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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이것이 ‘낀 세대’의 언어다

등록 2004-07-22 00:00 수정 2020-05-03 04:23

로 한겨레문학상 받은 25살의 작가 권리씨, 자신의 세대를 말하다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소설. 작가든 평론가든 소설에 밥숟가락이라도 걸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한번 머리를 맞대고 이 장르의 ‘부실 영업’을 고민해야 한다. 현재 주요 서점의 소설 순위에 한국 소설은 간신히 숨만 남아 헐떡이고 있다. 수필 코너에서 1~20위 중 10개 정도가 한국 필자의 글이라면, 소설 코너에선 2~3개 정도다. 이보다 훨씬 심각하고 걱정스러운 것은 한국 소설 코너의 모양새다. 판매량 20위까지 중진들의 대작으로 채워져 있는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신진 작가는 바늘보다 찾기 어렵다. 한국 소설은 ‘불임증’인가.

세대. 그 언젠가 ‘한국 소설의 위기’를 이야기한다면, 소설 소비의 주체로 떠오르고 있는 한 세대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 90년대 중반부터 일본 소설들이 슬금슬금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마루야마 겐지,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가네시로 가즈키, 와타야 리사…. 이 이름들은 “우연히 어디서 만나 섹스를 했는데 아직도 많은 (한국) 소설가들이 그 잤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131호) 동안, ‘쿨’한 젊은 세대의 허기를 대신 채워줬다. “한국 소설은 우울하다. 남성 작가는 무겁고 여성 작가는 공주병에 자의식 과잉이다.” 한 20대 여성 독자가 일본 소설을 읽는 이유다.

선민들만 들어가는 순수문학?

로 제9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79년생 작가 권리씨는 일본 소설을 포식해온 이 ‘문제적 세대’를 드러낸다. “신문에 한 얘기 되풀이할 거면 인터뷰하기 싫다”고 잘라 말하는 당돌한 신인작가(이제 막 책이 출판됐는데!)에게 “당신 세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미끼를 던졌다. 그 미끼를 덥석 문 것을 보면 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눈치였다.

의 대학생 화자가 ‘고등수용소’(고등학교)로 상징되는 획일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죽음을 결심한 뒤 교환학생으로 간 곳은 당연히, 일본이었다. 소설의 줄거리는 몇줄로 요약이 가능할 정도로 의미 없다. 일본 대학에서 ‘퀴즈연구회’라는 이상한 동아리에 가입한 화자는 한국과 일본의 현실을 교차해 떠올리며 점점 역겨움과 죽음에의 욕망에 시달리게 된다. 소설은 강렬한 사회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나, 그 형식은 저항이 아니라 환멸이다. “일본이 한국의 미래냐고요? 그보다는 디스토피아죠.” 일본에서 화자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원류라고 볼 수 있는 일본 쇼비니스트 교수와 갈등한다. 일본 젊은 세대는 화자보다 더, 깃털처럼 가볍고, 오직 ‘정답’에만 길들어 있다. ‘사이코’가 될 수밖에 없는 화자가 선택한 것은 생의 강렬한 에로티시즘, 곧 죽음이었다.

소설은 몇 가지 결함을 끌어안고 있다. 시스템에 대한 젊은이의 환멸과 방황이라는 테마는 첫 소설인 만큼 진부하다(“진부하다고요? 저와 가장 맞닿은 문제를 쓰지 않으면 절박하지 않아 못 쓸 것 같았어요.”). 게다가 ‘죽음의 클리셰’가 도처에 어슬렁거리면서 소설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또 지나친 인용과 현학의 과시(“하지만 그건 김영하씨 말대로 20대 작가의 특권일 수도 있어요.”)가 눈에 거슬린다. 그럼에도 는 소설 생산의 주체로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한 세대의 감수성과 언어를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그에게 툭툭 던지는 듯한 냉소적인 문체가 혹시 일본 소설의 영향이 아니냐고 질문하자 랩을 흥얼거리며 만들었다고 대답했다.

권리씨의 문학적 자양분은 물론 일본 소설, 그 중에서도 요시모토 바나나의 가벼움보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련됨이다. 그는 “동어반복… 자기복제… 젊은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쓰지 않는 한국 소설가들”을 말한다. ‘노동문학’이 침몰한 바로 그 자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돛을 높이 올린 이후에도 파괴력을 갖춘 한국 작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문단 시스템 어딘가가 고장났다는 뜻이다. 권리씨의 진단은 단순명쾌하고 서늘했다. ‘주례사 비평’으로 문단이 카르텔을 형성하면서 비슷한 문학을 자꾸 복제하는 것이 문제다.

변화되기 전의 상태, 퓨전

이것은 등단의 문제와 연결된다. 폐쇄적인 권력구조 때문에 삼십대 이후만이 작가 호칭을 달 수 있을 정도로 ‘바늘구멍’이라는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 글 안 쓰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순수문학이라는 곳이 바늘구멍 같아서 선민들만 들어가는 것처럼 막아놓으니까 안 되죠.” 그렇다면 일본 소설은? 84년생 작가 와타야 리사가 19살에 쓴 은 38회 아쿠타가와상을 탔다. “아쿠타가와상을 탈 정도의 함량은 아닌데도” 일본에서 ‘천재’ 수식어를 붙여가며 난리법석을 피운 것은, 젊은 세대를 문학에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물론 일본 소설이 문학의 대안이라고 한다면 ‘일본식’ 망언이 되겠지만, 언제 우리가 그 ‘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봤는가.

권리씨는 2000년대의 코드를 ‘퓨전’이라 규정한다. 퓨전은 새로운 것으로 변화되기 전의 아무것도 없는 것, 돌아가거나 앞으로 나가기 위한 코드다. 따라서 그의 세대는 전공투 세대와 너무 멀리 떨어진 일본의 20대처럼 ‘방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386세대의 이상에 동의할 수도 없는 ‘낀 세대’다. 참여도 방관도 하지 않는 세대. “80년대를 겪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얼마나 많은 진보가 있었나 회의가 들어요.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사회 참여는 당위죠. 하지만 고지식한 불나방은 싫어요. 지금 세대는 쿨하고, 너무 진지한 것은 놀림감이 되기 쉽죠. 부시를 보세요. 너무 진지해서 우습잖아요.” 그에게 저항이란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어떤 큰 중심을 해체하기 위해서 주변의 작은 것들이 점점 모이는 것처럼. 게다가 그의 세대는 대부분 해외여행을 경험하고 국제결혼을 당연시할 정도로 개방적이고, ‘단일민족’의 신화와 멀리 떨어져 있다. 여기에 권리씨의 소설을 읽는 독법이 들어 있다.

화가를 꿈꿨으나 미술학원에서 손등을 그리라고 했는데 손바닥을 그렸다는 이유로 야단을 맞고 때려치운 소녀.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고도 “내 소설이 붕어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문창과 대신 사회학과를 지망한 소녀. 문학회에 가입할까 하다가 담배 연기 자욱한 동아리방에서 ‘후까시’만 잡는 선배들이 싫어 그만뒀다는 대학생. 소설 속 주인공처럼 선천적으로 냄새를 못맡는 게 컴플렉스지만, 언젠간 냄새를 주제로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하는 작가. 25살에 화려하게 등단했지만 제발 자신을 20대 작가들의 중심에 놓지 말라고, 언제나 변방에 남고 싶다고 말하는 작가. 우리는 그의 성장 과정을 천천히, 매우 조심스럽게, 그러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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