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386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통찰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가 오랜만에 에세이집을 냈다. (지성사 펴냄·1만3천원)는 그가 여러 매체에 기고한 칼럼과 홈페이지에 쓴 글을 엮은 책이다. 모두가 예상했겠지만, 그의 논리와 문장은 한결같이 반듯하다.
지은이의 결론은 간단하다. ‘조국의 민주화’. 1987년 이후 놀라운 정치적 민주화를 이뤄내고, 남북관계도 공존 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며, 민주화운동에 뿌리를 둔 정치세력이 10년 동안 집권한 뒤인 지금 말이다. 진보는 차고 넘쳐서 질척대지 않는가? 그러나 지은이는 민주화된 우리사회가 진보의 과잉이 아니라 과소로 고통받는다고 생각한다.
책에 따르면, 범진보 진영은 아직도 ‘민주 대 반민주’ 혹은 ‘민족 대 반민족’이라는 낡은 구도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이 대안 있는 진보로 발전하지 못하는 사이에 양극화와 우경화가 찾아왔다. 그러므로 실질적 민주주의는 여전히 타는 듯 목마르다. 지은이는 정치, 경제, 인권, 법률, 통일, 대학, 여성 등의 문제에서 진보가 무엇을 더 성찰해야 하는지 말한다. 문제는 지금, 이곳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다.
정치 개혁 분야에서 조국 교수가 생각하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정당정치의 정착이다. 대선만 앞두면 정책이고 이념이고 팽개치고 이합집산하는 지금의 정치를 바꾸기 위해서는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하다. 그 하나로 대선에서 프랑스식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자고 한다.
경제 개혁은 지금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눈물겨울 정도로 큰 의미를 지닐 것이다. 민주화운동의 잔치는 끝나가는데, 삶은 불안하고 시장권력은 눈부실 지경이다. 지은이는 법학자답게 재벌 총수들에게 유독 관대한 법적 환경을 바꾸자고 주장한다. 이를 위한 제도적 대안으로 상설 특별검사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제시된다.
인권 개혁에서는 이런 일침을 특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인권 보호는 반드시 일정한 사회적 비용과 부담, 그리고 다수자의 개인적 손실이 수반된다… 다수자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고 불편함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소수자의 인권이 보장된다면 그것은 결코 인권이 아니다.” 소수자 보호가 인권 개념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법률 개혁에서 지은이는 특별검사제의 정형화와 상설화를 거듭 주장한다. 특별검사제의 긍정적 기능에 대한 믿음이 매우 일관돼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대학 개혁 문제에선 ‘서울대 폐지론’에 대한 입장이 재미있다. 지은이는 서울대의 개혁을 주장하면서도 폐지론에는 유보적이다. 국공립대 통합에 소요될 엄청난 예산, 기존 명문 사립대로 이동해 재생산될 학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서울대 교수)가 의식을 규정했는지 아닌지는 읽어보고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이 반듯한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전혀 쓸데없이 보이는) 에필로그다. 조국 교수는 “그래, 나는 386이다!”라고 외친다. 가장 단단한 세대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군부독재를 박살냈으며, 신자유주의를 개혁이라 착각했으며, 아이들을 학원에 구겨넣고 한국 사회를 정글로 만들고 있는, 그 386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나는 사회주의자다… 남북의 정치적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나는 민족주의자다… 민주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민족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나는 국제주의자다… 이렇듯 자신을 딱 하나의 ‘주의자’로 규정하지는 못하지만 특정 상황에서 어떠한 내가 필요한지는 직관과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이게 단점인지 장점인지 모르겠으나, 민주화의 긴 터널을 걸어오며 “딱 하나의 주의자는 아니라도” “특정 상황에서 어떠한 내가 필요한지”를 알게 된 지식인은 386임을 자랑스러워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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