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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몽테뉴와 가을 산책을

등록 2004-10-22 00:00 수정 2020-05-03 04:23

16세기 르네상스인에 대한 찬찬한 해설

▣ 김수현 기자 groove@hani.co.kr

가을 산책은 책에도 있다. 숨가쁘지 않되, 호흡을 멈추진 않고, 나무를 쳐다보고 하늘을 올려보다가 마음이 전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글자를 따라 이런 산책을 하고 싶다면 (박홍규 지음·청어람 미디어 펴냄)는 어떨까.

여기엔 두명의 글쓴이가 있다. ‘수상록’이라는 말로 더 알려진 ‘에세’를 집필한 몽테뉴와 ‘에세’를 해설하는 박홍규 교수다. 프랑스 시골에서 20년간 ‘나라는 주체의 판단’을 펼쳐 보인 16세기 사상가가 있고, ‘에세’를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그 책의 불완전함마저 늘어놓는 21세기 한국 지식인이 있다. 박 교수는 평소 인문학 전반에 대한 글을 써온 법학자다.

그래서, 덕분에 우린 두 사람과 산책을 하게 된다. 때론 ‘에세’의 발췌문을 통해 몽테뉴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때론 박 교수에게서 몽테뉴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얘기를 듣는다. 종교전쟁 시대나 서양철학의 흐름에 대한 해설도 얻어본다. 그러다가 그가 다른 역사적 사례나 한국의 현재적 사실을 곁들여 몽테뉴의 사상을 풀어갈 때면 우리의 초점은 ‘현재’로 건너온다. 책의 일관성을 해치는 초점의 이동이 어지럽다 하지 말고, 순발력을 가지고 징검다리를 건너다 보면 ‘수상록’이란 말이 주는 고전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은 사라진다.

몽테뉴는 16세기 프랑스의 모럴리스트였다. 모럴리스트를 ‘도덕주의자’로 여긴다면 그건 몽테뉴를 오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법관·시장을 역임한 그는 학자가 아니라 다만 철학적 작가였다. 반형이상학주의에 기초하여 감정과 정서를 통해 자기 인식에 접근했다. 그는 개성과 주체를 중요시한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그의 화두는 크세주(Que-sais-je?) ‘나는 무엇을 아는가?’로 압축되는 ‘회의주의’였다. 3층짜리 탑의 서재에 애써 고독을 마련한 그는 철저한 개인주의자가 되어 외부 세계를 사고하려 했다. 강변을 서성거릴 뿐이어도, 남들이 많이 떠들어댔을지라도 글쓰기는 여전히 시도해볼 만하다고 할 만큼 생각의 착상과 전개를 자유로이 하면서, 글을 단단한 사고의 결정체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박 교수는 ‘에세’를 읽으며 웃는다고 했다. 고전에 대한 우상숭배를 버리고, 고전이 당대에 가졌던 의미를 끌어와 2004년 동시적 의미로 복원하려고 시도하는 데에 이 책의 매력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도 무조건 감탄을 해야 하는 의무감에서 벗어난다. 몽테뉴가 보수주의자인지 진보주의자인지 답도 없다. 다만 전쟁과 정치, 법과 재판, 습관, 사생활 등으로 엮어진 그의 숲을 거닐어볼 뿐이다. “법률을 잘디잘게 잘라서 그 수를 많이 만들어 법관들의 자유 재량을 제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의 의견은 내 비위에 맞지 않는다. 그는 법률을 만들어내는 것만큼 법률을 해석하는 데에도 자유와 폭이 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라는 구절에서 ‘상대주의’를 맛봤고 산책은 더 풍요로워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박 교수가 지적한 대로 오래전 번역된 한국어 발췌문들이 쉽게 읽히지 않아 아쉽다. 박 교수가 몽테뉴를 소개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몽테뉴식의 솔직하고 자유로운 글쓰기 방식을 옹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각자의 ‘에세’를 가질 수 있을까. 가을이 가기 전, 각자의 에세 제1장을 시작한다면 우리도 가끔 철저한 개인주의자가 되어 열린 세상에 맞닿은 자아를 표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몽테뉴가 정의한 ‘변화무쌍하고 불규칙하며 다양한 운동을 하는 우리의 생’ 가운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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