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의 외교’라고 하면 일반 ‘국사’ 교육을 받은 이의 머리에서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틀림없이 당나라와의 긴밀한 관계일 것이다. 신채호처럼 “지나(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숭배의 표본”이라고 비난하든, 오늘날 다수의 한국인처럼 “우리의 자랑”으로 여기든 당나라 문단에서 이름을 날렸던 최치원(857~?)의 이미지는 통일신라의 ‘문화 외교’에 대한 우리의 상상을 지배한다. 더군다나 이기백 선생의 (1967) 등 여러 권위 있는 개설서에서 당나라의 문화 수입이나 당나라와의 무역 등에 비중을 두었기에 더욱더 통일신라 시대사의 이 부분에 대한 인식은 강화된다. 또 한편으로는 정수일 선생 같은 선각자들의 노력 덕택에 통일신라가 아라비아 등 중동 상인과 탐험가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도 최근 교양인 사이에 어느 정도 인식된다. 7세기 후반부터 10세기까지 유라시아의 경제·문화·정치상의 두 중심지는 바로 당나라와 중동의 우마이야왕조(660~750)나 아바스왕조(750~1258)였기에, 신라가 이 두 ‘세계 제국’과 적극적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통일신라의 외교는 오로지 당나라에만 집중돼 있었던가? 를 유심히 읽은 이라면 꼭 그렇지 않았음을 당장 눈치챌 것이다. 통일신라 전성기에는 예컨대 698년 3월 효소왕이 일본국 사신을 친히 왕궁의 숭례전에서 알현했는가 하면 703년 성덕왕에게 온 일본 사절단은 204명이나 됐다( 제8권). 다수의 수행원을 포함하는 일본 사절단들이 올 뿐만 아니라 신라 사신들도 일본에 적극적으로 왕래했기에, 그들에게 필요한 배들을 조달하려고 678년 병부(兵部·국방부)가 선부(船府)라는 선박을 맡아보는 관청을 독립시켜 개설하기도 했다( 제7권). 당나라와의 외교관계가 한동안 단절돼 있던 그 시기에는 일본 이외에 신라 사신들이 왕래할 수 있는 나라란 존재하지도 않았다. 당나라와의 관계가 정상화되고 나서 그쪽으로 고급 귀족과 지식인들을 사신으로 보낸 게 사실이지만, 일본으로도 아무나 보낸 것은 절대 아니었다. ‘열전’을 보면, 779년 일본국으로 보낸 신라 사절단에 문장가로 알려진 김유신의 후손 김암(金巖)도 포함돼 있었는데, 일본 천황이 그 어진 인품에 반해 그로 하여금 일본에서 영구히 머물도록 하려다가 “당나라에서도 유명한 인물인데 어찌 강제로 머물게 하려는가”라는 당나라 사신의 질책을 듣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제43권).
신라의 대표자인 김암에 대한 이와 같은 체류 강요는 현실적으로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지만, 김암의 인품과 문명(文名)을 놓고 벌어지는 일본인과 당인(唐人)의 대화는 당시 한-중-일의 문화적 친근감을 잘 나타낸다. 설총의 아들인 설중업(薛仲業)도 바로 그 779년 도일 사절단에 포함돼 있었는데, 그는 당시 일본 최고 문호인 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722~785)로 추측되는 마히토(眞人·신라의 ‘진골’에서 유래된 듯한 최고급 세습 귀족집단의 칭호)급의 인물로부터 그의 할아버지인 원효(617~686)의 에 대한 찬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제46권, , 권36). 원효의 저작들이 신라만큼이나, 어쩌면 신라보다 더 일본과 당나라에 알려져 있고, 김암과 같은 지식인들이 일본과 당나라에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8세기 말의 동아시아가 하나의 문화 공동체였음을 보여주는데, 일본도 그 공동체의 일원이었다는 데 대한 기억을 우리가 ‘국사’ 개설서에서 지우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을 위시한 다수의 개설서에서 7~8세기 통일신라와 일본의 문화·외교 관계에 대한 이렇다 할 언급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관계는 신라에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일본에 중요했다. 일본에 대한 의 기록은 다소 소략해 일본 쪽 자료를 보충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양쪽 자료를 종합해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한 세기 동안 신라 사신들이 일본에 39차례나 파견됐다. 같은 기간에 일본 사신들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다. 그 기간에 당나라로 견당사(遣唐使)를 보낸 것은 불과 10차례였다. 당나라는 일본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아 사신을 잘 파견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일본이 당보다 신라와의 교류에 더 적극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문화 교류 차원을 보면, 8세기 후반 이후로는 당나라와의 불교 교류가 점차 적극화돼 신라와의 불교 교류를 압도하게 되지만, 8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신라로 유학 가는 일본 유학승(665~718년간 총 13명)이 당나라로 가는 유학승(같은 기간에 총 9명)보다 많았다.
그런 차원에서는 원효가 일본에서 유명해진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일본 화엄종의 발전에 신라가 끼친 영향은 상당했다. 736년 일본에 도착해 화엄종을 개종한 심상(審祥)부터 신라인으로 알려져 있고, 752년 약 700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온 신라 사절단이 화엄 국찰(國刹) 도다이지(東大寺) 건립에 필요한 금의 일부를 갖고 온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신라의 황금도 일본인으로서 중요했겠지만, 신라 사절의 정기적 파견을 요청하고 신라에 당나라보다 사신을 더 자주 보냈던 배경에는 신라에서 두 가지를 구하려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첫째, 국가 운영에 대한 지식이었다. 이는 당나라에도 구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일본과 통일신라는 당나라와 달리 철저한 세습귀족 지배의 사회였기에 바로 이 공통점으로 인해 일본으로서 당나라보다 신라를 ‘벤치마킹’하기가 수월했다. 예를 들어 684년 일체 귀족층을 ‘팔색(八色)의 성(姓)’이라는 마히토 등 8가지 세습적 집단으로 일률적으로 나눈 개혁은 분명히 신라의 성골·진골·육두품·오두품 등 신분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8가지 세습적 집단 중에서 3개의 최상 집단인 마히토와 아손(朝臣), 수쿠네(宿禰)는 주로 황족과 황족의 외척 등으로 구성됐는데, 이런 의미에서 신라의 진골에 해당됐다고 보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치품의 사용을 성(姓)에 따라 제한하는 율령국가의 ‘소비 규범화’ 시스템도 신라를 통해 받아들인 듯하다.
둘째, 일본 귀족들에게 신라의 고급 상품은 큰 매력을 가졌다. 일본 황실의 보물 창고인 쇼소인(正倉院)에서는 신라의 가야금과 숟가락, 가위, 칼, 유리잔, 사리기, 그리고 양모로 만든 꽃 문양의 방석자리(花氈) 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본 귀족들이 신라의 공예품을 얼마나 애호했는지 쇼소인의 소장품을 보며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의 대신라 외교는 적극성을 띠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 개설서들이 도다이지에서 신라 사절단이 예불한 752년을 절정으로 한 7~8세기 신라와 일본의 관계를 다소 괄시해온 이유는 무엇인가? 근대 민족주의의 ‘반일 콤플렉스’도 당연히 주된 이유겠지만 이 콤플렉스를 크게 자극하는 것은 통일신라 시절 일본 국가의 공식적 신라관이다. 당시 일본은 공문서에서 신라를 ‘번국’(蕃國), 즉 일본의 조공국가로 표기했으며 대외적으로도 이런 시각을 적극적으로 표출했다. 753년 당나라 황제 현종(玄宗·재위 712~756)을 알현했을 때 신라 사신이- 신라를 군자국으로 생각한 당나라의 입장에서 당연하게도- 상석을 차지한 데 대해 차석밖에 얻지 못한 일본 사신 오토모노 고마로(大伴古麻呂)가 크게 항의해 “신라는 일본의 번국일 뿐!”이라고 소리를 높인 적도 있었다. 신라 입장에서야 이같은 무례함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그해 경덕왕(재위 742~765)이 “거만하고 예의가 없는” 일본 사신을 아예 접견해주지도 않고 그냥 돌려보냈지만( 제9권), 당시 동아시아 지역의 최상위 군주인 당나라 황제 앞에서까지 표출된 일본의 ‘신라 번국관’은 일본 쪽의 지론이었던 모양이다.
일본의 이와 같은 논리로 인해 일본에 그토록 중요했던 신라와의 관계가 몇 번 위기를 겪은 일도 있었다. 예컨대 735년 당나라와의 관계가 완전히 정상화돼 대동강 이남 땅이 신라의 영유임을 당나라가 최종적으로 인정하자, 의기양양한 신라 정부가 일본에 사신을 보내 “우리 국호가 왕성국(王城國)으로 개칭됐다”고 알렸다. 더는 신라를 함부로 무시해 망언을 퍼붓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통보였다. 이에 대해 일본 쪽이 “조공국가가 우리에게 알리지 않고 국호를 무단으로 바꾸었다”고 강하게 반발하고 신라도 자존심을 지키느라 742년 일본 사신의 접견을 거절해버렸다. 이런 갈등을 자초하면서까지 일본이 신라를 ‘번국’으로 보려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7세기 후반부터 일본의 구체적 제도 개혁의 현실적 모델이 신라인 경우가 많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시대의 일본이 최상의 모델로 여긴 것은 당나라였다. 당나라는 수많은 ‘번국’을 거느린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으며, 당나라와 싫든 좋든 조공·책봉 외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신라는 적어도 형식상 그중의 하나였다. 일본도 당나라의 전례에 따라 ‘번국’을 갖고 싶어했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의 영향하에 있던 외국이란 아이누의 조상 등이 섞여 있는 혼슈 북부 지방의 선주민 에미시(蝦夷) 등 일본열도 오지의 주민들 정도였다. 그들도 빈번히 전쟁을 일으키는 등 일본을 ‘종주국’으로 무조건 인정하지도 않았다. 현실 세계에서 ‘동방의 제2 당나라’가 될 수 없던 일본은 결국 현실이 아닌 관념의 세계에서 신라 등 당나라의 형식상 ‘번국’들을 자국의 ‘번국’으로 표기하기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당나라와 더 거리가 멀었던 일본은 신라와 달리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지 않았기에 이와 같은 ‘제국적 상상’을 하기가 더욱더 쉬웠다. 거기에 가미된 것은 일본 지배계층 속에 많이 들어간 백제인과 고구려인 등 한반도 출신들의 적대적 신라관이었을 것이다. 신라인들이 ‘일통’(一統·통일)이라고 표현했던 대동강 이남 영토의 정복 과정은 그들에게 다름 아닌 ‘망국’이었기 때문이다.
‘번국’이라는 말을 신라에 대해 줄곧 써온 일본이지만 663년 백촌강(금강) 대첩에서 참패한 교훈이 있었기에 ‘번국’과의 대대적 실력 경쟁은 조심스럽게 피했다. 그러다 727년 강대국 고구려의 후계 국가로 인식됐던 발해의 사신이 최초로 일본에 온 뒤로는 일본이 신라보다 더 우호적이고 강력하다 싶었던 발해의 손을 들어 신라에 대한 적대 행위까지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731년 일본 배 300척이 동해안을 습격해 신라 주민들을 약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제8권). 그러나 일시적 습격 정도는 했어도 대규모 신라 침략을 단행할 만한 역량이 당시 일본 지배자들에겐 없었다.
755년 신라의 최대 동맹국이던 당나라에서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신라가 외부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당분간 없어졌을 때 일본이 발해와 공조해 신라를 크게 협공할 계획을 몇 년 동안 추진했지만 이도 불발에 그쳤다. 신라의 군사력이 두려운데다 763년 211명이나 되는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한 신라의 외교술이 잘 먹힌 모양이었다. 즉, 신라를 실력으로 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문화 수준에 대해 열등감을 느꼈던 만큼 ‘관념적 번국론’의 당위를 오히려 더 고집하는 모양이었다. 결국 자국민들을 향한 일종의 ‘조정의 자존심 세우기 작전’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런 고대의 ‘번국론’이 19세기 말 일제의 한국 침략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됐다는 사실이 지금까지도 7~8세기 신라와 일본 관계사에 대한 한국인의 호의적 관심을 막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번국론’은 일제 침략 합리화에 이용돼그러나 일본 조정의 어설픈 ‘자존심 세우기’나 일제의 식민사관과 무관하게 7~8세기 신라와 일본이 크게 봐서 하나의 ‘앎의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사실, 원효의 책들이 일본에서 애독되고 일본의 화엄 국찰인 도다이지가 만들어지던 751년에 신라의 화엄 국찰 불국사도 창건됐다는 사실 등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깊지 않은가. 일본 지배층의 비현실적 세계관과 각종의 역학관계로 꼭 평탄하지만은 않았지만 7~8세기 통일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양쪽에 꽤나 중요했다. 통일신라는 꼭 당나라에만 국한되지 않았던, 다양하고 실리적인 외교 정책을 펼 줄 아는 개방적 국가였다.
<font color="#638F03">참고 문헌:</font>1. 이기동, 일조각, 1997, 182~195쪽
2. ‘신라 중대 대일 관계에 관한 연구’, 심경미, 백산학회 엮음, 백산자료원, 2000, 117~159쪽
3. 김현구, 창비, 2002, 161~173쪽
4. 권덕영, 일조각, 2005, 233~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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