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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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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에 핵과 평창 김정은의 ‘히든카드’

김정은 신년사에 담긴 북한의 속내… 평창 내세워 핵과 남북관계 분리한 ‘투 트랙’ 전략

성공적 올림픽 개최 위한 남북관계 진전이 한미관계나 국내 상황에 영향 주면 안 돼
등록 2018-01-09 15:02 수정 2020-05-03 04:28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1월1일 오전 신년사를 낭독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이 연설에서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드러냈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1월1일 오전 신년사를 낭독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이 연설에서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드러냈다. 연합뉴스

북한은 해마다 1월1일 신년사를 발표한다. 김일성이 1945년 12월31일 자정 ‘신년을 맞으면서 전국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한 것이 처음이다. 이후 김일성은 살아 있는 동안 매년 1월1일 직접 육성으로 ‘신년사’를 발표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은 육성이 아닌 당보 , 군보 , 청년보 등 3개 신문에 ‘공동사설’을 발표하는 것으로 ‘신년사’를 대신했다.

김정은 시기에 들어와서는 2013년부터 다시 ‘신년사’를 육성 연설로 발표하고 있다. 올해도 등을 통해 김정은 위원장의 육성 연설을 녹화방송 했다. 김정은은 은색 양복에 뿔테 안경을 쓰고 김일성을 연상시키면서도 여유롭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연출했다. “우리 어린이들의 새해의 소원과 우리 인민 모두가 지향하는 아름다운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며 연설을 시작한 것도 새롭다.

북한의 신년사는 대체로 지난해 평가를 하고 나서, 새해의 목표와 분야별 과업을 제시하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올해 역시 구성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예상대로 2017년에 성취한 가장 큰 성과로 ‘핵 무력 완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어 2018년에 수행할 여러 과업 중에는 ‘경제’와 ‘남북관계’ 분야가 눈에 띈다. 이는 서로 상당히 논리적인 전개이다.

미국 협박보단 ‘인민 안심’ 의도

“미국은 결코 전쟁을 걸어오지 못합니다. 미국 본토 전역이 핵타격 사정권 안에 있으며 핵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 있다는….”

신년사에 담긴 김정은 위원장의 이 한마디를 두고 많은 전문가가 미국 위협으로 해석한다. 미국 편에서 보면 자존심을 건들 만한 발언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개인 트위터에 남긴 “나에겐 더 크고 강한 핵단추가 있다”는 발언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미국을 향한 메시지로만 보는 것은 북한 신년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앞서 김정은 위원장은 “1년 전 이 자리에서 대륙간 탄도로케트 시험발사 준비사업이 마감 단계라고 공표하였고, 이를 증명하였다”고 밝혔다. 지난해 11월 화성 15형 발사 이후 핵무력 완성 발표가 2017년 신년사에서 인민들과 한 약속을 지킨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 “인민이 허리띠를 조이며 바라던 평화수호의 강력한 보검을 틀어쥐었다”며 “제재와 봉쇄의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병진로선을 굳게 믿고 지지해준 인민에게 경의”를 표했다. 미국이 공격하지 못할 거란 것과 핵단추 이야기는 미국을 협박한다기보다 인민들을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우선이다. 한마디로 전쟁 걱정 말고 경제발전과 인민 생활 향상에 매진하라는 대내적 메시지인 것이다.

일부에선 북한이 핵무력 완성을 선포한 만큼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대화를 제의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비웃듯 오히려 앞으로 “핵탄두들과 탄도로케트들을 대량생산하여 실전 배치에 박차를 가해나가겠다”고 밝혔다. 핵포기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 평창겨울올림픽 참가와 대화 제의가 결코 제재나 압박에 굴복해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핵단추를 통해 북한 자신들은 결코 쫄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꽃놀이패’ 즐기는 김정은
2006년 이탈리아 토리노겨울올림픽 개막식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한반도기를 앞세워 함께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6년 이탈리아 토리노겨울올림픽 개막식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한반도기를 앞세워 함께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이 올림픽을 내세워 핵과 남북관계를 분리한 정교한 투 트랙 전략을 들고 나타났다. 평창올림픽에 대해 “민족의 위상을 과시하는 좋은 계기로 성과적으로 개최”되기를 바라고 “한 핏줄을 나눈 겨레로서 동족의 경사를 같이 기뻐하고 서로 도와주는 것은 응당한 일”이라며 대표단 파견과 만남을 제의했다. 남쪽을 통해 대미 관계와 대외 문제를 돌파해보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남쪽이라기보다 평창올림픽을 통해서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핵과 남북관계 분리 접근을 단순히 남쪽을 통해 대미 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해보려는 정도로 해석하는 것은 북한이란 상대를 너무 쉽게 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북한이 올림픽 참가를 명분으로 도발을 자제하고 대화의 조건을 충족한 뒤 하반기 북-미 대화를 모색할 것이란 예측은 우리의 희망사항이다. 북한의 신년사 발표 후 현재까지 드러난 미국의 입장만 보더라도 김정은은 2018년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행정부에 큰 기대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내가 김정은이라면 이리해서 트럼프가 대화로 나와주면 좋은 것이고, 안 나오더라도 크게 별 탈 없는 꽃놀이패로 여겼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미국과 문제를 풀어야 하겠지만 단기적으로 보면 남북관계 개선만으로도 시급한 안보 우려를 해소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제재 국면은 어차피 지속될 것이지만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미국의 선제타격 같은 군사적 옵션만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의도를 남쪽을 통해 미국에 접근하겠다는 ‘통미통남’으로 단순화해서 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어쩌면 우리 정부가 미국 눈치 안 보고 핵문제와 남북관계를 분리 병행할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북한 스스로도 미사일 추가 발사든 내부 문제든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북한도 뭔가 간절하다는 것이다. 그 간절함이 무엇인지는 ‘북핵 안경’을 벗어야만 보인다.

북한의 행동은 이미 예측 가능했다. 무엇보다 이를 한-미 간 이간과 동맹 균열, 남남 갈등을 위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북한이 조금도 그럴 의도 없이 순수하게 평창올림픽 성공을 위해 올림픽 참가를 결정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북한이 그런 속내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고 이는 상수이다. 일본의 우경화가 상수이듯, 상수를 바꾸려는 전략은 무모하다. 북한의 속내 역시 우리가 어찌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냥 상수로 놓고 전략을 짜야 한다.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유리하게 변화시키고 이끌어나가는 것이 바로 전략이기 때문이다.

평창 이후가 더 걱정되는 이유

북한의 신년사 발표 후 우리 정부가 곧바로 고위급 회담을 제의했다. 북한은 끊어졌던 연락 채널을 681일 만에 연결하며 화답했다. 과거 같았으면 답신 시간을 끌거나 개최 날짜를 변경하든 한번쯤 튕기며 기싸움이나 신경전을 했을 텐데, 이번에는 1월9일 고위급 회담을 개최하자는 우리 제안을 그대로 수용했다. 지금껏 남북 모두 한 발자국씩 신중하게 잘해나가고 있다.

그래도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고 있다. 북한이 2018년이 평창올림픽과 함께 북한 공화국 수립 70주년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걸린다. 북한이 이야기하는 행사가 단순히 평창올림픽 기간만 뜻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올림픽과 비교할 수 는 없지만 9월9일 북한의 공화국 수립 70주년까지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요구할 수도 있다.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 불안정이 지속되는 속에서는 예정된 행사가 성공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적 환경을 마련하기 위하여 공동 노력해야 한다”고 언급한 점에서도 군사회담의 필요성을 간접적으로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평창 이후가 더 걱정스러운 이유다.

남쪽이건 북쪽이건 겉으로는 올림픽을 내세우지만 양쪽 모두 바라는 바는 그 이상이다. 그렇다고 어느 쪽도 먼저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다. 잘못되면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할지도 모르고, 자칫 올림픽 훼방꾼이 될 수도 있다. 양쪽 모두 회담의 격과 형식, 의제 선정에 신중한 것도 그 때문으로 보인다.

서로 부르지 못하고 대답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이 얼마나 답답했을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앞으로 남북 간에 풀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올림픽이라는 바구니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은 올림픽만 생각할 때이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도 남북관계가 지속되고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으로 이어질 동력을 살려두는 정도면 충분하다. 나중에야 비핵화든 평화체제든 연결고리가 되어야겠지만 그것은 긴 숨으로 가야 할 길이다.

평창에 내리는 ‘평화의 눈’

이번이 우리에게 기회일 수도 위기일 수도 있다. 이번 정부에는 큰 시험대가 될 것이다. 북한이 투 트랙으로 나왔으니 우린 더 정교한 스리 트랙, 아니 포 트랙 전략을 만들어야 한다. 핵과 남북관계만이 아니라 한미관계와 대내외 정치적 문제와도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한다.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위해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이 한미관계나 국내 상황에 영향을 줘서도 안 되고, 거꾸로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 이 점을 북한에, 미국에 그리고 우리 국민에게 분명하게 전달해야 한다. 정교함만큼이나 결단력이 필요한 시기라는 점에서 모두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까지 맞대어야 한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나란히 있다. 그 옆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있다. 세계 각국에서 온 대표단들 속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딸 이방카도 보인다. 2월 평창엔 그렇게 평화의 눈이 내린다. .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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