이 일본 기록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가야에 대한 기록은 애당초부터 신라사에 곁들인 단편적 이야기뿐이고, 백제나 신라의 대왜 관계에 대해선 짤막한 사신 왕래, 왜구 침공 기사 이외에는 에서도 거의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일본을 ‘조선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 문명국가’라고 적극적으로 인식한 한치윤으로서는 초기 한-일 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사료가 일본 쪽 자료 이외에 없었을 것이고, 일본 자료의 ‘문제적’ 기록을 부정할 만한 한반도 자료는 아예 없었다. 거기에다 임나일본부설이 당시만 해도 한반도에 대한 일본 침략의 합리화 논리로 이용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오늘날 우리 영토 일부가 한때 왜인의 통할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불쾌하게 들리진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 영토’를 영원불변의 신성한 ‘민족의 지리적 신체’로 만든 민족주의 담론 형성 이전에는 얼마든지 가능했던 사고다.

그러나 놀랍게도 근대 민족주의 태동기에도 임나일본부에 대한 일본 쪽의 기록들은 당장에 무조건적 부정의 대상은 되지 않았다. 그 애국심을 의심할 수 없는 김택영(1850~1927)과 같은 선비도 꽤나 유명한 근대적 국사 교과서인 (1905)에서 일본 군대가 대가야에 주둔하고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 이후 임나일본부가 가야 지역에 설치됐다는 일본 쪽 이야기에 대해 “설사 과장된 바 있다 해도 없던 일을 완전히 날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논했다.

상대적으로 풍부한 일본 쪽 기록들

어찌해서 일본 쪽 기록에 대해 이렇게 관대(?)했을까? 본인이 직접 밝힌 대로 의 가야 기록들은 하도 부실해서 “이웃집(일본)에서 불을 빌려 밝힐 수밖에 없는 사정”이 일차적 원인이었다. 거기에다 일본을 어느 정도 ‘본받아야 할 문명국’으로 인식하는 동도서기론자들 특유의 일본관도 가미됐을 것이다. 그리고 가야가 왜인들의 통할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일차적으로 가야 지역의 왜 계통 유물 비중을 들어야 하는데, 개화기 사학자들은 이런 고고학적 성과까지 이용할 수 있는 단계에 아직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대 문서인데, 완전한 날조는 아니겠지”라고 하여 일단 를 적당히 믿는 경우가 많았다.

쓰다 소키치는 1920년대 이미 <일본서기>가 픽션에 가까운 기록들을 담고 있음을 고증했다.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중국으로 망명했던 우국지사 김택영(작은 사진)은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과장은 있을지언정 완전 날조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쓰다 소키치는 1920년대 이미 <일본서기>가 픽션에 가까운 기록들을 담고 있음을 고증했다.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중국으로 망명했던 우국지사 김택영(작은 사진)은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과장은 있을지언정 완전 날조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의 자기중심적인 서술을 그대로 믿을 리는 없었다. 가야에 대해 ‘임나고’라는 별도의 논문을 써서 열심히 정리한 장지연(1864~1921)은 신라나 백제가 왜인들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의 서술을 “자기 자신들을 높여보려는 윤색”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초기의 신라가 국세가 약해 신공황후의 침공을 받아 왜인들에게 패물을 보냈다는 것이나, 가야 지역에 왜인 군대가 주둔했다는 것은 ‘사실’로 받아들이려 했다. 김택영·장지연과 함께 임나일본부설을 대체로 수용한 현채(1856~1925), 원영희, 유근(1861~1921) 등 개화기의 주요 교과서 저자·편찬자들을 “정신이 없는 역사를 쓰고 일본인들의 망언을 전재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신채호(1880~1936)는 신라와 왜인들의 국세, 문화적 발달 정도의 비교 등 상황적 증거를 들어 임나일본부설을 부인했지만, 이는 학문의 문제라기보다는 신념의 문제에 더 가까웠다.

남, 그것도 미울 수밖에 없는 식민지 모국의 조상들이 우리 땅을 옛적에 통치했다는 것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수용하기가 마땅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우리 쪽 기록이 너무 소략해 ‘완전한 날조’로만 보기 어려운 기록에 대한 대응 논리의 성립도 쉽지 않기에, 임나일본부 문제는 오랫동안 한국 고대사 연구의 ‘민감한 상처’로 남아 있었다. 역사를 ‘애국심의 원천’으로 여기는 최남선(1890~1957)과 같은 ‘문화 민족주의자’들은 의 관련 부분을 “우리의 노비 문서”라고 부르고 임나일본부설을 무조건 부정했는데, 철저한 아카데미즘 학풍의 이병도(1896~1989)는 “후대의 왜관과 같은, 가야와 왜 사이의 일종의 무역기관이 아니었나”라는 재미있는 아이디어로 의 다소 허황한 언술 중에서 진실의 ‘알맹이’를 찾아보려 했다.

가야사의 고고학적 실체 복원 필요해

사실, 이와 같은 길로 처음부터 갔으면 임나일본부설 문제를 일찌감치 감정이 아닌 이성의 논리로 풀 수도 있었을 텐데, 민족 차별과 대립의 일제강점기 상황, 그리고 해방 이후의 탈식민지적 반일 감정의 정치화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최근(2003)까지도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가야와 왜의 교역 관계를 한 줄로만 정리할 뿐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사정이 달라져 가야와 왜의 관계에 대한 훨씬 더 다양한 연구들이 나왔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학계에서조차 임나일본부설 문제는 일차적으로 ‘자존심’ 문제였다. 예컨대 민주화운동가로도 유명한 천관우(1925~91) 선생은 임나·가야 관계 기록의 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해석해 왜 계통의 일부 용병을 거느린 백제가 369년부터 562년까지 북부 가야 지역을 지배했다는 신설을 내놓았다. 그의 논리로는 임나일본부란 가야 지역에 파견된 백제군 사령부 격이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훨씬 이전부터 임나일본부설 문제에 대한 태도가 점차 객관화돼갔다. 이미 1920년대에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1873~1961)의 연구가 란 문서가 얼마나 설화적 이야기가 많고 얼마나 중국 문헌을 그대로 베껴 윤색한 부분이 많은지 자세한 고증을 통해 잘 보여주었다. 패전 이후에 를 신성시하는 황국 사관도 파산되고 더 이상 임나일본부설을 붙잡아 한반도 식민지배를 합리화할 필요까지 없어지면서, 특히 1970년대 이후로는 임나일본부 관련 기록을 훨씬 더 현실적으로 해석해 6세기 중반 아라가야의 임나일본부를 단순한 왜인의 사절단이나 왜인들을 고빙한 가야 여러 나라들의 외교기관으로 보려는 시각이 강해졌다. 지금은 우파 인사들의 대중적 저술이나 일부 언론 등에서 간혹 ‘정통적’ 모습의 임나일본부설이 보이기도 하지만, 전문 학계 담론에서는 거의 사라져가는 듯하다.

의 기록을 완전히 무시·부인하려는 태도를 고집하지 않고 고고학적으로 복원되는 가야의 실제적 역사에 맞춰 그 기록들의 ‘알맹이’를 찾아내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한국의 중진·소장 학자들과 일본 학계 사이의 대화 가능성도 그만큼 커졌다. 전문 학계에서는 이처럼 ‘자존심 싸움’은 이미 끝나가고 있지만, 극우적 ‘재야 사학자’들이 가야인들의 고대 일본열도 정복에 대한 과장된 이야기로 한국 대중을 선동하거나, 일부 일본 교과서 저자·편찬자들이 끝내 임나일본부 명칭을 버리지 못해 학생들의 역사 인식을 왜곡시키는 안타까운 사태들은 아직까지 종식되지 않았다. 우파가 지배하고 있는 한·일 양국에서 배타적 민족주의가 ‘잘 팔리는 상품’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임나일본부설’의 진짜 알맹이는…

가야사가 임나일본부설 문제와 엮여 한때 국내에서 그 연구 자체가 거의 금기시되는 비운을 당한 것은 왜일까? 일차적으로는 532~562년에 일찍 신라와 병합된 가야에 대해 신라에서도 고려에서도 사학자들이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한국 쪽 자료가 너무 부실한 것이 근본 원인이었을 것이다. 신라에서도 고려에서도 가야 지역이란 어디까지나 ‘변경’ ‘지방’이었는데, ‘중앙’ 중심의 사학이 변경지대를 허술하게 다루는 것은 보통 일이었다. 한국 쪽 자료가 충분했다면 한치윤부터 김택영까지 성실한 사학자들이 임나일본부설 앞에서 손을 들었겠는가. 또 한 가지 이유는 고대 동북아 역사의 ‘회색지대’로서 가야 지역이 지닌 근본적 성격이었다. 백제도 신라도 왜인과 소통을 많이 했지만 가야만큼 일찍부터, 또 적극적으로 대왜 관계를 개척한 고대 한반도 지역은 없었다. 바로 이와 같은 과정에서 아라가야에서 일종의 ‘대왜 교역 관리기관’이 부설됐는데, 이 기관에 대한 전승들이 에서 대대적으로 윤색돼 임나일본부라는 가상의 현실을 낳았다. 그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진실의 ‘알맹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선 다음번 칼럼에서 밝히려 한다.

참고문헌:

1. 하우봉, 일지사, 1989, 279~281쪽

2. ‘한국 근대 역사학의 창출과 통사 체계의 확립’, 도면회, 70호, 2008년 12월, 171~207쪽

3. ‘장지연의 역사 인식’, 이훈옥, 민음사, 1993, 249~308쪽

4. 신일철, 고려대학교출판부, 1980, 32~40쪽

5. 이영화, 경인문화사, 2003, 178~180쪽

6. (伽耶はなぜほろんだか: 日本古代國家形成史の再檢討) 수쓰끼 야쓰다미(鈴木靖民), 도쿄, 大和書房, 1991

7. ‘임나일본부 논쟁사’, 김태식, 역사비평사, 2002, 78~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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