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의 일본어 소설까지 망라하여 식민지 시대 풍경을 읽는 김철의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전선으로 물건을 왕복한다는 이야기를 죽을 때까지 믿은 어머니는) 내가 경성에 가 있던 5년 동안 수도 없이 전선을 바라보며… 아들 물건이 전선에 매달려 있지나 않을까 하고 기다렸을 것이다.” 1942년 한설야의 라는 소설은 전선을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나를 잘 보여준다. 염상섭의 소설 에서는 ‘덕률풍’(telephone)이 갈등을 조장하고 해결하는 중요한 물품으로 등장한다. “네모반듯한 나무 갑 위에 나란히 얹힌 백통 빛 쇠종 두 개”는 웬 건지 삼백원이나 하더니 기생이 전화해 남편을 불러내는 “난장 맞을” 것이다가 나중에 뜻밖의 횡재의 물건이 된다. 소설에서 식민지 시대의 풍경을 찾아 읽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지스펙트럼 5-019)이 건져올린 이야기들이다.
책에는 국문학자이면서 ‘국어의 순수성과 단일성’을 공격해온 저자의 주장이 알기 쉽게 녹아 있다. 골치 아픈 역사 해석 문제는 거둬두고(저자는 의 편집진이다), 저자가 국문학에서 던지는 질문들은 솔깃하다. 일제시대에 식민지 작가에 의해 일본어로 쓰인 소설은 한국 문학인가 일본 문학인가. 그 어떤 문학도 아닌가. 지금도 ‘성역’으로 지켜지고 있는, 한국문학이 한국인에 의해 한글로 쓰인 문학이라는 상식은 1936년에도 있었다. 잡지 는 ‘조선 문학의 정의’라는 특집 기사에서 ‘조선 문학은 조선글로 조선 사람에게 읽히기 위하여 쓴 것’이라는 일반적인 정의를 대표 문인 12명에게 묻는다. 아무도 이에 대해 이의를 달지 않는다. (암흑기에 꿋꿋이 지켜진 신념이 아니라 통념과 달리 이 시기 ‘제국’의 필요에 의한 ‘위계화’ 덕에 조선어 착취가 심하지 않았다는 논의와 함께) 그는 위의 이 질문에 뭐라고 정확히 답할 수는 없지만, 이런 정의에 따르면 “일본어로 쓴 수많은 작품들은 암흑 속으로 잠기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첫째로 연구하는 자의 ‘순박함’에서 연유하는 듯하다. 그는 더불어 이 시기가 ‘암흑기’ ‘공백기’가 아니라 한국어와 한국 문학의 다른 가능성들이 모색되는 역동적인 시기라고 말한다. “오늘날 그것들은 민족과 모국어에 대한 비겁한 배신 행위로밖에는 기억되지 않지만, 그 기록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뜻밖에도 전혀 다른 모습들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글의 맨 앞에 인용한 한설야의 역시 일본어로 쓰인 작품이다.
장혁주가 있다. 그는 식민지 시기 최초로 일본어로 소설을 써서 일본 문단에 데뷔한 작가다. 데뷔작은 좌익 문예지 현상 공모에 당선된 . 그의 등장은 일본 프롤레타리아트 문단에서 ‘지주 계급과 일본 제국주의의 착취에 시달리는 조선 농민의 비참한 삶을 고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이후의 문제작은 양쪽 문단에서 외면당하고 지금은 ‘친일문학론’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게 되었다. 저자는 “제국의 지배 아래서 제국의 언어로 발언하는 피식민지인은 일종의 복화술사(複話術師)”라고 말한다. (장혁주에 뒤이어 일본 문단에 데뷔한) 김사량이 쓴 에 나오는 에피소드는 이 소설들의 상황을 은유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현’은 (망명한) 누이의 안내로 북경의 북해공원을 관광하던 중이었는데 누이는 저쪽 일본 군인이 나타나자 공포에 사로잡힌다. 가까이 가보니 일본 군인은 현의 학교 동창이었다. 그는 군인과 일본어로 이야기하다가 놀라 도망가는 누이를 발견하고는 ‘기다려’라고 말한다. 일본어였고 누이는 알아듣지 못한다. 일본어로 창작한 동기를 “민중의 비참한 생활을 널리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장혁주)라고 한 작가들의 비극적인 운명인 셈이다.
“구상은 일본말로 하니 문제 안 되지만, 쓰기를 조선글로” 하려니 조선말을 얻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고 한 김동인, 최초의 한글소설 를 연재하기 전 한자에 조선말 음을 단 기이한 소설을 쓴 이인직. 이런 고뇌를 거쳐 근대 한국어가 만들어졌다. 한국어는 낯설고 ‘외래적’인 것이었다. 한국말이 수용한 근대화가 아니라 한국말이 근대화의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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