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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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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여있는’ 민족사 대신 ‘흘러가는’ 고대사


제국적 면모와 족보 강조하기보다 다양한 종족 간 스며듦에서 고대 한반도의 문화적 본질 찾아야
등록 2009-08-13 19:02 수정 2020-05-03 04:25

“국사는 우리 민족의 정신과 생활의 실체를 밝혀주는 과목으로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구실을 한다. 즉, 국사 교육을 통하여 민족의 전통을 확인하고 민족사의 올바른 전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정신을 기르게 된다.”

바이킹족들의 모습. 20세기 전반의 한국 민족주의자들이 고구려의 ‘제국적 위상’을 강조했듯이, 같은 시기의 노르웨이 역사학자들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상 바이킹의 위업’을 기렸다. ‘전투적 민족주의’란 그 시기 전세계 역사학의 공동적 특징이었다. http://lib.lbcc.edu/handouts/vikings.html

바이킹족들의 모습. 20세기 전반의 한국 민족주의자들이 고구려의 ‘제국적 위상’을 강조했듯이, 같은 시기의 노르웨이 역사학자들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상 바이킹의 위업’을 기렸다. ‘전투적 민족주의’란 그 시기 전세계 역사학의 공동적 특징이었다. http://lib.lbcc.edu/handouts/vikings.html

일제 침략기 민족주의 사관은 의미 있었지만

고등 국사 교과서 머리말의 모두(冒頭) 부분이다. ‘배타적 민족주의’를 명시적으로 반대하고 ‘우리 역사의 세계사적 보편성과 민족사적 특수성’ 사이에서 나름의 균형을 잡아보려는 최근의 국사 교과서를 단순히 ‘민족주의적’이라고 몰아세울 수도 없지만, 서술의 기본 틀은 여전히 ‘민족 이야기’다. 국사 서술의 주체이자 대상은 바로 ‘우리 민족’이고 그 ‘민족’의 기원은 아예 ‘신석기와 청동기’에서 찾아진다. 국사 학습의 목적은 ‘민족정신’을 밝혀줌으로써 그 ‘정체성’을 확립시켜주어 장차 ‘민족사의 올바른 전개’를 보장하는 것이다. 거기에다 학습 줄거리는 ‘우리 민족’이 세운 역대 국가들의 발전사다. 그 ‘국가 발전사’의 시발점은 ‘우리 민족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이고 그 전개의 결론은 오늘날 대한민국이다.

국정 국사 교과서의 생산을 바로 국가기관들이 맡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그 주민들을 ‘민족’이라는 혈통적 틀로 묶어놓고 ‘민족국가’의 역사, 즉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써내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국가의 자서전’이라고나 할까? 자서전을 쓰는 건 탓할 게 없지만, 어떤 역사적 인물도 자신의 자서전을 객관적으로 쓴 적이 없다는 사실도 상기해볼 만하다.

민족사이자 국가의 역사, 즉 ‘국사’의 틀이 확립된 것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라는 비극적 시기다. 국가 자체가 열강의 침략으로 없어지고, 민족도 일제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즉 조선 민족을 일본 민족의 ‘분가’(分家)쯤으로 취급해 궁극적으로 ‘내지’(內地·일본)와 다시 합쳐지기를 요구하는 강압적 동화주의 담론으로부터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신채호 선생을 위시한 민족주의자들이 ‘민족 수호’에 나서 ‘우리 모두의 족보’를 재정리하는 정신으로 ‘국사’와 ‘민족사’ 쓰기에 착수한 것은 십분 이해할 만하다.

물론 ‘싸우면서 배운다’는 속담대로, 그들은 많은 측면에서 가해자 일본이 ‘가족국가’(家族國家·일체 신민을 동일한 혈통으로 파악하는 국가)의 큰 ‘족보’로 만들어낸 일본제국사의 기본 틀을 그대로 따르면서 ‘우리 민족의 족보’를 쓰기도 했다. 예컨대 일본제국사에서 고대 일본이 늦어도 4세기 이후로 한반도 국가로부터 ‘조공’을 받고 임나(가야) 등을 ‘경영’했다는 식으로 그 ‘대국적’ ‘제국적’ 면모가 강조됐던 것처럼, 한국의 민족주의적 국사도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강성’과 ‘만주 벌판 지배’를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적 이상들을 소급 적용해 과거 민족주의 사학자들을 책망하기 어려운 이유는, 20세기 전반의 전세계적 역사 서술 분위기가 고대 종족들의 정복과 지배, ‘제국 건설’을 보편적으로 강조했기 때문이다. ‘평화스러운’ 노르웨이에서마저도 그 시기에 ‘위대한 바이킹들의 정복 사업’이 민족·국민적 정체성의 기반이 됐으며, 덴마크령 그린란드 동부의 점령(1931∼33) 등 아류 제국주의적 국제 모험의 ‘학술적 근거’로 이용되기도 했다. 여유만만한 노르웨이의 유명한 사회민주주의적(!) 사학자인 할브단 쿠트(1873∼1965) 같은 이들조차도 ‘우리의 영웅적 조상 바이킹’을 예찬했던 ‘광기의 시대’였던 것이다. 하물며 일제에 짓밟힌 약소민족의 민족주의자가 같은 방향으로 ‘민족사’를 만들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벽두에 세상이 한참 바뀐 것이다.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은 이제 위협을 받는 것이 아니고 동아시아 이웃 나라인 중국·일본과 나란히 같은 품목(가전제품·자동차·선박 등)의 수출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도 긴밀한 경제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예컨대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제국적’ 성격의 강조는- 그 역사성 여부를 떠나- 어디까지나 한국 자본의 중국 동북지방에의 침윤이나 중국 등 이웃 나라 자본들과의 경쟁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해주는 담론이 될 위험이 크다. ‘민족의 웅비(雄飛)’에 대한 역사적 상상은 일제강점기 같은 절망적인 시기에는 ‘희망’일 수도 있었겠지만, 약육강식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으로 대한민국이 ‘정상적으로’ 편입됐을 때는 그 약육강식을 논리적으로 옹호·장려할 뿐이다.
혹자는 오늘날 중국의 중화주의적 고대사 해석 등을 들어 “‘역사 전쟁’의 시대에 고대사에서 민족적 주체성과 자긍심 등을 빼면 곤란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느 한쪽의 독선적 민족주의가 다른 쪽의 자아중심적 논리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민족주의적 ‘역사 전쟁’의 극복이란 결국 근대적 민족주의를 고대사에 더 이상 투영하지 않는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다. 더군다나 상당수 한민족 구성원들(북한 주민, 중국 조선족, 옛 소련의 고려인 등)이 대한민국 국민이 거의 될 수 없는 반면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비한민족 인구의 비율이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우리 역사’란 더 이상 ‘민족사’일 필요가 없어진다.
‘민족 국가’의 기원과 발전, ‘정신·주체성’을 조명·확립시킴으로써 학습자로 하여금 민족 또는 국가 구성원으로서의 자아 인식을 강압적으로 갖게 하는 오늘날의 고대사 대신에, 다양성과 상호연관성, 비판적 인식을 중심에 놓는 새로운 고대사 패러다임을 제안하려는 게 이 글의 요지다.
‘남’들과 혈투를 벌이는 혈통적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설정한 신채호(왼쪽)의 역사학은 당시에는 ‘진보’를 대표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이제는 극복의 대상이 돼야 한다. 9세기 한·중·일 삼각무역의 상징적 인물인 장보고(오른쪽). 한겨레 자료

‘남’들과 혈투를 벌이는 혈통적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설정한 신채호(왼쪽)의 역사학은 당시에는 ‘진보’를 대표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이제는 극복의 대상이 돼야 한다. 9세기 한·중·일 삼각무역의 상징적 인물인 장보고(오른쪽). 한겨레 자료


신라의 생존 비결은 군사력보다 외교력

첫째, ‘국방 사관’의 극복이다.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 군대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로는 중원 세력들이 늘 요동과 한반도에 대한 각종 패권 정책들을 펼쳐왔다. 압록강 연안 지대와 대동강 이북 지역을 중핵으로 했던 국가들(고조선·고구려·발해 등)이 결국 중원 세력이나 중원의 일부를 통제한 유목민 국가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지만, 한반도 남부와 중부 지방을 그 기반으로 삼아온 신라는 끝내 주권을 포기하지 않고 중원 세력 앞에서 꿋꿋이 버텨왔다. 신라의 직접적 지배까지도 궁극적 목적으로 삼았던 당나라의 원래 계획이 실행되지 않음으로써 신라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옛 땅까지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북방 사극’에서 우리가 ‘조상의 무위(武威)’를 하도 많이 본 탓에 ‘671∼676년 당나라와의 항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라고 답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이는 진리의 절반일 뿐이다. 군사력만이 생존 비결이었다면 신라보다 훨씬 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고구려가 끝내 멸망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670년대 당나라에게 신라와의 갈등은 타림(塔里木) 등 서역을 둘러싼 티베트 제국과의 갈등에 비해 훨씬 덜 중요했다는 것부터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세계에의 관문인 서역에 비해 당시 한반도는 중원 세력이 보기에는 지정학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았다. 거기에다 일본과의 관계를 재빨리 정상화해 후방에서 튼튼한 우방 하나를 만든 신라의 민첩한 외교력, 그리고 관료에게 요전(僚田)을 지급하고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는 등 여러 대목에서 당나라의 체제를 신라의 상황에 맞춰 잘 적용한 행정력 등도 이유로 들 수 있다. 결국 발해와 당나라 사이의 갈등을 이용해 신라가 735년 당나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따낼 수 있었던 것인데, 역시 ‘군사’보다 ‘외교’에 수완이 높았던 것이 주효했다. 한반도 국가의 생존에 군사력보다 외교력 등을 포함한 종합적 의미에서의 문화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고대사가 주는 진정한 교훈이다.
둘째, ‘동질성’에의 집착을 벗어나야 한다. 보통 ‘우리’ 고대사에서 등장하는 모든 한반도 정치체들을 뭉뚱그려 ‘우리 민족’으로 설정하지만, 이들은 내부 구성이 매우 복합적인데다 상호의 문화적 차이도 만만치 않았다. 고구려가 옥저와 예 등은 물론 말갈과 낙랑 출신의 한인(漢人)들까지 신민으로 받아들인 것이나, 통일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과 일부 말갈을 통섭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백제만 해도 중국 지식인과 일본 호족 출신을 관료로 이용할 줄 아는 나라였다. 영산강 유역에 특히 5세기 말∼6세기 초로 추정되는, 수많은 일본열도 식의 전방후원(前方後圓)형 고분들이 분포돼 있는데, 백제 왕들이 이 지역의 호족을 누르기 위해 왜 계통의 친백제 호족들을 그쪽에 일종의 관리자로 파견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게 일부 학자의 의견이다. 백제에 백제인과 함께 신라인, 고구려인, 왜인, 중국인들이 다 섞여 산다는 (隋書)의 기록만큼 한반도 고대국가의 복합성을 잘 전해주는 기록은 없다. 백제에 조공을 바쳤다가 백제가 망한 뒤인 662년부터 신라에 조공을 바치되 그 직할지가 되지 않은 탐라(제주도)는 아예 언어 내지 문화적으로 독자적 단위를 형성했다고 봐야 한다. 또 고대 한반도 육지의 부여계 언어(고구려어와 백제 지배층의 언어)와 한(韓)계 언어(진한·마한의 언어) 사이의 차이도 만만치 않았다. 즉, 복잡한 종족 구성을 가졌던 중국의 역대 제국들이나, 중국·한반도 계통의 도래인과 에미시(蝦夷), 구마소(熊襲), 하야토(隼人) 등 선주민의 여러 부족들이 어울려 살았던 고대 일본과 마찬가지로 고대 한반도 또한 종족적으로 매우 복합적인 사회였던 것이다.

장보고·원효·원측을 낳은 것은 ‘스며듦’

종족이 다양하고 일상 언어가 표준화돼 있지 않던 고대인들이 ‘민족’이라는 의식 없이 단지 일차적으로는 가족과 마을 등 미시 공동체에 대해,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국가에 대해 소속감을 가졌을 뿐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 역사가 과연 덜 자랑스럽게 되는가? 오히려 고대에서의 한반도 주민 구성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다민족화돼가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는가?
셋째, ‘서로 스며듦’ ‘흐름’으로서의 고대사 인식이 요구된다. ‘되놈’과 왜놈’들을 상대로 군사적 사투를 벌이는 ‘우리 민족’이 더 이상 고대사의 주체가 아니라면 과연 고대사의 전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나는 한반도 고대의 기본적 과정이란 바로 각종의 ‘흐름’이었다고 본다.
고조선의 틀이 잡히기 시작한 기원전 4∼3세기부터 통일신라가 망한 10세기까지 위만 집단을 비롯한 수많은 중원 계통의 집단·개인들이 선진 기술과 지식을 갖고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퍼져나갔는가 하면, 설계두(?∼645)처럼 출세하려고 스스로 바다를 건너갔든 수많은 백제·고구려 유민처럼 강제로 끌려갔든 수만 명의 해동인(海東人)들이 중원으로 스며 들어갔다. 중원의 제국들과 해동 변방 사이에서 끊임없이 일어난 ‘서로 스며듦’의 과정에서 신라·당·일본 사이의 무역 네트워크를 만든 장보고(?∼846) 같은 세계적 상인들이 태어났는가 하면, 당나라에서 생을 마치고 사후에 티베트에까지 영향을 미친 원측(613∼696)과 같은 국제 지식인들도 태어났다. 중국식 조용조(租庸調) 수취 체제부터 차(茶) 문화까지 통일신라와 일본으로 전파된 것처럼 문물이 국경을 쉽게 넘는 ‘흐름’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동아시아 지역의 전체적 역사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이다. 중국 삼론종(三論宗)과 현장(玄奘·602∼664) 이전의 옛 유식학 등의 영향을 받았다가 나중에 중국과 일본에 도리어 큰 영향을 미친 원효(617∼686)와 같은 신라의 최고급 사상가야말로 ‘흐름’으로서의 고대사를 상징한다.
한반도나 일본열도의 주민과 국가들이 각종 지역적 ‘흐름’들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요소들을 각자의 상황에 알맞게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결국 중국보다 후발인 그들의 문화를 빠른 속도로 중국과 같은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은 아니었을까?

영구불변의 주체로서 ‘민족’ 신화를 버리고 고대사를 수많은 이질적 요소들을 내포한 여러 ‘흐름’들의 중첩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오늘날도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모든 이들이 동일하게 ‘국민’으로 호명되지만, 실제 대한민국이란 상호 갈등을 손쉽게 해결할 수 없는 계급·계층·연령·지역 집단들의 복합체다. 동질적인 단수의 ‘우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일단 인정해야 한국 사회의 첨예한 갈등·대립들의 해결에 착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오늘날 정권의 행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한민국의 이른바 ‘주류’는 다양성의 인정과 비폭력적 갈등 해결보다 늘 ‘불도저’식의 폭력적인 ‘진압’을 선호해온 것이다. 다양성의 인정과 소통 문화의 정착이란 아직도 멀고 먼 과제다.

참고 문헌
1. 김기협, 돌베개, 2008
2. 김기봉, 푸른역사, 2006
3. 임지현·이성시 엮음, 휴머니스트, 2004
4. 박천수, 사회평론, 2007, 249∼301쪽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는 이번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박노자 교수는 한국사와 세계사를 아우르며 ‘국가 속 개인의 죽음’을 짚어보는 연재로 다시 찾아뵙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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