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친구들을 찾아가는 어느 일본인의 여행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아버지가 일본 공산당 간부였던 요네하라 마리는 1960~64년에 체코 프라하에 있는 소비에트 학교를 다녔다. 그곳은 동유럽(혹은 중부유럽)뿐 아니라 전세계의 공산당 간부 자녀들이 모인 국제학교였다. 90년대 말 러시아어 동시통역사로 일하던 마리는 소비에트 학교 동급생 3명을 찾아나선다. 그들의 엇갈린 인생을 기록한 책이 (마음산책 펴냄, 1만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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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제목이 소녀 취향이고, 문장 역시 소녀 취향이지만, 내용은 묵직하다. 이 책에는 두 개의 시간대가 교차하고 있다. 하나는 ‘프라하의 봄’ 이전에 사회주의권 전체가 꿈틀대던 1960년대이고, 또 하나는 사회주의의 꿈이 산산이 부서져버린 1990년대 말이다. 당신이 좌파든 우파든, 두 개의 시간 속에 인간에 대한 믿음과 절망이 부딪히고 있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은이는 친구들의 엇갈린 삶 속에서 역사를 찾아낸다.
천방지축 그리스 소녀 리차. 아버지가 그리스에서 체코로 망명한 뒤 태어났지만, 그리스의 새파란 하늘을 본 것처럼 자랑하던 소녀였다. 공부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했던 리차는 따뜻한 마음으로 지은이를 감싸주었다. 30년 뒤 찾아간 프라하에 리차는 없었다. 리차의 운명을 바꾼 것은 1968년 프라하의 봄. 아버지가 소련군에 반대해 서독으로 쫓겨나면서 리차의 ‘특권계급’ 생활도 막을 내렸다. 천신만고 끝에 명문 카렐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 지금은 독일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본 독일은 “돈이 만능인 사회”다. 사람들의 일상에 문화가 공기처럼 스며 있던 체코와 너무 달랐다. 의학부 수업료는 천문학적이라 부자가 아니면 다닐 수 없었다. 공산당에서 제명당했지만 한 번도 공산주의를 버리지 않았던 아버지의 삶은 리차의 의식 속에 그렇게 녹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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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외교관의 딸 아냐.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지만 곁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푸근해지는 소녀였다. 90년대 말 지은이가 방문한 루마니아는 빈곤과 들개가 지배하는 폐허였다. 그러나 차우셰스쿠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리차의 부모님은 교묘하게 자신의 특권을 지켜 생존했고, 궁궐 같은 부쿠레슈티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애국심에 들떠 있던 소녀 아냐도 영국으로 유학간 뒤 스스로를 영국인이라 여겼다. 그는 아직도 ‘새빨간 거짓말’ 속에 살고 있었다.
베오그라드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유고슬라비아의 소녀 야스나. 놀라운 두뇌와 그림에 대한 재능으로 지은이를 기죽게 했던 소녀는 피비린내 나는 발칸반도의 내전 속에서도 삶을 이어갔다. 보스니아 무슬림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제대로 된 직업을 얻지 못했지만, 베오그라드의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하던 학생시절의 모습 그대로였다. 곧이어 터진 나토의 공습에도 그는 삶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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