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이 성식을 만난 건 그녀가 20대 후반에 이를 무렵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성식이 꾸리는 팀에서 계약직 업무를 시작했다. 결혼을 약속한 애인은 3개월 뒤 귀국할 예정이었다. 수정은 열심히 일했고 그녀의 성실함을 성식은 눈여겨보는 듯했다.
회식이 끝나고 시작된 악몽회식이 있던 저녁, 팀원들이 수정의 생일을 깜짝 파티로 축하해줬다. 성식의 작업실이 있는 건물 옥상에서였다. 성식은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술에 취한 채 비싼 싱글몰트 위스키 한 병을 들고 찾아왔다. 파티는 더욱 흥이 올랐고 수정은 간만에 흠뻑 취했다. 더 이상 마셨다간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 것 같아 몰래 자리를 빠져나왔다. 걷는 것조차 힘들어 잠시 계단에 걸터앉아 숨을 다스리는데 수정의 등을 덮는 커다란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성식의 검은 눈동자가 춤을 추듯 흔들렸다. 이후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성식의 커다란 몸이 다짜고짜 수정을 찍어 눌렀다. 거친 혀가 입술 틈을 파고들었다. 수정은 입을 다물고 저항했지만 성식의 완력을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계단에 머리가 부딪치고 살갗이 찢어졌다.
성식은 수정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작업실로 데려갔다. 술에 취한 몸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비명조차 지워졌다.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수정이 밤낮없이 일했던 건 성식에게 자신의 능력을 돋보이고 싶어서였지 이런 식으로 존재를 각인받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오해할 행동을 은연중에 내보인 건 아닐까, 이 장면을 팀원 중 누가 본다면 뭐라고 할까. 누구도 성식이 수정에게 관심을 보이리라 상상조차 못했을 게다. 수정은 일반적으로 매력적인 여성으로 분류되는 유형이 아니었다. 부스스한 머리에 큰 안경을 썼고 비쩍 마른 몸은 종종 놀림을 받았다.
사태는 순식간에 끝났고 성식은 돌연 다정한 눈빛으로 수정을 보듬었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해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못 견디게 사랑스럽다는 듯 뺨과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혼돈은 더 걷잡을 수 없어졌다. 수정은 상황을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싶었다. 집에 들어가봐야 한다고 말하고선 허겁지겁 방을 나섰다. 좁은 자취방에 들어서는데 창 너머로 동이 트기 시작했다. 울긋불긋 물드는 하늘처럼 수정의 몸 곳곳에 멍과 상처가 존재를 드러냈다.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공포가 들이닥치고 수치심이 차올랐다. 인정받기 위해 열일하던 수정을 두고 독이 올랐다고 비아냥거리던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젯밤 술자리에서 유독 크게 웃고 떠들었던 모습도 소급해 오해를 살까 두려워졌다. 치마를 입는 게 아니었다. 술을 많이 마시는 게 아니었다. 모든 게 자신의 불찰이라고 느껴질수록 상황을 수습할 길이 아득해졌다. 앞으로 남은 계약 기간 동안 아무 일 없었던 양 굴어야 할까? 성식의 얼굴을 다시 마주칠 일을 생각하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사정을 마치고 한참 동안 수정을 부둥켜안았다. 어떻게 이토록 예쁜 사람이 있을까 처음부터 생각했다고 귓가에 속삭이기도 했다. 모두 없었던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치맛자락을 들어보니 군데군데 멍든 자국이 짙어지는 게 보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팬티를 입는 것도 잊고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모두 벌어진 일이었다. 악몽이 아니었다.
이후 성식은 수정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했고 불쑥불쑥 찾아왔다. 수정은 애인에게 알려질까 두려웠고 성식의 아내와 회사 팀원들이 눈치챌까 몸을 사렸다. 끌려가듯 관계가 이어졌다. 강제성 성관계가 이어졌지만 사태가 진행될수록 수정도 저항을 멈췄다. 성식은 수정의 인간관계를 모조리 검열하기 시작했다. 애인과도 헤어지게 했다. 성식은 그의 사랑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강조하며, 구타와 다정함을 불규칙하게 오갔다. 성식의 돌발적 행동을 짐작해서 방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는 수정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착했다. 자신의 성공이 그녀의 것이 되리라는 약속도 거듭했다. 회사의 일정 지분이 수정의 것이 되리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권력 아래 끌려가듯 이어진 관계수정은 생각했다. 자신에게 남은 길은 성식의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일지 모른다고. 그들의 관계가 이어지는 동안, 수정은 한 차례 임신중절수술을 했다. 불륜의 당사자가 되었다는 수치심을 외면하기 위해 수정은 일에 더욱 집중했다. 성식의 이야기로 어렴풋이 깨달은 건, 성식의 아내 역시 자신과 비슷한 방식으로 결혼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십 대 초반에 성식을 만나 강제적 성관계를 맺었다. 성식은 그녀의 첫 남자였고 첫 연애 상대였다. 성식의 지속적인 바람에도 아내는 이혼을 원치 않았다. 수정과 안정적 관계를 맺으며 성식은 오히려 아내에게도 충실해졌다. 수정은 성식의 아내를 향한 죄책감에 최대한 몸을 사렸다. 몇 년째 치매를 앓는 성식의 노모를 돌보는 그녀에게 동지애 비슷한 연민을 느끼기조차 했다. 기묘한 균형의 평온한 삶이 이어졌다. 지난여름 성식이 돌연 사랑에 빠졌음을 선언하고 재작년 초부터 일하던 신입사원과 동거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성식은 사랑 없이 사는 인생의 허무함을 토로하며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아내는 지난 희생의 억울함을 토로하며 이혼을 거부했다. 수정은 그들 부부의 싸움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다. 어디에도 자신의 황망함을 호소할 곳이 없었다. 마지못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표하고 성식에게 약속한 지분을 요구했지만 돌아오는 건 지급할 여유가 없다는 대답이었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어요. 차라리 그 관계가 사랑이라면 덜 수치스러울 것 같았어요. 결국은 10년 동안 그의 노예처럼 살았지만요. 그는 제가 이십 대를 바쳐서 공부하고 일하고 인정받고 싶었던 분야의 권위자 중 한 사람이었어요. 그와의 관계를 폭로한다는 건, 제가 다시는 일할 수 없다는 걸 의미했어요. 제가 살아남을 희망은 조용히 그와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길밖에 없다고 믿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협력이 아니라 착취의 관계였지만, 그 안에 있을 때는 달리 생각하지 못했어요. 작년부터 지속적인 상담치료를 받고서야 제가 어떤 식으로 자기를 기만하며 살았는지 깨달았고요.”
상처와 모멸로 얼룩진 10년수정은 강제적 상황으로라도 성식과의 관계가 종료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 10년이 상처와 모멸만으로 얼룩진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은 수정을 더욱 혼돈에 빠뜨리기도 했다. 때로는 즐거웠고, 헌신과 사랑을 느낀 순간도 있었다. 수정은 그를 두려워했고 숭배했고 사랑했고 증오했다. 함께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성식에게서 헤어날 길은 아득해졌고 벗어날 의지조차 희미해졌다. 미투 운동 소식이 뉴스를 채우는 지금, 마음은 지옥을 떠돌지만 수정은 한마디도 보탤 자신이 없다. 자신을 두고 겨눠질 의심, 불륜의 당사자였다는 비난, 수정의 저의를 둘러싸고 벌어질 논의가 지난 상처보다 더 고통스러우리란 걸 상상할 수 있어서다. 나서서 증언하고 피해 사실을 밝힐 수 있는 그녀들의 용기에 감사하고 지지하지만, 수정은 응원의 마음조차 드러내기 두렵다. 힘겹게 고백을 마친 수정에게 나는 말했다. 당신은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고. 당장 나서서 피해 사실을 고발하지 않아도, 엄연히 살아남은 떳떳한 생존자라고. 살아남아 고맙다고, 그리고 지금 여기 선언하지 않아도 언제든 당신을 이해하고 곁에 있어줄 다른 생존자들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폭력의 관계에서 빠져나오고 일하고 표현하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다른 생존자들의 희망이자 동지가 된 것임을 강조했다. 고통의 연대에서 생존의 연대로, 그리고 서로를 구원하고 세상을 뒤바꿀 수 있는 연대는 당신이 살아남고 이렇게 작은 소통을 시작한 것에서 일어난다고 덧붙였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집중하는 감각은 자신의 몸과 권리와 그 경계를 예민하게 느끼고 파악하는 능력이다. 그와 같은 몸은 스스로 알고 보호하고 주장하는 법에 익숙해질 때 만들어진다. 처음부터 단단하게 대응하고 방어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몸의 감각에 집중하고 불쾌함을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불쾌함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배려와 착함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불편을 억압하는 것은 선의가 아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향한 악의가 된다. 불편함을 느낄 때면 당장 그 불편함에 집중하고 원인 파악에 애써야 한다. 그리고 표현해야 한다. 당장 그때를 놓치더라도 감각을 복기해서 표현해야 한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 가해의 상대에게 말할 수 없다면 주변인들에게라도 이야기해야 한다. 말하고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더 명확히 깨닫고 정리할 수 있다. 당장의 두려움 때문에 침묵할 때 더 크고 고단한 침묵을 이어서 감당하게 된다. 성추행이나 성폭행은 내 몸만의 일이 아니라, 나의 몸과 상대의 몸이 개입된 일이므로 나 혼자서 숨기고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몸이 개입된 부당한 힘의 관계는, 몸만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불균형과 그것을 지탱하는 구조의 문제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랑과 친밀함을 내세워서 경계를 침범하고 폭력을 저지른다. 부모의 사랑부터 동료 간의 관계까지, 경계를 알지 못한 몸들은 일방적인 넘나듦을 사랑으로, 아낌으로, 우정 혹은 그저 재미로서 정당화한다. 부당함을 제기하는 것은 집단의 분위기를 해하는 것이 되고, 불편함을 표현하는 것은 지나친 예민함으로 너무 쉽게 치부된다. 몸이 표현을 잃고 불편함에 적응될 때 침묵은 자발적 선택이 되고 부당함의 구조는 고착된다.
고발을 지나 선언의 주체로불편함이 지속될 때 뒤늦은 건 없다. 불편함이 있고 그걸 납득할 수 없다면 늦은 것이 아니다. 단 한 명에게라도 진행형인 문제라면 그건 늦은 것이 아니므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미투 운동이 사태가 벌어진 이후 “뒤늦게라도”(늦지 않았다고 믿는다) 확산되어 희망적인 것은, 더 이상 우리 몸이 일방적으로 침범되고 침묵되는 몸이 아님을 말하기 때문이다. 나서서 대응하고 표현하고 경계를 되찾고 세우는 주체로 일어서는 바로 그 시작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고발을 지나 선언의 주체로 나서는 일이다. 생존과 더불어, 혼자가 아니라 함께 있음을 신호탄처럼 알리는 운동이다. 말 못하는 피해자들이 생존자로 일어설 수 있도록 올리는 기원의 외침이다. 예술과 대의와 권력과 사랑과 연애 감정의 명분 아래 짓밟히고 외면될 수 없는, 저항하는 몸이 있음을 알리는 일이다. 나아가 지금까지 예술과 대의와 권력과 사랑과 연애의 구조를 다시 묻고 되살리려는 재생의 움직임이다. 사랑의 강렬함을 경계의 침범과 난입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은 그 속의 개인들이 기존 경계를 무너뜨리고 새로 세우는 혁명적 행위이지만, 그것은 일방적 탄압이나 강요가 아니라 함께 이루는 공동의 혁명이다. 성폭행과 사랑은 양립할 수 없다. 그것은 사랑에서도, 연애 감정에서도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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