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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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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기록, ‘조선공산당 선언’은 누가 썼을까

일제시대 사회주의 운동은 식민지 피억압 민족의 해방운동… ‘조선공산당 선언’의 역사 속 위치
등록 2024-06-29 14:49 수정 2024-07-04 15:16
1926년 9월 발행된 <불꽃> 제7호 1~4면에 게재된 ‘조선공산당 선언’ 첫 쪽 일부. 임경석 제공

1926년 9월 발행된 <불꽃> 제7호 1~4면에 게재된 ‘조선공산당 선언’ 첫 쪽 일부. 임경석 제공


한국 독립운동의 이념을 대표하는 문헌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3·1운동을 상징하는 민족대표의 ‘기미독립선언서’를 거론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려 내용을 기억하는 국민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선포하고,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 방식의 자주독립을 주장한 역사적 문헌이다.

신념은 달라도 ‘민족해방’ 목표는 같다

더러 마뜩잖게 여기는 이도 있다. 비폭력의 온건한 독립운동을 지향했고, 뒷날 지조를 더럽힌 최남선이 집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기는 분이라면 1923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이 채택한 ‘조선혁명선언’을 더 높이 평가하리라. 민중 본위의 폭력 혁명으로 일본의 식민통치를 타도하겠노라 주장한 장쾌한 문서다. 게다가 문서를 지은 사람은 올곧은 지사이자 역사학자로 유명한 신채호가 아닌가.

두 문서는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 속에서 형성됐다. 내용과 행동 전략이 다르다. 하나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다른 하나는 무정부주의적 신념에 입각해 쓰였다. 하지만 어느 것이나 피억압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고취하는 보편적 가치를 갖는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한국 독립운동사 흐름 속에 우뚝 솟은 이념의 푯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관점에서 쓰인 주목할 만한 독립운동 문헌은 없는가. 그럴 리가 없다. 사회주의 이념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지 않는가. 마땅히 ‘조선공산당 선언’을 꼽아야 할 것이다. 이 문헌은 냉전과 분단의 이념적 금제 탓에 그 값어치를 온전히 평가받을 수 없었던 비운의 기록이다. 뒷날 이념적 금제가 풀린다면 이 문헌은 ‘기미독립선언서’ ‘조선혁명선언’과 병칭되리라고 믿는다. 제국주의 시대 피억압 민족의 해방 서사로서 온전한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공산당 선언’은 조선혁명이 식민지 유형의 혁명임을 명백히 했다. 조선혁명의 성격은 영국이나 독일과는 다르다는 것이 ‘조선공산당 선언’의 판단이었다. 자본주의 산업화가 고도화한 유럽 열강에서는 노동자 혁명이 당면 과제가 되겠지만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 또 조선은 제정러시아처럼 산업화 정도가 중위 수준에 이른 나라와도 달랐다. 그 나라에서는 노동자⋅농민이 미처 해결되지 못한 부르주아혁명 과제를 수행할 터지만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혁명은 식민지 피억압 민족의 해방운동이었다.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드는 것이 ‘조선공산당 선언’이 제기한 목표였다. 그 문헌에 거론된 표현을 보면, “당면한 투쟁의 목적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에서 조선을 절대로 해방함”에 있다고 명시했다.1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이 독립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기준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가? 조선의 적은 일본 제국주의였다. 그것이 붕괴해야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일본에 맞서 투쟁하는 사람들은 누군가. 네 계급이 있다고 보았다. 노동자·농민·자영업자·민족자본이 동맹을 맺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 사람 중에도 동지가 아닌 자들이 있음을 암시한다. 바로 지주 계급과 예속자본이다. 농촌과 도시에 거주하는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와 이해관계가 일치한 까닭에 조선독립을 찬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독립 이후 어떤 국가권력을 세울지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점을 뚜렷이 했다. ‘국가의 최고 및 일체 권력’은 국민이 조직한 “직접, 비밀, 보통 및 평등의 선거로 성립한 입법부”에 있다고 못박았다. 국민주권론을 견지하며, 국민이 선출한 ‘입법부’가 최상급 의결기관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4대 계급 동맹에 입각한 민족통일전선 정권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매우 유연하고 포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전략적 관점이 사회주의 운동사 속에서 항상 동일하게 표출됐던 건 아니다. 운동 대열이 분열돼 있을 때는 으레 더 급진적이고 배타적인 전략을 지지하는 그룹이 대두했다. 시기적으로도 부침이 있었다. ‘조선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1926년과 그 이듬해가 바로 민족통일전선 정권론의 전성기였다. 세계대공황이 도래한 뒤에는 달랐다. 1930년대 사회주의자들의 전략론은 급격히 좌경화했다.

1926년 6·10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한 세력이 있었다.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이었다. 그 당시 살포됐거나 그럴 예정으로 만들어진 전단으로서 오늘까지 전해지는 것은 도합 7종이다. 어느 것 할 것 없이 위 비밀결사가 제작한 것이다. 이 전단으로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목표와 구호를 알 수 있다.

전단 중에서 주된 것은 ‘격고문’이다. 맨 마지막에 기재된 명의인에 눈길이 간다. 바로 ‘대한독립당’이다. 어라, 이 격문을 제작한 주체는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이 아닌가. 공산당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대한독립당을 내세운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대한독립당을 민족통일전선 기관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4대 계급의 대표자들이 단결해 하나의 정당을 설립할 터인데, 그 당의 잠정 명칭을 대한독립당이라고 상정했다.

1926년 6·10만세운동 당시에 살포된 ‘대한독립당 격고문’의 맨 마지막 명의자 부분. 임경석 제공

1926년 6·10만세운동 당시에 살포된 ‘대한독립당 격고문’의 맨 마지막 명의자 부분. 임경석 제공


투쟁 구호에도 눈길이 간다. ‘대한독립만세’ ‘일본인을 조선 영역 내에서 몰아내자!’ 등이다. 단결을 촉구하는 구호도 있다. ‘대한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 ‘혁명적 민족운동자는 한 덩어리가 돼라!’ 계급투쟁이 아니라 민족해방에 관한 슬로건이 나부끼고 있다. 4대 계급 동맹론과 반일 민족통일전선 강령이 약동하고 있음을 본다. 다시 말해서 ‘조선공산당 선언’에 내재한 전략론을 실천에 옮겼기에 나온 현상이었다. 6·10만세운동은 사상사적 흐름에서 보자면 ‘조선공산당 선언’의 체현자였다. 그 선언의 정신을 실행에 옮긴 것이 곧 6·10만세운동이었던 것이다.

<불꽃>은 상하이 삼일인쇄소에서 발행

이 역사적 문헌을 누가 만들었을까? ‘조선공산당 선언’은 <불꽃>이라는 제호를 가진 국한문 혼용의 활판 정기간행물에 실려 있다. 1926년 9월1일 발행한 제7호에 1면부터 4면까지 4쪽에 걸쳐 수록됐다. 이 선언의 발표자 명의는 문서 말미에 명시돼 있다. “1926년 7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라고. 누가 작성했는지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의문점이 있다. 1926년 7월에 채택했다는 말을 선뜻 믿기 어렵다. 조선공산당은 1926년 6·10만세운동이 발단이 되어 대규모 검거 사건에 휘말려들었다. 일대 위기에 처했던 시기다. 비밀결사의 존재를 감지한 일본 경찰은 수차례에 걸쳐 파상 공격을 퍼부었다. 6월6일 첫 번째 대검거가 시작된 이후, 6월21일 두 번째 일제 검거가 이뤄졌다. 7월17일에는 강달영 책임비서가 피체된 것을 필두로 궤멸적 대검거가 집행됐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8월19일에 네 번째 일제 검거가 벌어졌다. 중앙집행위원이 다수 체포됐고, 다행히 체포를 모면한 간부도 운신이 극히 곤란하던 때였다. 이런 시점에 검거를 피한 중앙집행위원들이 삼엄한 서울 한복판에 비밀리에 모여서 ‘선언’을 채택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의문 때문에 우리는 중국 상하이에 망명해 있던 옛 중앙집행위원들이 이 문서를 발표한 것으로 추론한다. 이 추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불꽃>의 발행지가 상하이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불꽃>은 활판 인쇄물이었으므로 국한문 활자를 구비한 곳이라야 발간할 수 있었다. 망명 중앙집행위원 김찬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불꽃>을 인쇄한 곳은 <독립신문>을 간행하던 곳과 동일하다고 한다.2 바로 삼일인쇄소였다.3

또 다른 근거가 있다. 재 상해 국제당 원동부 문서에는, 조선인 동무들이 ‘조선공산당 선언’을 준비해왔으며 7월20일 전후에 선언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적혀 있다.4 여기서 말하는 조선인 동무들이란 탄압을 피해 상해로 망명한 간부들을 가리킨다. 김찬·조봉암·조동호·김단야·남만춘 5명이 1926년 초에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의 집행위원에 취임했다.5 그들은 국내 중앙과 긴밀히 연락하며, 국제당과의 관계에서 조선공산당을 대표하는 큰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제 ‘조선공산당 선언’을 누가 집필했는지 답을 구해보자.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 집행위원 다섯 사람 가운데 하나가 초고를 집필했음은 분명한 것 같다. 물론 최종 채택에 이르기까지 다른 위원들은 물론이고, 원동부의 외국인 임원들도 첨삭 논의에 참여했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조선공산당 선언’의 집필자로 추정되는 조동호(1894~1954). 임경석 제공

‘조선공산당 선언’의 집필자로 추정되는 조동호(1894~1954). 임경석 제공


분명히 입증할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좀더 나아갈 수는 없을까? 다섯 사람 중 김찬을 제외해도 좋을 것 같다. 그는 인간관계에 능숙하고 좌담과 웅변에 능하지만, 문필력이 뛰어났다는 정보는 접하지 못했다. 조봉암은 ‘조선공산당 선언’이 만들어지던 시기에 만주로 파견됐고, 남만춘은 러시아어를 능숙히 다룰 수 있지만 조선어 문장력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다른 두 사람은 언론인 출신으로서 늘상 글을 써왔다. 이 중에서 김단야는 그해 7월10일쯤에 모스크바 레닌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상하이를 떠났음을 고려해보자.

가장 유력한 집필자 후보는 조동호

결국 한 사람이 남는다. ‘조선공산당 선언’을 집필한 사람은 조동호였던 것 같다. 그는 중국어 신문 <민국일보> <구국일보> 기자를 지냈고, 상하이 한국공산당 기관지 <올타> 편집자, <동아일보> 기자 겸 논설위원을 역임한 언론인이었다. 그뿐인가. 그는 동호(同好)라는 필명으로 ‘조선공산당 선언에 대하여’라는 해설 기사를 <불꽃> 제7호에 기고했다. 이 모든 사실이 ‘조선공산당 선언’ 집필자가 조동호일 가능성이 짙음을 넌지시 가리킨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

 

 

참고문헌

1.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회, ‘조선공산당 선언’(1926년 7월), <불꽃> 제7호, 1926년 9월1일, 3면.

2. Ким Чан(김찬), В Восточный отдел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го интернационала(국제당 동방부 앞), 1926년 2월(추정), p.5,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24 лл.94-102.

3. ‘印刷業廣告’ <독립신문> 1921년 4월21일. 중국어로는 삼일인서관(三一印書館)이라고 표기했다.

4. Отчет о работе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бюро за время 18 июня по 18 июля 1926 г.(1926년 6.18-7.18 기간 원동부의 사업 보고) p.2,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268 лл.2-11

5. О Компартии Кореи /записка/ т.Павлова (Намманчун) (남만춘 동무의 조선공산당에 관한 보고서), p.6,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27 лл.141-146.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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