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문명개화’의 열기에 들떠 있던 1882년, 일본에 온 지 거의 10년이 다 돼가는 한 영국인은 일본 최초의 신화적 연대기인 (古事記·712)를 드디어 완역했다. 유럽 동양문헌학의 한 쾌거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남아 있었다. 라는 책은 비록 국교인 신도(神道)의 경전이라고는 하지만, 그 첫 장면들을 도대체 영어로 옮기기가 겁난다. 잘못하면 영국 국회가 1857년에 제정한 ‘외설적 출판물 금지법’에 저촉돼 처벌될 수 있어서다. 동양 종교 경전을 영역하다가 형사처벌된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의 모두 부분에서 이자나기(伊弉諾尊)라는 남신과 이자나미(伊弉冉尊)라는 여신이 신성한 결합을 이루어 일본열도를 창조하는데, 교배를 하기에 앞서 전희 삼아 대화를 한다. 이자나미가 “내 몸에 덜 채워진 것이 하나 있다”라고 상대방에게 ‘초대’를 하자, 이자나기는 “내 몸에는 너무 튀어나온 부분이 하나 있으니 그대의 덜 채워진 곳에 내 것을 넣어 이 세상을 낳으면 어떨까”라고 구체적인 ‘제안’을 한다.
8세기 일본에서는 이 정도면 별로 ‘야하다’고 치지도 않았다. (萬葉集·784)에 보면, “고려 비단으로 만든 허리끈을 풀고서” 이루어지는 애정 행각의 노골적 묘사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1882년의 일본에서도 곳곳에서 남근석이나 성적 결합을 주제로 하는 민속 가면극 등을 구경할 수 있었다. 문제는 당시 빅토리아시대 영국에서 “내 몸의 튀어나온 것을 너의 덜 채워진 곳에 넣자”는 이야기 정도도 ‘심한 외설’로 인식됐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고민 끝에 의 번역자는 ‘야하다’ 싶은 모든 부분을 라틴어로 처리했다. 엘리트만이 읽을 수 있는 ‘상류층 언어’니 ‘대중을 외설로 현혹한다’는 혐의가 생길 리 없는 것이다. 이 번역자는 다름 아닌 영국 일본학의 원조 베실 챔벌린(1850~1935)이었다.
그런데 ‘동아시아 문화의 선정성을 외설 금지법에 저촉되지 않고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일본학 전공자만의 고민은 아니었다. 한국 문헌학의 원조라 할 선교사 제임스 게일(1863~1937)도 1910년대 말~1920년대 초에 와 을 영역하면서 일부분을 라틴어로 쓰거나 표현을 다듬어야 했다. 성에 대한 위선이 판치는 빅토리아시대 ‘신사’들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의 성문화가 지나치게 ‘대담’했던 것이다.
개방적이고 솔직한 성을 백안시하는 것은 과연 자본주의 시대의 ‘신사’들뿐이었던가? 유교적 ‘예교’(禮敎)의 입장에서도 고대의 성기숭배는 ‘야만’이나 다름없었다. 성기숭배는 고대 일본이나 한반도에서 비슷한 모양으로 펼쳐졌지만, 이에 대한 유교적 배척의 강도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일본은 백제를 통한 유교의 수입을 이미 6세기에 시작하지만, 17세기 이전까지 유교는 지배층 윤리의 근간을 이루지 않았다. 그러기에 일본을 ‘중화’(中華)로 만들려는 중국의 역사서술 태도를 일본식으로 모방해 일본을 중심에 넣은 사서까지도 고대 신화의 ‘야한’ 모습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관찬 한문 사서로서 구비설화들의 모음인 와는 그 격을 달리하는 (日本書紀·720)에서도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의 스토리는 그대로 ‘외설적’이다. 섹스를 할 줄 모르는 두 신 앞에 할미새가 나타나 머리와 꼬리를 흔드니 두 신이 교합의 방법을 알아 곧바로 실천했다는 의 이야기만 봐도 알 만하다. 성리학적 관점에서 쓴 (日本王代一覽·1650년대)에서도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의 이야기를 거의 원래대로의 모습으로 찾아볼 수 있는 등 일본에서 고대 문화의 ‘야함’은 꽤 오래 보존됐다.
그런데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철저하게 유교화된 사회였다. 그러기에 적어도 관찬 사서에서 ‘성기 노출’은 금기에 가까웠다. 사찬 사서들이 남아서 한국 고대사회의 성기숭배의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있어 그야말로 천만다행이다. 예컨대 신라의 22대 지증왕(재위 500~514)을 보자.
‘성기 노출’은 종교나 미술의 필수마립간 시대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그는 법흥왕 시대 신라 도약의 기반을 마련해준 군주이기도 했는데, 사찬의 에서는 그가 무엇보다 그 ‘음경’으로 상징화된다. 그의 성기가 한 자 다섯 치, 즉 약 45cm의 ‘비범한 사이즈’라서 마땅한 배필을 얻지 못하다가, 커다란 똥덩어리를 누운 것으로 봐서 키가 일곱 자 다섯 치, 즉 약 2m25cm나 되어 음부도 그만큼 클 모량리(경북 경주시 건천읍) 여성을 어렵게 찾아내 왕비로 삼았다는 이야기다(권1). 그런데 관찬의 에서는 이와 같은- 너무나 ‘신라적인’- 이야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의 지증왕은 순장 제도를 폐지하고 지방 행정망을 정리하고 우경을 권장하는 등 권농에 힘쓰고 ‘신라’라는 국호를 제정한 모범적인 유교적 통치자일 뿐이다. 물론 그가 “몸이 크고 담력이 뛰어났다”는 신체 특징도 기록됐지만(권4) 더 이상 이야기가 나아가지 않는다. 김씨 왕실의 방계에 속해 정통성이 약했던 지증왕으로선 신라인들이 가장 숭상했던 ‘성의 능력’을 과시해서라도 위상을 높여야 하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던 걸로 이해되지만, 이런 상황을 에서 읽어내기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해서 한국 고대의 진정한 종교인 성과 성기의 숭배가 후손의 시선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가려지게 됐다.
세계의 어느 원시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원시시대의 한반도에서 성기숭배는 다산·풍요 신앙의 골자가 되어 깊은 뿌리를 내렸다. 인간의 번식과 땅의 풍요로움이 동일시돼 농경의례에서 성기가 등장하게 됐다. 예컨대 대전에서 발견된 방패 모양의 유명한 청동기에는 따비와 괭이를 들고 밭을 가는 남성의 그림이 보이는데 그 그림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남성의 커다란 성기다. 여성으로 생각되는 땅과의 상징적 ‘교합’을 이룸으로써 풍작을 빌고 있는 남자 무당이었을까? 아니면 밭갈이와 파종이 성교와 같은 본질의 과정으로 이해돼서 그림이 이렇게 나왔을까? 다른 건 몰라도 원시사회에서 ‘성기 노출’이 종교나 미술의 필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시종교란 -레닌이 잘 지적한 대로- 인간으로서는 제압할 수 없는 자연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려는 인간 집단의 의지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는데, 그만큼 그 숭배 대상은 ‘힘’일 수밖에 없었다. 곡식을 자라게 하는 토지와 태양의 힘, 동물을 번식케 하는 힘, 나아가 인간 집단의 지속을 보장하는 인간 번식의 힘…. 인간 차원에서 이 ‘힘’의 중심은 무엇보다도 성 에너지였기에 성기숭배는 자연스러웠다. 계급사회 시대에 접어들어도 자연에 대한 공포 극복의 요구와 ‘힘의 숭배’라는 종교 심성의 본질이 바뀌지 않았기에 성기는 여전히 숭상됐다.
대승불교에 음부 숭배가 끼어들다또 인간 집단의 미래를 보장하는 번식을 어디까지나 여성의 성기가 좌우하기에 남근과 여근 사이의 차별은 없었다. 예컨대 경주 미추왕릉 지구의 계림로 30호분에서 발견된 항아리 장식 토우를 보자. 임신한 여인이 가야금을 켜고 큼직한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이 하나가 되어 교접하는 장면이 보이는데, 다산을 기원하는 차원에서 벌거벗은 여체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여실히 느껴진다. 일본의 고대 인물 조각인 하니와(埴輪)나 중국의 토용(土俑)에서는 여근을 강조하는 이미지들이 비교적 드물지만, 신라 토우 에서는 오히려 흔한 편이다.
여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하도 강하기에 그 엄숙한 에서마저 선덕여왕(재위 632~647)과 옥문곡(玉門谷)의 고사가 부분적으로 인용된다(권5). 궁궐의 옥문지(玉門池)라는 연못에서 개구리떼가 사나운 모양으로 우는 꼴을 본 선덕여왕이 (성난 개구리가 상징하는) 백제군이 서라벌 근방의 옥문곡으로 쳐들어왔다는 걸 신비롭게도 알아차려 신라군에 명해 적을 전멸하게 했다는 것이 그 유명한 고사의 골자다. 물론 에서 보이는 “백제군이 남근인지라 옥문곡이라는 여근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곧 죽게 돼 있으니 쉽게 잡아 죽일 수 있다”는, 성교와 생사를 직결시키는 당대 신라인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준 선덕여왕의 설명을 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김부식이 아무리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옥문곡, 즉 여근곡(女根谷)에 대한 전승이 경주 지방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모양이다.
고대사회의 성적 개방성을 배우라‘생명을 이어주는 신성한 여근’을 간접적으로 등장시키는 설화들은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가락국(김해가야)이 신화적 시조인 김수로왕에게 아유타국에서 시집왔다는 허황옥(許黃玉)이 김해의 별포나루에 도착하자마자 맨 먼저 했다는 일이 무엇인가?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바쳤다는 일, 즉 성기를 노출해 과시했다는 일이다(권2, ‘가락국기’). 아유타국이라는, 불경 속에서 보이는 인도 국가에서 왔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불교가 도입된 이후에 원래 신화에 곁들여진 후대적 요소로 보이고, 허황옥 신화의 근골은 ‘바다’와 ‘산’, 즉 ‘물’과 ‘대지’를 상징하는 여신 내지 여사제가 ‘하늘’을 상징하는 왕과 성혼(聖婚)을 이루었다는 것인데, 성혼을 할 자격은 바로 과시할 만한 음부였던 것이다.
허황옥 신화에서도 보이는 사실이지만, 여성 음부의 숭배와 불교가 쉽게 결합할 수도 있었다. 원시불교 입장에서야 성이라는 힘이 고(苦)의 원천일 뿐이었지만 한반도에 들어온 중국화된 대승불교는 이미 풍요신앙과 일치가 돼 있었다. 특히 신라 중기 이후로 여성으로 인식됐던 관세음보살 신앙은 여성의 생명력이라는 테마와 얽히고설킨 것이었다. 원효 스님이 관음이 늘 머문다는 오늘날 낙산사의 자리로 가는 도중 관음보살의 화신인 한 여성이 생리 피가 묻은 옷을 빨고 있던 물을 “더럽다”라고 하여 거절하자 그에게 아직도 아집이 남아 있다는 것이 들통나 관세음보살의 참모습을 만나볼 수 없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권3,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 아이를 달라는 사람에게 아이가 태어나게 해주고, 눈이 먼 아이가 있으면 멀쩡한 새 눈을 아낌없이 주었다는 관세음보살의 생명력의 상징은 바로 ‘생리혈’이었다.
임신한 여성의 모습을 토우로 담은 신라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임신하거나 출산한 여인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미륵보살의 도솔천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정진했던 노힐부득의 암자에 임신한 여인으로 화한 관세음보살이 찾아와 출산하고 목욕한 뒤 자신이 목욕한 물을 이용해 노힐부득의 성불을 도왔다는 이야기는, 신라인들이 상상했던 관세음보살이 얼마나 ‘육체적인’ 존재였는지 잘 보여준다(권3, ‘남백월 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
관세음보살의 음부를 직접 거론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스토리들이 전해진다. 예컨대 중생사(衆生寺)라는 절의 관세음보살상을, 중국 황제 애첩의 초상화를 그릴 때에 황제만이 아는 배꼽 밑의 붉은 점을 우연치 않게 그려 황제의 노여움을 크게 산 적이 있는 한 귀화인 화가가 그렸다는 전설은 ‘여성 배꼽 밑’과 ‘관세음’을 연결시킨다(권3, ‘삼소관음 중생사’). ‘색즉시공’(色卽是空), 현실세계 속에도 부처님 세계의 종자인 불성(佛性)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대승불교가 긍정하기에 성 숭배가 불교 신앙 안으로도 스며들 수 있었다. 이에 비해 한국 종래의 개방적인 성 풍속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해신당(海神堂)과 남근석의 나라를 ‘동방예의지국’으로 강제로 바꾸려는 성리학은 훨씬 배타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이었다.
결국 한국의 문명개화 시대에 새로이 수입된 개신교와 혼합된 성리학적 엄숙주의는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의 일부 주를 제외하고서는 그 어떤 산업화된 민주국가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간통죄’가 한국에서는 여전히 실정법이다. 인터넷에 임신한 아내의 아름다운 나체 그림을 올린 미술 교사를 긴급체포해 형사처벌할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렇다고 해서 직장 여성의 40~ 80%가 체험했다고 하는 성희롱의 문제가 해결되기나 하는가? ‘마사지걸’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대통령 이하 정치인이나 관료의 성 의식의 저급한 수준이 개선이라도 되는가? 빅토리아시대의 영국을 방불케 하는 엄숙주의보다 차라리 고대사회와 같은 성적 개방성이 건전하고 비폭력적·양성평등적 성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참고 문헌:
1. 데루오카 야스타카 지음, 정형 옮김, 천화, 2001, 25~115쪽
2. ‘한국 고대 여성의 지위’ , 김두진, 제15집, 1994, 20-39쪽.
3.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청년사, 1998, 57~77쪽
4.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지음, 푸른역사, 2003, 79~1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