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우생순’ 2탄 준비해야겠는데요

등록 2008-08-26 00:00 수정 2020-05-03 04:25

‘비공인 핸드볼인’ 임순례 감독이 본 여자핸드볼 경기… 4강전에선 4년 전 덴마크와의 결승전이 그대로 재현되다

▣ 임순례 영화 감독

내 기억이 맞다면, 2008 베이징올림픽이 시작되기 전 여론조사에서 ‘베이징에서 가장 보고 싶은 경기’로 여자핸드볼이 박태환의 수영에 이어 2위로 꼽혔었다. 이 초미의 국민적 관심은 아마 대한민국 국가대표 여자핸드볼 팀이 올림픽 때마다 보여주는 강인한 정신력과 투지, 특히 지난 아테네올림픽 결승전에서의 놀라운 ‘투혼’에 대한 깊은 인상이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인 때문일 것이다.

중계방송을 보지 말자고 결심했는데…

지난해 이맘때, (이하 )을 찍으면서 배우들과 나는 “내년에 꼭 베이징에 함께 응원 가자”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세 주연 여배우들의, 각기 곧 방영 예정인 드라마 촬영, 라디오 생방송 진행 및 기타 꽉 짜인 스케줄로 인하여 우리의 약속은 아쉽지만 이행되지 못했고, 내가 베이징에 가지 못한 이유에는 개인적인 딜레마가 숨어 있다. 티베트 독립 문제에 관심이 많은 나는 티베트인의 인권을 유린하고 치러지는 베이징올림픽을 마음으로부터 지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소극적이고 소심한 저항의 표시로 이번 올림픽 중계를 보지 말자는 ‘굳은’ 결심을 홀로 했지만, 영화를 찍으면서 ‘비공인 핸드볼인’이 된지라 핸드볼 경기까지 외면하기란 실로 어려웠다.

여자핸드볼 대표팀은 통상 한 번 치르면 되는 올림픽 예선을 세 차례나 치르는 천신만고의 사투 끝에 베이징올림픽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계핸드볼협회와 아시아핸드볼협회의 몰상식한 횡포와 중동의 돈놀음에 차이고 유럽의 텃세에 짓밟히는 대한민국 핸드볼 팀의 서러운 처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베이징에서의 여자핸드볼 예선리그 첫 게임은 세계 최강인 러시아와의 경기였다. 최근 세계선수권대회를 2연패한 러시아는 사실 한국팀에는 여러모로 버거운 상대였다. 후반전 한때 9점 차까지 벌어지면서 내 마음에 슬쩍 ‘좀 어렵겠구나’라는 생각이 스며들 무렵 최승돈 아나운서의 일갈이 들려왔다. “지금쯤에서 포기하고 채널 돌리시려는 분들은 한국 여자핸드볼 많이 안 보신 분들입니다. 여자핸드볼은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그랬다. 그 말을 코트 위의 선수들이 마치 전해 듣기라도 한 듯 갑자기 연속 여섯 골을 몰아치는 등 순식간에 동점을 만들면서 극적인 무승부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감동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에서 핸드볼 코디네이터를 담당했던 ‘공인 핸드볼인’인 이대진 코치와 문자를 나누었다. “ 2탄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요?”란 나의 농담 섞인 문자에 이대진 코치의 진지한 답이 돌아왔다. “배우들이 다시 하려고 할까요? 너무 힘들어서.” 러시아를 이긴 여세를 몰아 독일과 스웨덴을 여유 있게 격파한 여자핸드볼팀의 기세엔 거침이 없었다.

욱일승천하던 한국팀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대부분의 위기는 방심에서 시작되는 법. 애초부터 가장 손쉬운 상대라고 여겼던 브라질에게 일격을 당한 한국팀은 다시 심기일전한 뒤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운 몸놀림을 선보이며 헝가리와 예선리그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장식했다. 8강전 첫 상대가 바로 홈팀 중국이었는데 한국의 명선수 출신 강재원 감독을 영입한 중국대표팀도 아직은 우리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확실하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팀이란 것

그리고 결승으로 가는 길목인 4강전에서 세계 2위권인 노르웨이와의 일전을 맞게 되었다. 경기 전 한국 선수단은 한번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피력했고 국민들의 기대치는 그 어느 때보다 최고치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와의 경기 결과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 덴마크와의 결승전을 상기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지막 골 판정에 대한 억울함과 부당함은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체력에서 오는 애초의 전력적 열세를 극복해내는 우리 선수들의 믿기 힘든 불굴의 정신력과 투지, 경기 내내 드러내놓고 행해지는 빈번한 오심과 편파 판정, 온 국민의 애간장을 녹이기에 족한 역전과 박빙이 되풀이되는 극적 승부 등 그 모든 것이 유사했다. 노르웨이와의 경기가 모두 끝나고, 노르웨이 선수들이 둥그렇게 둘러서서 기쁨의 율동을 쏟아내는 그 뒤로 망연자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국 선수들이 한 프레임으로 잡힐 때 나는 아테네 결승전 장면을 다시 보는 듯한 착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팀만 덴마크에서 노르웨이로 바뀌었을 뿐 오성옥 선수의 눈물로 범벅진 얼굴과 오영란 선수의 멍한 시선, 임영철 감독의 수만 가지 사연이 내포된 그 복잡미묘한 표정이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마지막 골에 대한 제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임영철 감독은 결과가 나오기 전에 세계 핸드볼 판도를 감안할 때 이 판정이 번복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않았던가. 비록 결승 진출에 실패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대한민국 여자핸드볼 팀은 정말 세계에서 가장 강한 팀이라는 것이다. 등록된 실업팀 선수가 100명도 채 되지 않고 주전들 평균 나이가 34살이 넘는 실정에서 세계 강호들과 당당히 실력을 겨눠 4강에 진출했고 그 과정에서 그 어느 팀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불굴의 정신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미 그녀들은 진정한 챔피언이라는 칭호를 선사받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뜨거운 약속을 잊지 말자

더군다나 오성옥, 오영란, 허순영, 홍정호, 박정희 등 노장들의 부재가 확실시되는 차기 올림픽을 걱정하던 우리에게 희망의 빛이 선사되기도 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귀여운 미꾸라지’라는 재미있는 별명을 선사받은 스무살 막내둥이 김온아 선수를 비롯하여 선방하고 나서 해맑게 웃는 차세대 수문장 이민희 선수, 이번에 많이 뛰지는 못했지만 커다란 가능성을 선보인 배민희·송해림 선수, 언제나 항상 믿음직한 문필희·김차연 선수, 악바리 안정화 선수의 모습은 우리에게 변함없는 신뢰를 줄 것이다. 오랫동안 함께 고생하고도 부상으로 이번 올림픽 대표팀에 낙마한 이상은·우선희 선수에게도 뜨거운 위로와 사랑을 보내고 싶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핸드볼 전용 경기장 건립을 약속했다. 대다수 국민도 결승전 진출 좌절에도 핸드볼에 대한 지속적인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약속했다.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한 우리 선수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보답은 한 가지뿐이다. 또 다시 우리의 뜨거운 약속을 잊지 않는 것….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