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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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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스펙은 ‘남자’

나보다 학점도 낮고 어학 성적도 낮은 남자친구는 최종 합격, 합격자 명단에서 여자 이름은 ‘월리를 찾아라’ 수준
등록 2013-11-21 14:05 수정 2020-05-03 04:27
<font size="4"><font color="#008ABD">이력서에 ‘불임’이라 쓸까</font></font>

<font color="#008ABD">이은미</font> “신문 읽어봐. 내 이름 나왔다.” 이른 아침 남자친구 주현이가 전화했다. “무슨 일이야.” “일단 봐.” 대충 겉옷을 걸쳤다. 편의점에서 신문을 하나 집었다. 훑어보니 한 지면에 이름이 가득하다. ‘최종 합격을 축하합니다.’ 얼마 전 주현이는 내가 골라준 남색 정장을 입고 대기업 신입사원 공개채용 면접을 보러 갔다. 개미만 한 글씨들을 쭉 읽어내려갔다. ‘신주현’. 그의 이름이 있다. 가만히 보니 온통 남자 이름이다. 간혹 여자 이름도 눈에 띄지만 월리를 찾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이런 곳에 지원하는 거야.’ 화가 치밀었다. 남자친구의 합격을 축하할 마음이 없어졌다.

나랑 동갑인 주현이는 다른 대기업에도 합격한 상태다. 토익 점수는 나랑 비슷하지만 다른 어학 성적은 내가 월등히 낫다. 학점도 내가 더 높다. 자기소개서는 내가 첨삭해줄 정도로 그저 그렇다. 처음 주현이가 대기업 신입사원 채용에 합격했을 때 나도 곧 뒤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합격한 것처럼 기뻐했다. 그의 면접 정장을 함께 고르며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나도 곧 정장 살 거야. 그때 같이 가자.”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정장을 사본 적이 없다. 서류 전형에서만 나는 10번, 20번, 끝없이 떨어졌다. “최고의 스펙은 남자”라는 우스갯소리가 취업 현장에서는 살아 숨쉬는 전설이다.

“이력서에 ‘불임’이라든가 ‘독신주의자’라고 쓰면 붙을지도 몰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가 조언했다. ‘써볼까, 나중에 건강이 좋아졌다거나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그나마 내가 지원하는 인사직무는 여자 비율이 높은 편이란다. 이유는 참 일차원적이다. “다른 부서에는 남자 직원이 훨씬 많죠. 그러니까 여자 교육자가 유리해요. 여자의 목소리 데시벨이 높아서 잘 들리고 아무래도 남자들이 여자한테 더 집중하니까요.” 대기업 인사담당자가 취업컨설팅 특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자라서 덜 활동적이고 의존적이라고 오해할까봐 나는 취미에 ‘래프팅’ ‘등산’을 적는다. 래프팅은 태어나서 한 번 해봤다. 강원도 정선 민둥산에 올라가다 체력이 떨어져서 되돌아오기도 했다. 그렇다고 진짜 내 취미인 영화감상이나 독서라고 쓸 수는 없다. ‘그저 그런 여자예요’라고 읽힐까봐 불안하다. 한 여자친구는 독서를 취미로 적었다가 면접관에게 한소리 들었다. “너무 성의 없지 않습니까.”

대기업에 입사한 주현이가 신입사원 요청서를 우연히 봤다고 한다. ‘성별 남자, 전공 공대.’ 요청서를 작성한 팀장이 설명했다. “여자는 언제 그만둘지 몰라. 조직문화도 못 견디고.” 조직문화는 남자인 주현이가 더 힘들어한다. 오히려 여자인 내가 나은데 아무도 알려 하지 않는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딸 둔 아빠도 “여자는 안 돼”</font></font><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size="3"><font color="#666666">여자라서 덜 활동적이고 의존적이라고 오해할까봐 나는 취미에 ‘래프팅’ ‘등산’을 적는다. 래프팅은 태어나서 한 번 해봤다. 그렇다고 진짜 내 취미인 영화감상이나 독서라고 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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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008ABD">이나연</font> “여자는 뽑으면 안 돼. 집안일을 구실로 빨리 내빼려고만 하고.” 저녁을 먹으며 아빠가 말했다. 여직원 한 명이 속을 긁는가보다. 무뚝뚝한 아빠는 여자와 일하는 걸 어려워한다. 딸인 나와도 다툼이 잦다. 여자를 싸잡아 욕하는 게 거슬린다. 입을 삐죽하려는 찰나, 아빠가 얼른 덧붙인다. “그래도 우리 딸은 좋은 데 취직해야지. 아빠가 힘껏 밀어줄게.”

직장생활 30년, 아빠는 밤 12시 이전에 귀가하는 일이 드물다. 일생을 회사에 바쳐온 전형적인 50대 한국 남자다. 아빠 생각이나, 대기업 임원들 생각이나 비슷비슷하지 않을까.

학교 취업지원팀이 취업 스터디를 짜준다. 문과는 여자 7명, 남자 1~2명이 흔한 비율이다. 늘 ‘여자 초과’다. 여자가 그렇게 취업 준비에 더 적극적이다. 토익 점수는 다들 900점이 훌쩍 넘고 학점은 3점 후반대다. 그래도 서류부터 다 떨어진다. 청일점인 남자만 최종 면접까지 승승장구다. “여자들 진짜 취업 안 되더라.” 남자 선배가 말했다. 여러 스터디를 거치며 몸으로 터득한 ‘진리’란다.

“무조건 경영지원 쓰세요.” 학교 취업 상담에 가면 어김없이 듣는 말이다. 취업 컨설턴트가 몇몇 기업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여긴 여자를 아예 안 뽑아요. 덜 뽑는 것도 아니고 안 뽑아요.” 특히 보험사 영업직군은 남자를 우대한다고 했다. 보험 영업을 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아줌마다. 여자를 뽑아서 지점장을 시키면 아줌마들이 말을 안 듣는단다. “여자들은 남자 말을 잘 따르기 마련이잖아요.” 보험사 신입사원 채용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업관리는 그래서 남자 몫이다.

철강업체에 탐방 갔을 때다. 회사를 소개한 홍보과장이 이렇게 덧붙였다. “기자를 상대하는 홍보 업무에선 여자를 안 뽑아요. 술도 많이 마셔야 하고 접대도 해야 해서요. 어제도 술 마시고 왔어요.” 이럴 거면 여자 신입사원 채용 공고를 왜 내는지 짜증난다. 일주일을 꼬박 기업 분석에, 자기소개서 쓰기에 투자했는데 성별 때문에 안 된다니, 도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DFE5CE"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EBF1D9"><tr><td class="news_text03" style="padding:10px"><font color="#C21A8D">또 하나의 취업시장, 군대</font>
<font size="4"><font color="#C21A8D">안정이냐 숨막히는 위계냐</font></font>
<font color="#008ABD">노민호</font> “너도 말뚝 박을래?” 해군 장교로 임관한 선배가 휴가를 나와서 물었다. 지긋지긋한 군대 기억이 남아 있는데 끔찍했다. 하지만 ‘말뚝을 박는’ 동기나 후배가 많아지는 추세다. 그 선배는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예전에 거침없이 내뱉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의기소침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힘들다는 말을 꺼냈다.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한 해군 장교의 삶은 이게 아닌데. 허구한 날 상급자들한테 깨지고, 애들(병사)은 기어오르고….” 그렇다. 군대에서 간부란 빵과 빵 사이에 끼인 패티 같다.
육군 장교로 임관한 한 후배도 그랬다. 군인이 그의 오랜 꿈이었다. 그는 대학 동아리 행사에 맞춰 휴가를 나왔다.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그가 호기롭게 1·2학년에게 물었다. 치킨, 피자가 호명됐다. 10만원 가까운 돈을 냈다. 군인 월급에 적지 않은 돈이었다. 나는 걱정스레 바라봤다. 학교 근처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후배가 속내를 털어봤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요.” 뭐라고 답해야 하는지 망설여졌다. 그가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적지 않은 대졸자들이 군대라는 또 하나의 취업시장으로 향한다. 물론 안정적이다. 하지만 그 ‘안정’ 속엔 숨통을 죄어오는 위계질서, 조직문화가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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