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하야카와 나미 혹은 엄혜랑, 경기 후 그가 박성현과 나눈 동료애처럼 한국 양궁의 지평은 넓어라</font>
▣ 김수경 영화 칼럼니스트·전 기자
난공불락. 88년 서울올림픽 이래 한국 여자양궁은 완벽히 세계를 지배했다. 서거원 양궁협회 전무의 말처럼 “한국은 세계 양궁계에서 양궁 발전을 저해하는 국가로 찍혀 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을 견제하기 위해 경기 방식을 수시로 바꾸기도 한다”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24년 만에 영원할 것 같던 여자양궁의 제국은 무너졌다. 은메달을 딴 박성현은 “금메달이 값지다는 걸 알려주는 은메달”이라며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메달의 제국은 무너졌지만 한국 양궁의 지평과 사고는 더 깊어지고 있다.
“언니, 축하해” “수고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에이스’ 박성현과 하야카와 나미(한국이름 엄혜랑)가 벌인 8강전에서 나왔다. 승부는 사실상 일찍 갈렸고 마지막 시위를 당기는 하야카와의 얼굴에 미련은 없었다. 환한 웃음으로 가득한 하야카와의 얼굴은 한국 관중들과 겹쳐 보일 정도였다. 하야카와는 박성현을 안으며 “언니, 축하해”라고 말했다. 아테네올림픽 단체전에서 마지막 10점을 꽂으며 중국을 1점차로 따돌려 ‘포커페이스의 승부사’로 정평이 난 박성현은 밝은 미소로 “수고했다”라며 고등학교 후배를 다독였다. 그것은 스포츠맨십을 통한 격려보다는 동료애처럼 보였다. 세계로 나가기 위해 세계를 넘어서는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멍에를 지고 사는 한국 양궁의 고통을 함께 짊어진 공동체 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국을 겨눈 활시위’ 운운하며 해묵은 반일감정을 부추기던 스포츠 신문들의 흥분이 머쓱해지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조국을 메친 사나이’라고 폄하했던 추성훈이 한국 공중파를 헤집는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재탄생한 것처럼 세상은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하야카와가 이겼다면 어땠을까? 경기장 밖은 몰라도 두 사람의 반응은 지금과 똑같을 것이다. 귀화 선수에 대한 감정적 시각은 위험하다. 유독 귀화 선수에 대해 경직된 시각을 보이는 우리나라에서 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에서 뛰는 한국 선수는 사정을 불문하고 비난하는 태도는 쉽게 대중 속으로 퍼져나간다. “나는 조국을 겨누지 않았다. 맘고생하는 연예인들 심정을 이해하겠더라”는 하야카와 나미, 혹은 엄혜랑은 “일본에서 양궁을 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은 편합니다”라고 했다. 대표가 될 수 있어서 기쁘다기보다는 좋아하는 양궁을 덜 걱정하면서 맘껏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편한 마음은 성적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7년 세계실내선수권 최초 우승에 이어 일본 신기록을 연거푸 경신했다. 아시아 양궁선수권 단체전에서는 한국 선수단을 침몰 직전까지 몰고 갔다. 이것이 한국에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두 번 조기 탈락했던 선수의 현재까지 드러난 잠재력이다. 혹자가 말하는 “한국 양궁에서 200위권이면 다른 나라 대표선수가 가능하다”는 말이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참고로 한국 양궁 선수는 1500명 가량이다. 엄혜랑은 전북체고, 한국토지공사에서 양궁 선수로 뛰다가 가족사를 이유로 2006년 일본으로 국적을 바꾸었다.
경기는 경기일 뿐 오버하지 말자
남자 단체전에서 한국을 위협한 오스트레일리아팀의 스카이 킴(한국 이름 김하늘)과 오교문 감독, 아테네올림픽에서 남자 개인전 메달을 획득하고 기뻐하던 이기식 감독을 비롯해 현재 세계 양궁 국가대표팀 감독 4명 중 1명은 한국 사람이다. 대부분 아프리카 소년들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축구를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프리카 축구의 지평과 위상을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기여를 했다. 그저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양궁을 계속하고 싶어서 이 땅을 떠나 어렵게 다른 나라를 택한 한국 양궁 선수들이 비난받거나 괴로워해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경기장에서 치열함과 승부욕은 경기 자체에 머물러야 한다. 관중들의 감정은 마음속에 머물러야 한다. 경기가 끝난 뒤 그것이 선수나 다른 국가를 향한다면 경기와 상관없는 선입견이나 악감정일 가능성이 높다. 한 코미디 프로그램이 말한다. ‘콩트는 콩트일 뿐 오해하지 말자.’ ‘경기는 경기일 뿐 오버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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