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약점 없이 출범한 정권인 만큼 공직자들은 긍지를 갖고 법 집행을 엄정히 해달라. 새 정부는 부정과 비리를 없애달라는 역사적 기대를 안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008년 12월29일 법무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도덕주의 정부’를 천명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 전문가’에서 ‘도덕주의자’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촛불 정국을 경험하며 유독 ‘법질서 확립’이란 표현을 자주 쓰던 이 대통령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도덕주의 정부를 표방하고 나선 것은 극적 전환이었다. 이명박 대통령만큼 많은 도덕적 약점을 안고 출발한 대통령도 없었기 때문이다. BBK 사건은 그를 둘러싼 많은 의혹 가운데 단지 하나였을 뿐이다.
‘경제 살리기’ 안 통하자 ‘도덕’ 꺼내
2007년 대선 직전 위장전입, 자녀 위장취업과 이를 통한 탈세 등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문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먼저 자녀를 사립 초등학교에 보내기 위해 불법으로 주소지를 옮긴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이명박 후보는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뒤이어 큰딸 주연씨와 아들 시형씨의 ‘위장취업’을 통한 탈세 문제가 드러났다. 뒤늦게 세금을 납부하는 것으로 넘겼다. 대선 때 이 대통령과 경쟁했던 이회창 당시 자유선진당 대선 후보는 “BBK 의혹 등 다른 문제보다 위장전입, 자녀 위장취업, 탈세가 더 심각한 문제”라고 비판했다. 위장전입과 위장취업 등은 정치인의 정직성 및 신뢰성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투자자에게 사기로 피해를 입힌 BBK 의혹에 대해서도, 이명박 당시 후보는 자신이 실소유주라는 의혹을 단호하게 부정해 왔다. 하지만 대선을 며칠 앞두고 자신이 세운 BBK를 통해 많은 수익을 얻고 있다고 대학교 강연에서 말한 동영상이 공개됐다. 둘 중 하나는 분명 거짓말이었다. 이 대통령은 표현상의 문제가 있었을 뿐이라는 식으로 또 넘어갔다. 도덕성은 중요하지 않게 치부됐다. 대통령 취임 직후 부동산 투기 의혹과 자녀 이중국적 보유 등 도덕적 하자가 있는 ‘강부자’, ‘고소영’ 인사를 정권의 얼굴로 내세운 것도 도덕성에 둔감한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이명박 대통령의 도덕주의 선언 이후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 사건이 불거졌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이 대통령의 일관된 철학은 ‘대선 때 어느 기업에서도 돈을 받은 게 없고 재임 중 그 누구에게도 돈을 받을 이유가 없다. 그런 만큼 도덕적으로 꿀릴 게 없다’는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의 ‘경제 살리기’ 구호는 2009년 들어 ‘도덕성 확립’이란 구호로 바뀌었다. 경제를 살리겠다며 대권을 거머쥔 이명박 대통령이 갑자기 ‘도덕주의 프레임’을 꺼내든 이유는 그가 철저히 ‘실용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고원 상지대 연구교수는 “실용주의자인 이 대통령에게 ‘경제 살리기’ 슬로건은 대선을 치르면서 이미 용도폐기된 카드에 불과했다”며 “지난해 촛불 정국 극복 과정에서 보수 결집 전략까지 활용한 상황이어서, 이 전 대통령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단은 도덕주의 프레임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도덕주의 프레임으로 엮을 손쉬운 표적이었다. 제1야당인 민주당에 정치적 뿌리를 둔 전직 대통령이었지만, 민주당은 서거 직전까지 노 전 대통령을 계승의 대상이 아닌 극복의 대상으로 취급했다. 현실 정치권에 있는 어떤 세력도 노 전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 혼자 남은 노 전 대통령은 현 정부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명박 정부는 도덕주의를 무기로 노무현 전 정부와의 대립 구도를 만들어 냈다. 검찰 수사가 개시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피의 사실이 마구 공표되면서, 정치는 ‘도덕적으로 꿀릴 게 없다’는 현 정부와 ‘억대 명품 시계를 선물받은’ 전 정부의 갈등 구조로 전개됐다. 물론 싸움은 검찰과 족벌언론을 정치 영역으로 끌어들여 노 전 대통령을 모욕한 현 정부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엘리트주의적 사고의 전형이명박 대통령은 동시에 급여 반납과 재산 헌납을 약속했다. 자신의 도덕적 진정성을 고백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월급 전액(1400만원)을 환경미화원과 소방공무원 자녀에게 내놓겠다고 말했다. 재산 헌납 약속은 2007년 대선 직전에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이후에도 이 대통령은 급여 반납과 재산 헌납 카드를 시의적절하게 반복 활용했다. 소외된 사람을 위해 ‘헌신과 봉사’의 수단으로 정치를 수행한다는 이 대통령의 태도는 엘리트주의적 사고의 전형이었다. 실제로 그는 대선 직전 “돈 없는 사람이 정치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이후 당시 발언이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이 발언은 현 정부 출범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보수 진영의 생각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을 지낸 김진홍 목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 “애초 감당할 자질이나 능력이 없으면 굳이 지도자에 오르려 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했다. 보수 진영에 깊이 뿌리내린 엘리트주의적 사고의 단면이다. 보수 시민단체인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이자 보수 진영의 대표적 이데올로그 역할을 하고 있는 박효종 서울대 교수(국민윤리학) 역시 이명박 정부 출범 이전에 이미 엘리트주의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박 교수는 2007년 4월23일 와의 인터뷰에서 “민주적 거버넌스가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안이한 생각은 수정돼야 한다. 민주정에다 공화정, 귀족정이 혼합돼야 한다. 엘리트주의에 반감이 크지만 일은 엘리트가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진홍 목사와 박효종 교수가 역설했던 ‘엘리트’가 이명박 대통령이었다면, 그 반대 지점에 서있던 사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민주적 거버넌스(통치체제)가 집단 지성에 대한 존중에 기반한다면, 엘리트주의는 집단 지성에 대한 경멸이나 무시를 전제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비주류가 최초로 정치적 발언권을 얻은 시기는 참여정부 때였다고 지적했다. “민주화 세력이 처음 집권한 시기는 국민의 정부였지만 집권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미 한국 현대사의 중핵을 형성한 인물이었다. 결코 비주류라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게다가 집권 초기 상당 기간 자민련과 공동정권을 유지해야 했던 과도적 형태라 한다면, 한국 사회의 비주류가 주류와의 격돌을 통해 본격적으로 정권을 잡은 시기는 참여정부가 최초였다.” 김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한국 사회의 80~90%를 형성하는 비주류의 좌절인 동시에 시대정신의 좌절을 뜻한다”고 덧붙였다.
엘리트주의에 입각한 이명박 정부가 ‘비주류 탄압’에 나선 이유는 허구적인 ‘경제 살리기’ 구호에 상당수 국민이 등을 돌릴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지난해 5월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촛불의 배후에도 그 ‘비주류’가 있다고 보았다. 탄압 수단은 도덕주의였다.
정치검찰 정국에 민주당 무기력경찰은 촛불집회를 주도했던 이들에게는 ‘공금횡령’의 혐의를 씌웠다. 도피 중이던 촛불 수배자들에게도 ‘검거 순간에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는 식으로 말을 흘렸다. 촛불 수배자들이 사실관계를 아무리 부인해도 ‘카더라’라는 굴레는 벗겨지지 않았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에서 “도덕주의는 민주적 과정의 실패의 산물”이라고 규정했다. 도덕주의는 사회적 갈등을 정치 영역에서 제도와 타협을 통해 해소할 능력이 없는 사회가 문제를 혁명적 방법으로 해소하려는, 일종의 ‘청산주의적 심리’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명박 정부는 노 전 대통령과 시민사회를 도덕주의 프레임에 끌어들이면서 두 가지 성과를 거뒀다. 한나라당과 이념적 차이가 협소하다고 비판받던 제1야당 민주당의 손발을 묶었다. 주요 정치 이슈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중심으로 돌아가자 노 전 대통령과 어정쩡한 관계에 있던 민주당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맡을 역할도 별로 없었다. 4월29일 치러진 재·보궐 선거 이전에도 민주당은 “여권과 검찰이 노 전 대통령 수사 정국으로 재보선을 치르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현실 정치권에 미치는 영향력은 이미 미미한 상황”이라며 검찰의 행태를 사실상 방관했다.
민주당은 도덕성을 무기로 내세우며 진행되는 민주주의의 탄압에 대해서도 무기력할 수 밖에 없었다. 이명박 정부는 ‘법질서 확립’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의 공간인 서울시청 앞 광장을 차벽으로 둘러 쌌다. 민주당은 뒤늦게 ‘차를 빼라’고 했지만, 경찰들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주요 시민단체에 대한 감사원의 표적 감사 의혹에도 허둥대기만 했다. 횡령, 탈세 등을 내세우는 공격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전략을 세우지 못한 것이다.
도덕성 문제는 수단에 불과진보·노동 진영에 대한 탄압의 강도도 높아졌다. 민주노총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대한 탄압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지난해 경제위기가 현실화하자 비정규직법과 최저임금제의 개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노동계 탄압을 본격화했다. 촛불집회와 관련해 이석행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을 구속했고, 비정규노조의 집단행동을 무력으로 막았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노사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해법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오직 ‘법질서 확립’이란 구호만 들이댔다. 최근에도 정부는 5월16일 대전 민주노총 노동자대회에 참석했던 노동자 가운데 457명을 연행하고 20명의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명분은 역시 ‘법질서 확립’이란 법치주의·도덕주의 프레임이다. 단일 집회에서 20명이 구속된 것은 이례적이었다. 5월1일 노동절에는 매년 개최됐던 노동절 집회조차 막으며 긴장을 높였다.
전교조가 맞닥뜨린 상황도 비슷하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교육당국은 전교조와 맺은 단체협상을 일방적으로 해지 통보했다. 지난해에는 일방적 일제고사 실시 방침에 반발해 이를 거부한 전교조 교사 12명을 해직했다. 보수 단체는 전교조를 ‘반국가 교육 세력’으로 규정하며 각 학교별 전교조 소속 교사의 명단을 공개하며 정부와 보조를 맞췄다.
가뜩이나 이명박 정부의 탄압으로 흔들리던 민주노총과 전교조를 이중으로 괴롭힌 것은 수구언론의 도덕성 공격이었다. 민주노총은 2008년 겨울, 내부에서 빚어진 성폭력 사태로 조·중·동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전교조 역시 당시 민주노총 간부의 성폭력 피해자가 소속 조합원인데도 미온적으로 대처하며 비난을 자초했다. 전교조는 최근에도 소속 교사 3명이 교생 실습 대학생을 성추행한 사건으로 물의를 빚었다.
노동단체의 도덕성 문제가 반드시 규명되고 해결돼야 할 과제라는 사실을 노동계 스스로도 부인하지 않는다. 엄민용 전교조 대변인은 “교육계의 비주류였던 전교조가 출범과 함께 스스로의 도덕성을 바탕으로 교육계의 부정부패 청산을 책무로 제시한 것이 사실”이라며 “전교조가 초기에 전개했던 촌지거부 운동도 도덕적 양심선언의 한 종류였다”고 말했다.
똑같이 주목해야 할 대목은 수구세력이 노동계의 문제를 매번 도덕성의 위기로 치환시킨 이유다. 이들은 노동계와 노동자의 실제적 문제와 어려움은 정작 외면하면서도 늘 도덕성 문제를 강조하면서 노동운동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도덕성 문제는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시민사회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권위주의적 억압이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왔다면 ‘고소영’ ‘강부자’ 인사와 감세정책, 그리고 부동산 정책은 경제적 민주주의의 후퇴를 불러왔다. 김호기 교수는 “민주주의의 한 축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라면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는 엘리트 계급에 의한 비주류 차별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후퇴로 이어질 것”이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은 비주류의 시각에서 권위주의 철폐와 사회 안전망 확충에 힘썼던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적 민주주의의 후퇴는 이명박 정부가 지난해 감행한 종부세 완화와 다주택자 양도세 감면이 대표적이다. 부유층에게 세제 혜택을 준 이 정책은 중산층과 서민 입장에서는 ‘부자 감세정책’이라고 반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명박 정부의 승리일까2009년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기묘한 ‘도덕주의 정부’는 도덕성을 무기로 ‘노무현 전 대통령 몰락’이라는 나름의 결과물을 얻었다. 하지만 이를 이명박 정부의 승리로 보기는 어렵다. 정치권을 배회하는 부패와 비리 담론은 대개 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정치 불신은 대개 보수 진영에 유리하게 작용하지만, 이는 도가 지나치지 않았을 때나 가능한 분석이다. 지금처럼 소수 엘리트 독점 구조가 강한 사회에서 정권이 정치·사회적 약자에게 편의적으로 법질서를 강조할 때, 파국을 피할 수 없을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한국 사회에서 부정부패를 더 줄이려면 정치에 도덕주의를 들이대는 것보다는, 먼저 서로 다른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강화돼야 한다”며 “주요 정당 간 이념적 차이가 협소한 정당 구조 속에서는 이데올로기화한 부정부패 담론으로 끊임없이 서로를 공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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