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무안군 하의면(현 신안군) 후광리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하의공립보통학교 4학년 때 목포로 이주한 뒤 목포공립상업학교(현 목포 전남제일고)에 입학했다. 수줍고 겁 많던 소년이 어떤 파란만장한 운명으로 다가갈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1945년 초가을, 야구장 두 개는 너끈히 들어갈 만한 목포공립상업학교(현 목포 전남제일고) 운동장에서 패싸움이 벌어졌다. 일제 말기, 송정공업학교와 목포상업학교를 합병한 게 화근이었다. 해방 직후에 두 학교는 원상회복됐는데, 유능한 교사를 서로 데려가겠다고 고집하다 다툼이 일었다. 학생들이 나섰다. 송정공업 학생들이 병을 깨어 들고 목포상업 교정에 들이닥쳤다.
패싸움하려던 학생들 연설로 설득·제압바닷가에서 혈기방자하게 자란 학생들은 서로 으르렁댔다. 졸지에 운동장을 내준 목포상업 학생들은 흥분해 학교 무기고를 열었다. 일제는 교복 대신 군복을 입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시절 쓰던 총기가 그대로 있었다. 학생들은 실탄을 장전했다. 아수라장이 됐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소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교정으로 들어왔다.
“나는 이 학교 목포상업의 22회 졸업생이다. 학교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난데없는 연설이었지만 누구도 가로막지 않았다.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돼 나라의 재건을 위해 힘써야 할 젊은이들이 서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무기를 버리고 서로 손을 잡아라.” 연설은 20여 분간 계속됐다. 학생들은 깨진 병을, 그리고 총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무력과 폭력은 평화의 적이다. 조국의 앞날을 위해 서로 협조하고 병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공부와는 담을 쌓고 근육이나 기르며 지내던 목포상업 학생 권노갑은 “그렇게 말 잘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고 훗날 회고했다.
씨근덕대던 학생들도 그의 ‘전설’을 알고 있었다. 목포상업 22회 졸업생 김대중은 1939년 이 학교를 수석 입학했다. 목포 북교 공립심상소학교(현 목포 북교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직후였다. 목포항 반대편에 둥지를 튼 목포상업은 1920년에 개교했다. 5년제였는데, 요즘으로 치면 중·고등학교 과정을 아울렀다. 소년 김대중의 동급생은 모두 164명. 절반은 목포 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 자녀였다. 나머지 절반을 두고 목포는 물론 호남 일대의 조선인 인재들이 경쟁했다.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을 통틀어 그가 수석이었다.
김대중은 3학년 때까지도 1·2등을 다퉜다. 반장도 계속 맡았다. 어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인 역사 교사는 “조센징 김대중보다 일본 역사를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고 일본인 학생들을 야단쳤다. 노래는 못했지만 연설에는 소질이 있었다. 말 잘하고 공부 잘하고 연극반 활동도 하는 하얀 얼굴의 그는 여학생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 시절의 사진을 보면 쌍꺼풀 진 눈에 뒷머리가 납작하다. “집념이 강했지만 수줍음이 많은 친구였다”고 동창 김성남씨는 회고한다. 친구들과 광주까지 무전여행하던 김대중은 주민들에게 부탁하는 일이 싫어 노숙을 고집했다.
후배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는 게 성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목포상업 3학년 때, 청소를 감독하다 일본인 학생과 싸움이 붙었다. “상대를 넘어뜨려놓고도 막상 주먹질은 하지 못했다”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훗날 자서전에 썼다. 그러나 일본인 상급생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버릇없는 조센징 학생 김대중을 불러 몰매를 줬다. 결국 반장을 그만뒀다.
비슷한 시기에 ‘필화’도 겪었다. 맹자의 왕도정치와 당시 상황을 비교하는 일종의 리포트를 냈다. 일제 식민정책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 깃들어 있었다. 맹자는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는 것이 왕도의 시작”이라고 일찍이 설파했다. 당시 조선은 식민지였다. 호남평야는 쌀과 면화의 대량생산지였다. 목포는 쌀과 목화를 일본에 공출해가는 항구였다. 목포상업의 일본인 교장은 백성의 평안을 주장하는 그 리포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대중의 아버지 김운식을 학교로 불러 훈계했다.
학생 때 식민 당국 비판… 요시찰 인물 통보수석 입학생 김대중의 성적은 4학년 때부터 급속히 추락했다. 졸업반이던 5학년 생활기록란을 보면 “독서를 좋아하나 사물을 비판적으로 보니 주의가 필요함”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164명 가운데 39등으로 졸업했다. 목포상업은 졸업생 김대중을 ‘요시찰 인물’로 목포경찰서에 보고했다.
아버지 김운식이 처음 목포로 이사올 때만 해도 그런 수모를 예상하진 못했다. 그는 모든 재산을 처분한 돈으로 항구 근처 영신여관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었다. 여관이 들어선 ‘목포대’(木浦臺)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진을 쳤던 자리다. 1937년, 그는 아들의 교육 때문에 일부러 고향을 떠났다. 목포에서 뱃길로 150리나 떨어진 하의도가 4남2녀 가운데 둘째아들인 김대중을 낳아 기른 곳이다.
길이 6km, 면적 34㎢의 작은 섬에서도 둘째아들은 공부를 잘했다. 목조 단층 건물인 하의공립보통학교(현 하의초등학교)를 다녔는데, 40명의 동급생 가운데 언제나 1등이었다. 4년제였던 이 학교 3학년 시절의 성적표가 남아 있다. 조선어·국어(일본어)·도덕·산수·국사(일본사)·지리 모두 10점 만점을 받았다. 체조가 8점, 미술이 7점이었다. 보통학교 동급생 정홍준씨는 “특히 산수 과목은 따를 자가 없어 일본인 교장에게서 여러 번 칭찬을 들었다”고 회고한다.
하의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서당을 다녔다. 학식이 높기로 인근에 소문난 초암 선생이 차린 덕봉 강당에서 그는 을 뗐다. 훈장은 옛날 과거 치르듯이 시험을 쳤는데, 일곱 살 김대중은 곧잘 ‘장원’을 했다. 외딴 섬 작은 서당에서 장원급제할 때마다 어머니 장수금은 이웃에 음식을 돌렸다. 목포로 이사가자고 남편을 설득한 것도 그였다.
아들 교육에 유난히 관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사리분별이 분명했다. 술 취해 쓰러진 엿장수한테서 섬 아이들이 물건을 슬쩍했다. 철없던 아이 김대중은 아버지한테 드리려고 담뱃대를 골랐다. 어머니는 아들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때리며 무섭게 야단쳤다. 우는 아이의 손목을 끌고 여전히 술 취해 자고 있는 엿장수를 찾아가 호통쳤다. “당신이 얼마나 부자인지 모르지만 왜 어린애가 물건을 훔치게 내버려두는 거요?”
어머니가 냉철했다면 아버지는 낭만적이었다. 아버지 김운식은 하의도에서 중농으로 통했다. 어부들을 상대로 객주업도 겸했다. 판소리 실력이 좋았다. 육자배기나 쑥대머리를 즐겨 불렀다. 1930년 무렵, 섬에서 처음으로 축음기를 집에 들여놓았다. 마을 사람들이 놀러와 축음기 나팔에서 나오는 판소리를 들었다.
낭만은 반항과 통하는 법이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앉혀놓고 조선왕조 계보도를 읽어줬다. 일본 왕을 지칭할 때는 존대하는 법 없이 “히로히토” 이름을 그대로 불렀다. 하의도라는 섬 자체가 고분고분한 곳이 아니다. 조선 16대 임금 인조가 정명 공주에게 하의도에서 나오는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줬다. 공주는 당대 세도가인 홍씨 집안에 시집갔고, 이후 홍씨 집안이 하의도 주민들로부터 세금을 받았다. 그 권리는 이리저리 팔려다니다 일제시대에는 악덕 일본인 지주에게 넘어갔다. 아버지 김운식은 그 부당함을 다투는 법정소송에 적극 나섰다. 1928년에는 하의도 농민조합까지 만들어졌지만, 일제는 농민조합 간부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아이 김대중은 아직 ‘하의도 정신’을 몰랐다. 날이 어두워지면 측간을 가는 일이 두려워 번번이 누나의 도움을 받았다. 누나는 “사내 자식이…” 하며 동생 김대중에게 군밤을 먹였다. 개가 무서워 개를 기르는 집에는 심부름도 다니지 못했다. 친구들과 다투는 일도 없었다.
겁 많고 내성적이던 아들이 훗날 독재와 맹렬하게 싸우게 될 것을 부모는 알지 못했다. 수천 년간 임금과 지주와 일제에 핍박받아온 하의도 농민이 당했던 것처럼 그의 아들이 박정희 군사정권에게 모진 탄압을 받던 시절, 부부는 세상을 떴다. 어머니 장수금은 1972년, 아버지 김운식은 1974년 사망했다.
이들이 생전에 살던 하의도 초가집에는 지난 8월19일 새벽 3시부터 분향소가 마련됐다. 한창 푸르게 자란 벼가 생가 앞에서 바람에 흔들린다. 20일 오후, 분향소에는 까마득한 선배를 추도하는 하의고등학교 학생 20여 명이 찾아왔다. 유영곤 교사는 “교육적으로도 수업의 연장이고, 당연히 와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외지인들이 많이 찾아주지 않아 주민들은 조금 실망했다. 김원인씨는 “폭염에다 육지도 아니고 해서 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육지 사람들의 사정을 살펴 말했다.
그래도 하의도 사람들은 옛 생각이 많이 난다. 면장을 지낸 주민 장명흠씨는 “천지가 거시기하듯이 만세 부르고 춤추었다”며 1997년 대선 때를 회고했다. 6촌 동생인 김영단씨는 “오빠가 어려서부터 참 예쁘고 잘생겼었는디. 아버지를 닮아서 그렇재”라고 말했다. 그를 좋아했던 섬 소녀들은 이제 노인이 됐다. 일흔 살의 정덕진씨는 “인기가 좋았재. 나도 좋아했당께” 하며 살짝 웃었다. 보통학교 시절 싸움을 잘했으나 이제는 중풍으로 쓰러져 누운 박홍수씨는 “공부 잘허는 대중이는 안 때렸재, 이” 하며 잠시 어린 날로 돌아갔다.
수줍고 겁 많던 아이가 독재와 싸울 운명일 줄은…
1924년 1월6일, 그날은 소한(小寒)이었다. ‘대한(大寒)이 소한 집에 놀러갔다가 얼어죽었다’는 옛말처럼, 그해 소한은 유난히 추웠다. 섬에선 추위만큼이나 모진 압제가 번지고 있었다. 그날 전남 무안군 하의면(현 신안군) 후광리 초가집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떤 목표를 정하면 한눈을 팔지 않는 놀라운 인내심을 가졌으며, 최후의 승리를 조용히 준비하는’ 염소자리를 별자리로 갖고 태어난 아기였다. 아기는 분명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파란만장한 자신의 운명으로 다가갈 터였다. 겨울을 이겨내고 푸름을 피워내는 인동초처럼 자라날 터였다.
| |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하의도=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검찰, 윤석열 ‘조사 없이’ 내란죄 수사 일단락…앞당겨진 재판 시계
법원, 윤석열 구속 연장 재신청 ‘불허’…오늘 구속기소 전망
‘내란 나비’ 김흥국, 무면허 운전 벌금 100만원…음주·뺑소니 전력
[영상] 폭동에 맞서 각양각색 깃발 쥔 시민들 “윤석열 퇴진하라”
“윤석열 신속 처벌”…국책연구기관서도 첫 시국선언
경호처, “하늘이 보내주신 대통령” 합창 경찰에 30만원씩 격려금
[단독] 서부지법, 윤석열 구속심사 전 경찰에 ‘보호요청’ 했었다
[속보] 경찰, ‘윤석열 체포 저지’ 김성훈·이광우 구속영장 재신청
인천공항 ‘비상’, 폭설 때보다 혼잡…공항공사 “출국까지 3시간”
구속 연장 재차 불허에…윤 변호인단 “즉시 석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