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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주 채널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등록 2008-08-22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한국이 강한 종목만 내보내는 이기적 중계방송… 종목별·마라톤 그룹별 채널을 구상해보노라</font>

▣ 김중혁 소설가

올림픽의 금메달 수는 모두 몇 개일까. 302개다. 302번의 기적과 같은 멋진 승부가 펼쳐질 것이다. 그 모든 경기를 보고 싶다. 보면 좋겠다. 하지만 불가능이다. 시간도 모자라지만 채널도 모자란다. 대한민국 선수의 경기만 벌어지면 모든 채널에서 똑같은 화면을 내보내니 모자랄 수밖에 없다. 나도 대한민국 사람이지만 채널의 낭비가 지겹다. 한국이 양궁의 강국인 건 안다. 아는데, 그래도 그렇지 금메달이 4개뿐인 종목을 64강부터 중계하는 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된다. 나는 보고 싶은 경기가 많다. 금메달이 11개나 걸린 요트 경기도 보고 싶고, 금메달이 14개나 걸린 조정 경기도 보고 싶으며, 금메달 18개의 사이클, 금메달 16개의 카누·카약도 보고 싶다. 그러나 대한민국 선수들의 메달 가능성이 희박하니 절대 중계해줄 리 없다. 올림픽이 벌어질 땐 특별 채널을 편성해 한 채널당 한 종목을 보여주면 좋겠다. 요트 채널, 카약 채널, 사이클 채널 등등, 내가 보고 싶은 경기를 아무 때나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채널이 생긴다면 마라톤 경기 중계 때도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채널에서는 선두그룹을 보여주고, 두 번째 채널에서는 두 번째 그룹을 보여주고, 이런 식으로 마라톤에 참가한 대부분의 선수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라톤이 마지막 경기인 이유

나는 올림픽 경기 중에서 마라톤을 가장 좋아한다. 그 다음으로 육상 경기가 좋고, 그 다음으로 근대 5종이나 트라이애슬론 같은 지긋지긋하게 지난한 경기가 좋다. 클래식한 취향이라고나 할까, 흥분하기보다 텔레비전 앞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렇다. 마라톤 경기의 가장 큰 매력은 ‘멍함’에 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규칙적으로 내딛는 다리를 보면서 왼발에는 오른팔, 오른발에는 왼팔, 역시 규칙적으로 내미는 팔을 보면서 멍해진다. 어느 순간 정신을 놓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물론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처럼 관중이 경기장으로 뛰어드는 사태- 1위로 달리던 반데를레이 리마는 결국 3위로 골인했다- 가 생기면 그 리듬이 깨질 수 있지만 대체로 2시간 내내 멍할 수 있는 스포츠가 그리 흔한가 말이다.

내가 마라톤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국가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다른 경기와 달리 마라톤은 나라와 나라의 대항으로 보이지 않는다. 분명 가슴에 국기를 달고 달리지만 그것은 오직 상징적인 의미일 뿐 마라톤은 어쩔 수 없이 개인과 개인의 전투, 혹은 개인만의 전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라톤이 올림픽의 맨 마지막에 포진된 것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일지 모른다. 지금까지는 나라와 나라가 싸웠지만, 이제 나라와 국경의 차이를 없애버리고 모두 하나가 되어 마라톤을 시청해요, 라는 메시지.

마라톤 관전의 또 다른 재미는 도시 구경이다. 선수들의 앞으로 뒤로 옆으로 펼쳐진 개최 도시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절대 지루하지 않다. 베이징올림픽의 마라톤 코스는 톈안먼 광장 옆 도로에서 출발해 톈탄공원, 시창안도로, 베이징동물원,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등을 지난다. 선수들을 방송하는 채널 말고 마라톤 코스의 모습을 보여주는 채널도 있으면 좋겠다. 선수의 이마쯤에다 카메라를 설치하면 더 좋겠지만 선수들에게는 무리한 부탁일 테니 마라톤 중계 전문 선수를 뛰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 아, 카메라를 이마에 달고 뛰려면 힘들겠다.

서른여덟, 내 나이다, 힘들겠다

지금껏 마라톤을 보면서 특별히 한 선수를 응원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달리는 모든 선수를 응원했던 것 같다. 모두 대단하고 기특했다. 이번에는 응원할 선수가 생겼다. 대한민국의 선수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나는 이봉주를 응원한다. 서른여덟, 내 나이다. 힘들겠다. 이봉주 채널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2시간 내내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텔레비전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와 함께 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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