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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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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을 바치면 속국이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조공과 국가적 자주성은 양립 가능해…
‘단순한 허례’로 치부하는 것도 부적절한 해석
등록 2008-10-16 16:25 수정 2020-05-03 04:25

“큰 나라도 한 나라고 작은 나라도 한 나라인 것이다. 나라 위에 나라가 없고, 나라 아래에도 또한 나라가 없다. 모든 나라들의 권리는 피차 동등하다.”
(1895)의 이 구절은 한국인에게 완전히 새로운 국제질서의 도래를 알렸다. 강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원칙상 모든 주권국가가 서로 동등해야 한다는 새 시대에 한국도 서둘러 모든 분야에서 ‘독립’을 찾아야 했지만, 이는 2천여 년 역사와 단절을 의미했다. 진나라와 한나라가 기원전 3~2세기에 중원을 통일하고 중원 바깥의 이웃 정치체들을 그 영향권으로 흡수한 뒤 동아시아에서는 중원 국가를 중심으로 한 조공체제에 편입되는 게 국가 경영의 필수 조건쯤이 됐다. 오늘날 한 국가가 유엔 등 국제기구에 참가하고 세계 각국과 외교관계를 맺는 것이 ‘주권국가’ 되기의 중요한 기준인 것처럼, 19세기 후반 이전의 동아시아에서는 조공체제 편입이 ‘정상적 국가’의 징표였다. 오히려 중원 제국에 끝내 조공을 하지 못한 탐라국(제주도)이나 아이누족의 부족들, 아니면 명나라에 첫 조공을 바치게 된 1372년 이전의 유구(琉球)의 여러 나라(오늘날 일본 오키나와현) 등은 명실상부한 ‘독자적 정치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신세였다. 조공이란 ‘국가’가 되는 통과의례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 세 신인(神人)이 솟아났다는 삼성혈은 탐라국의 기원 신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탐라국은 476년 백제에, 679년부터 통일신라에, 그리고 938년부터 고려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 세 신인(神人)이 솟아났다는 삼성혈은 탐라국의 기원 신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탐라국은 476년 백제에, 679년부터 통일신라에, 그리고 938년부터 고려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그러한 의미에서 예컨대 479년 남중국 제나라에 조공을 하고 책봉까지 받은 고령의 대가야는 당시 지역질서에서 나름의 격을 갖춘 ‘국가’로 여겨졌을 것이다. 대외적으로 ‘국가’ 자격을 갖추었기에 그 나라 악기인 가야금이 신라에서도 우대를 받아 제례악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반대로 5세기 내내- 백제와 대가야, 왜국, 고구려 등 주변 세력과 달리- 중국에 한 번도 조공을 보내지 못한 신라는 등 당대의 중국 사서에 “사신을 보낼 형편도 되지 못하는 자그마한 후진국”으로 기록됐다.

조공 보내지 않는 신라는 ‘후진국’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역대 왕조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은 동북아 국가들을 오늘날 중국 교과서에서 ‘지방정권’ 또는 ‘할거정권’이라고 부르고 마치 ‘종속정권’이었던 양 서술하는 것은 역사 왜곡이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왜곡이라기보다는 ‘전통시대 역사의 부적절한 근대주의적 해석’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근대적 주권국가론 입장에서야 조공이나 책봉이 ‘독립 포기’처럼 보이지만, 중원 국가와 비중원 국가 사이의 모든 외교관계가 조공으로 인식됐던 전통시대의 동아시아에서는 조공과 국가적 자주성은 얼마든지 양립이 가능했다. 독립국임이 틀림없는 영국이 청나라에 최초의 사절단을 파견(1793)한 것도 청나라 쪽에서 조공으로 인식되지 않았던가? 또 청나라 조공국 중 하나인 버마는 18세기 중반에 몇 차례에 걸쳐 청나라의 침략을 격퇴해 내정에서 완전한 자주를 이루지 않았던가? 조공 관계란 종속이라기보다는 무역·문화 등 여러 영역에서 선진 권역과의 교류 가능성, 그리고 일정한 지역적 지위를 의미했을 뿐이다.

그러나 조공을 단순한 허례로 치부해 조공 관계가 우리 고대사에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도 민족주의 이념에 기반한 ‘전근대사의 부적절한 현대화’에 불과하다. 적어도 고대사에서 중원과 중원 바깥의 나라들 사이에는 경제·문화 등 여러 영역에서 현저한 수준 차이가 나타나기에 조공국에 조공은 큰 의미를 지녔다. 왜국의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가 608년 사절단을 이끌고 수나라에 조공했을 때 그 수행원 중 한 명인 다카무코노 구로마로(高向玄理)는 중국에 그대로 눌러앉아 수십 년간 공부를 계속한 뒤 640년 귀국해 대화(大化) 개혁(645) 이후 율령국가 건설사업과 대신라 외교의 책임을 맡았다. 조공외교 과정에서 그와 같은 우수한 ‘브레인’들이 키워지지 않았다면 과연 중원과 지리적으로 떨어진 일본에서 당나라를 모델로 한 율령국가를 만들 수 있었겠는가? 아니면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개창자인 사이조(最澄·767~822)와 밀교적 진언종(眞言宗)의 개창자인 구가이(空海·774~835) 등 장차 고승이 될 두 승려를 태운 804년 조공 사절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조공외교 속에서 일본 고대 문화가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국보다 중원 문화의 세례를 훨씬 더 일찍, 더 강력하게 받은 고구려라 해도 크게 봐서는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예컨대 소수림왕(371~384) 때 북중국을 거의 통일한 전진(前秦)의 왕 부견(苻堅·재위 357~385)과의 관계는 불교 도입과 태학 설립, 율령 반포와 같은 성과를 가져다줄 뿐 아니라, 371년 백제에 평양을 유린당하고 고국원왕이 전사하면서 크게 떨어졌던 고구려의 위신을 세우는 데도 도움이 됐다. 전진의 강성도 고구려에 기회였지만 전진이 남중국의 동진(東晉)에 완패를 당한 383년의 비수대전(淝水大戰)도 마찬가지로 호기였다. 북중국을 거의 제패한 전진의 세력이 망하니 광개토왕(재위 391~413)이 요동을 정벌하는 등 고구려가 그 틈새를 이용해 만주 지역에서 영토 확장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런데 439년 북위(北魏)가 다시 북중국을 통일하자 고구려는 만주 방면에서 군사작전을 정지하고 백제와 신라에 대한 공격으로 일관했다.

거인 북위를 잘못 건드렸다가 큰일을 당하고 싶지 않았던 고구려의 자기 보존 본능도 작용했지만 만주 쪽에서 현상 유지를 원해 고구려와 평화공존을 지향했던 북위의 의사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구려가 북위의 가장 큰 라이벌인 남쪽의 송나라에도 ‘복수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는데다 북위 왕실의 청혼을 거절하는 등 각종 실례를 범했지만, 북위는 조공 관계를 개설하려는 백제의 애원을 매정하게 거부하며 고구려를 한반도에서 ‘유일한 파트너’로 삼았다. 만약 조공이 단순히 허례였다면 공식·비공식 사절들을 - 고구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계속 보냈다던 백제의 손을 왜 뿌리쳤겠는가? 조공외교란 허례라기보다는 5~6세기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정통성 인정 절차였는데, 고구려 남하 작전에 백제와 신라가 계속 밀리는 광경을 지켜보는 북위의 처지에서는 고구려 이외의 한반도 국가들의 정통성을 인정할 필요가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중원 제국과 전쟁을 벌일 경우에도 전투 기간을 제외하고는 조공을 계속하는 상황이 빈번히 벌어졌다는 것이다. 예컨대 고구려는 598년 수나라의 제1차 침입을 격퇴하고 나서 2차 침입이 일어난 611년까지 수나라에 조공 사절을 몇 차례나 보냈다. 수나라의 적의를 뻔히 알면서도 계속 조공을 한 이유는 뭘까? 불편한 관계임에도 웬만하면 조공을 한 것은 당시에는 그것이 필수적인 ‘국제 예절’이었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도 전투 쉴 땐 계속해

조공외교란 요즘 국제 교류라는 범주에 드는 거의 모든 행위를 총망라했다. 예컨대 불교나 도교의 의미가 컸던 4~10세기 동북아에서 조공외교는 종교 교류까지 포함했다. 신라의 불교 공인(528)이 지배층의 불심이 두터웠던 양나라에 처음 조공한 521년 이후 7년 만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과연 단순한 우연이었던가. 불교 공인의 내인(內因)도 중요했지만, 양나라의 ‘보살 황제’ 무제(武帝·재위 501~549)의 대대적인 불교 우대 정책을 알게 된 법흥왕(재위 514~540)이 이를 ‘글로벌 스탠더드’로 간주하고 ‘벤치마킹’해 따른 바도 있었다. 법흥왕이 529년에 조칙을 내려 살생을 금한 것도, 말년에 스스로 머리를 깎아 왕비와 함께 사찰에서 지낸 것도( 권3) 양나라 무제의 신행을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이를 ‘6세기판 세계화’라고나 할까?

근대 민족주의적인 대표적인 역사 왜곡 삽화로 꼽히는 일본교과서 내의 <삼한조공도>. 민족주의적인 자국 중심주의를 벗어나 전근대사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해서 당대의 일을 당대의 눈으로 보기만 하면 ‘조공’은 자랑할 거리도, 부끄러워할 거리도, 싸울 거리도 아니다.

근대 민족주의적인 대표적인 역사 왜곡 삽화로 꼽히는 일본교과서 내의 <삼한조공도>. 민족주의적인 자국 중심주의를 벗어나 전근대사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해서 당대의 일을 당대의 눈으로 보기만 하면 ‘조공’은 자랑할 거리도, 부끄러워할 거리도, 싸울 거리도 아니다.

‘조공외교’에 대한 불필요한 폄하

다른 나라 군주의 행위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이 뭐가 좋으냐는 반박의 소리도 들리겠지만, 6세기 신라와 남중국 왕국들의 종교 교류는 지배층의 가시적 신행의 모방이라는 표면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565년 진나라 사신이 불경 1700권을 신라 왕실에 선물해 신라 불학 발전의 조건을 조성해주었는가 하면, 조공 사절들이 닦아놓은 길로 589년 원광법사가 진나라에 가서 불교를 공부하게 됐다. 조공외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녔던 고승들의 중국 유학은 원효, 의상과 같은 거성들을 배출한 7세기 신라 불학의 도약적 발전의 기반을 마련했다. 불교뿐만이 아니다. 남중국에 가서 도사를 찾아 바람을 타고 천하를 노니는 신선들의 가르침을 전수받겠다는 일념으로 587년 7월 고국 신라를 몰래 떠나 흔적 없이 사라진 젊은 귀족 구칠과 대세의 낭만적인 구도 이야기를 (권4)에서 읽을 수 있는데, 이로 봐서는 6세기 말의 신라 유식층은 이미 도교에 꽤나 정통했다. 당시에 도교적 현학(玄學)의 본고장이던 양나라·진나라에 조공하지 않았다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결국 용감한 젊은이 대세와 구칠도 조공 사절들이 닦아놓은 길로 간 것이라고 봐야 한다.

요즘은 쇠고기 수입 등 내줄 것은 다 내주고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이명박 정권의 편집증적 친미 일변도 외교를 비꼬아서 ‘조공외교’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한반도가 거의 2천 년 동안이나 앞장서 참여했던 동아시아의 전통적 외교관계에 대한 불필요한 폄하에 가깝다. 이명박의 외교와 달리 ‘진짜’ 조공외교는 철저히 호혜적이었다. 중원 바깥의 국가들이 중원 국가의 중심적 위치를 인정해주는 대가로 ‘문명적 국제사회의 멤버’로서 인정을 받았는가 하면 공물을 바친 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회사품을 듬뿍 얻어가곤 했다. 사실 조공 과정에서 이루어진 물물교환의 차원에서 보면, 조공외교는 관무역의 한 형태였다. 예컨대 통일신라의 조공 사절들이 당나라에 거의 매년- 어떨 때는 한 해에 두 번이나- 가곤 했던 8세기 초반에는 신라 사신들이 한꺼번에 2천~3천 필의 비단을 얻어가는 경우도 몇 번 있었다. 이와 같은 관무역의 자극은 9세기 이후 사무역의 발전, 그리고 해상무역으로 상당한 재력을 축적한 태조 왕건의 왕씨와 같은 호족 세력의 발흥에도 기여한 부분이 있었다.

조공이라는 관행의 또 한 가지 영향은 이를 오래 따랐던 중견 비중원 국가들이 스스로를 ‘작은 제국’으로 여겨 약하거나 불리한 위치에 있는 이웃들에게 조공을 요구한 데 있었다. 왜국은 적어도 5세기 이후로는 백제·신라·가야의 여러 나라들과 빈번하게 이뤄진 사절 교환을 스스로 ‘조공외교’라고 칭해, 물물교환 과정에서 한반도에서 들어오는 물품을 ‘공물’로 취급했다. 물론 이런 태도는 백제나 신라가 인정할 리 없는 왜국 혼자의 자기중심주의였지만, 476년부터 탐라국에서 사슴·노루 등을 공물로 받은 백제나, 670년 신라에 의탁한 고구려 왕실의 망명자 안승을 고구려왕에 봉해주고 679년 탐라국에서 조공을 받기 시작한 신라도 일종의 ‘소제국’들이었다. 광개토왕 이후 거의 100년 내내 백제나 신라를 “마땅히 속국이 돼야 할 나라”로 취급해온 고구려의 ‘제국적’ 야망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중세에 접어들어서도 고려·조선 등 한반도 국가들이 대마도나 여진 등에 간헐적으로 조공을 강요하지 않았던가. 재야 사학자들의 이야기와 달리 한반도 국가들이 ‘대제국’을 이룬 일은 없었지만, ‘소제국’으로서의 전통은 깊다고 봐야 한다.

부끄러워 말라, 역동적인 교류를

전근대사에 근대의 잣대를 들이대는 중화민족주의자들과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조공을 각각 “남을 복속시킨 우리의 자랑거리”나 “수치스러운 독립의 포기”, 또는 “의미 없는 허례일 뿐”이라고 여겨 서로 싸우고 있지만, 전근대사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해서 당대의 일을 당대의 눈으로 보기만 하면 자랑할 거리도, 부끄러워할 거리도, 싸울 거리도 없어진다. 동아시아적 세계질서의 다른 이름인 조공 질서는 이 지역에서 역동적인 ‘서로의 섞임’, 즉 경제·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국가 주도의 교류를 가능케 한 동력이었다. 고구려의 사례에서 보듯이 조공 질서란 꼭 평화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8세기 중반 이후 10세기까지 당나라와 신라, 발해, 일본 사이에 전쟁이 별로 없었던 사실은 평화유지 장치로서 조공·교린 외교의 저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조공 질서는 무엇보다 국제관계에서 안정성과 지속성을 의미했다.

참고 문헌:

1. ‘고대 ‘동아시아 세계론’과 고구려사’ 박대재, , 동북아역사재단, 2007, 13~67쪽
2. 김기협, 돌베개, 2008, 21~115쪽
3. 윤재운, 경인문화사, 2006, 81~86쪽
4. 노태돈, 사계절, 1999, 334-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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